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들 그렇겠지만 엄청난 명작...재밌는 수작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이라도 묘하게 손이 안 가는 드라마나 만화가 있죠. 그렇게 5년이고 10년이고 방치하고 있다가 정말 읽을 만화가 없는 어느날...아주 뒤늦게 그런 명작을 펼쳐보곤 해요. 


 심심한 어느날. 재미있는 드라마나 만화를 보고는 싶지만 딱히 볼만한 건 없고...셀렉션에 있어 실패는 하고 싶지 않고 싶을 때, 마치 쟁여두었던 것처럼 꺼내드는 그런 작품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죠.



 2.누군가의 추천으로, 10년도 더 전에 보려다 실패한 최강전설 쿠로사와라는 만화 1권을 봤어요. 연재를 시작한 지 20년이나 지난 만화지만, 2022년의 지금 보았기 때문에 절절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더라고요.


 2002년을 배경으로 한 작중에 등장하는 중년...쿠로사와는 본인의 신세를 비관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외로워하는 중년 남자예요. 동료나 부하 직원들의 호감을 사려고 하거나...공원에서 만난 꼬마아이의 온기에 취해 한순간 외로움과 서글픔을 잊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가 2022년에 중년 나이였다면 어땠을까요? 2002년에 그가 느꼈던 만큼의 외로움...자기비관 같은 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을 해 봤어요.



 3.한데 주인공인 쿠로사와는 엄청난 부자는 아니지만 혼자서 살기에는 충분한 수익은 있는 것으로 묘사돼요. 젊은 직원에게 초밥을 사 주겠다고 호기롭게 외치거나 전갱이 튀김을 가득 사서 동료들의 도시락에 몰래 넣어주거나...하는 정도의 씀씀이는 충분히 커버가 되는 걸 보면요. 


 이건 현실적인 묘사 같아요. 내가 전에 썼듯이 결혼을 안한다면 혼자서 한 몸을 건사하는 정도...거기에 +@정도의 수익은 어지간하면 가능하니까요. 만약 쿠로사와가 2022년의 인물이었다면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네이버 밴드나 소모임같은 어플을 찾아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영화도 보러 가고 술도 마시면서,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로 모임에서 젊은 사람을 만나면 비싼 술을 사거나 초밥을 사는 등 한턱 쏘면서 친해질 수도 있었을 거고요.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의외로 우리가 사는 현대는 '외로움'을 해소하는 비용도 제법 싼 거 아닌가 싶어요. 인터넷 게시판에서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고...단톡방에 들어가서 떠들면 조금이나마 사람들과 함께 하는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죠. 진짜 사람이 보고 싶으면 오프모임에 나가서, n분의 1로 제법 알차게 맛있는 술과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할 수도 있고요.



 4.휴.



 5.주인공 쿠로사와도 아마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그 다음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은'욕망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들 모두 그렇거든요. 사람들과 가까이하고 어울리고 싶은 욕망을 채우고 나면, 다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니까요.


 문제는 그 단계의 욕구를 느끼려면 일단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점이죠.



 6.사실 쿠로사와 같은 타입은...2022년인 지금도 어울려줄 사람을 찾기 쉽지는 않을거예요. 외모도 별로고, 사람은 착하지만 화술이나 화법도 오해를 사기 딱 좋죠. 나이는 어중간하게 많은데다가 돈은 아주 많은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인터넷도 덜 발달됐고 지금처럼 앱도 없는 세상에서는 마치 세상에 혼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겠죠. 


 과거에 살았었던 수많은 쿠로사와들은 얼마나 외로운 인생을 살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면서 매우 슬퍼졌어요. 그들은 얼마나 남에게 말을 걸고 싶고...남에게 호감과 존경을 얻고 싶고...타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을까요?



 7.물론 과거에는 지금보다 미혼인 남자나 여자가 적었긴 했죠. 하지만 그런 만큼 미혼 중년인 남자, 여자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요. 쿠로사와 1권을 보면 쿠로사와는 타인에게 자신의 호의를 전달하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쿠로사와의 호의를 받고 싶어하지를 않아요.



 8.하긴 살아보니 그래요. '호의'라는 것은 그것을 주는 사람이 갑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갑인 경우가 많아요. 어중간한 크기의 호의라면 사람들은 굳이 그것을 수상쩍인 사람에게서 받으려 하지 않죠. '호의'라는 것을 건네고 싶어도...마음으로 표현하고 싶어도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면 나눠줄 수가 없는 거고요. 


 그리고-외로움이라는 것은 내게 호의를 건네려는 사람이 없을 때보다 나의 호의를 받으려는 사람이 없는 때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죠.



 9.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때로 호의의 크기 자체를 압도적으로 키우려고 해요. '호의의 크기'를 부풀린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자기 자신을 부풀린다는 것도 되겠죠.  


 어중간한 크기의 호의라면 받는 사람들은 상대를 고르지만 아무나 줄 수 없는 크기의 호의라면? 그걸 주는 사람을 가릴 수 없게 되니까요. 그 단계에 생각이 미친다면 '그래, 나는 돈을 존나 많이 벌어주마.'모드가 되는 거죠.



 10.생각해 보면 고급 술집도 그런 메커니즘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강남에서 원한다면 20만원만 쓰면 섹스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남자들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만 하는 술집에 가서 100만원, 200만원을 써요. 그럴 돈만 있다면 대부분의 남자는...20만원 내고 섹스하는 것보다는 200만원 내고 이야기만 하죠.


 요즘은 그런 술집에 잘 가지 않지만...아니, 잘 가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결국 그렇게 돈을 쓰는 것은 자신을 부풀리는 행위. '내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행위가 아닐까...생각해요. 



 11.자신이 줄 수 있는 호의의 크기를 부풀림으로서 자신을 부풀리고 싶은 마음...인 거죠. 사실 타인에게 주는 마음의 크기를 부풀릴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리고 그럴 수 있더라도 그러한 '부풀림'은 보여줄 수가 없는 거고요. 그렇기 때문에 돈. 돈의 액수를 부풀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신의 마음의 크기, 타인에게 호의를 꼭 전달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돈으로 보여주는 거죠.



 12.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런 크기의 호의를 덥석 받지 않는다는 거죠. 한두시간에 백만원...2백만원...3백만원의 호의를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덥석 받아먹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예요. 


 그렇기 때문에 '호의를 전달하고 싶다...누군가 꼭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호의의 크기를 키워봤자 정상적인 사람들로부터는 더욱 멀어지는 구조 속에 갇히게 되어버리는 거죠. 


 남에게 호의를 주는 것도 삼겹살이나 소맥...김치찌개 정도의 씀씀이면 충분해요. 좀 크게 쓰면 소주 대신 화요25정도. 그 이상의 호의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돌아가서 유튜브나 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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