[괴물] 감상

2023.12.19 15:57

영화처럼 조회 수: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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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주연 : 안도 사쿠라, 나가야마 에이타, 쿠로카와 소야, 히이라기 히나타, 타나카 유코


우선 스포일러. 아무도 죽지 않아요.
오프닝의 강렬한 화재 장면부터, 아이가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평온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학폭과 이지메가 사지를 스멀스멀 조여 오는데, 항의하러 학교에 갔더니 교장 선생님은 [마더]의 그 분이고, 담임교사는 세상 억울한 에이타... 설상가상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브리핑 같은 영혼없는 응대까지. 뭔가 폭발할 것 같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몰아가는 지점들이 많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죠. 그의 작품에 죽음이 등장하는 건 [아무도 모른다]와 [세번째 살인], [어느 가족] 정도니까요. [원더풀 라이프]는 제외하고. 하지만 사카모토 유지의 각본인 만큼,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라쇼몽]처럼 다중 시점으로 펼쳐집니다. 하나의 시점에서의 오해와 의문이 다른 시점에서 풀리는 구조라, 영화의 전반부는 막막한 답답함과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에 불편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하나하나 새로운 시선이 더해지며 숨겨졌던 진실들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전율이 느껴지는 장면이 수도 없이 밀려 왔습니다.

사오리의 시점에서 명백했던 폭력교사 호리는 서툴지만 의욕적인 눈높이 교사였고, 호리의 시점에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무고는 호리를 가림막으로 하여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감추기 위한 발버둥이었습니다. 숨겨진 진실을 깨닫게 된 후 아이를 찾아와 자기가  잘못 했다고,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선생님은 얼마나 존경스럽습니까. 그리고 영혼 없음으로 일관하며 학교를 지키는 것만 생각하는 교장이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라 부르지 않아.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라며 아이들을 보듬어 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오리 파트는 드라마 [마더]를 떠올리게 합니다. 호리 파트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를, 아이들 파트는 [아무도 모른다]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사이의 어디쯤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태풍은 [태풍이 지나가고]가 생각납니다.

함께 영화를 본 딸아이가 그러더군요. "정말 아무도 죽지 않았을까?"
아무렇지 않게 쏟아지는 이지메와, 아무렇지 않게 퍼뜨리는 확인 안 된 가십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무심한 진심이 얼마나 많은 상처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을까요?
영화 시작부터 '누가 나쁜 놈이야?'하는 답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누군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던 나도 괴물과 다를 바 없다는 자각에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해가 났지만, 집에 돌아가면 친구는 아이를 괴물 취급하는 아빠 손에 할머니 집으로 떠날 거고, 폭력교사의 오명을 쓴 담임 선생님은 해고된 체이고, 손녀를 잃은 교장 선생님의 나팔 소리는 쓸쓸히 울려퍼지고... 
태풍에도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시 태어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햇빛 속으로 뛰어가는 두 아이의 모습은 여전히 빛나고, 그 모습을 보며 이제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곱씹어보게 합니다.

'괴물은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감독과 작가, 음악감독, 그리고 진심 괴물같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이라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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