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4 22:24
- 1980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1시간 29분. 스포일러는 마지막 흰 글자요.
('THE FOG' 타이포 참 정겹지 않습니까? ㅋㅋㅋ)
- 에드거 앨런 포의 인용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보거나 보이는 모든 것들은 꿈 속이 꿈에 불과합니까?'
배경은 캘리포니아의 '안토니오 베이'라는 어촌 마을이에요. 찾아보니 현실 안토니오 베이는 스페인에만 있고 캘리포니아에는 없는 것 같지만 뭐 대충 넘어가구요. 내일이면 세워진지 100년이 되는 이 마을은 100년 전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날 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을 역행하는, 게다가 번쩍번쩍 조명 효과까지 장착한 수상한 안개가 바다로부터 다가오고. 그 안개 속에는 음침한 그림자가...
(바로 카펜터의 전작 '할로윈'의 주연이었던 제이미 리 커티스가 다시 나오니 주인공일 것 같죠? 근데 이 분은 뭔가 일은 많이 하는데 스토리상 존재감이 좀 약하고)
(아들을 안개 한복판에 냅두고 등대에서 애절한 안내 방송을 하는 이 분이 사실상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크레딧에 이름도 가장 먼저 나와요.)
- 1980년은 70년대입니까 80년대입니까? 답은 나와 있지만 영화 같은 거 얘기할 때 시대별로 싸잡아 뭐라뭐라 떠들기엔 참 애매한 문제죠. 숫자상으론 '80'이니 분명히 80년대 맞긴 한데. 어쨌든 70년대가 방금 전에 끝났으니 70년대의 영향이 거의 전부이고, 80년대는 막 시작이니 '이것이 80년대 스타일이다!'라고 말하기엔 또 너무 빠르단 말이에요. 간단히 '둘 다'라고 말하면 될 문제지만 그냥 좀 신경이 쓰입니다. ㅋㅋㅋ
이런 쓸 데 없는 얘길 막 늘어 놓고 있는 건 그냥 이 영화가 존 카펜터의 '리즈 시절' 영화 중 하나라는 얘길 하려다가 그랬습니다. 이 바로 전 영화가 '할로윈'이고 그 전 영화가 '분노의 13번가'. 이 영화 다음 영화가 '괴물', 그 다음 영화가 '크리스틴'이고 뭐 그래요. 그러니 시대는 대충 잊고 존 카펜터 전성기에 나온 호평 호러 무비다... 라는 정도만 기억해 주시고요.
(끼야악 안개다 무서워!!! 하고 도망다니는 이야기라 밍숭맹숭해질만도 한데, 그 시절 존 카펜터 능력 덕에 괜찮았습니다.)
- 근데... 솔직히 많이 무섭고 긴장감이 팡팡 터지고 그러진 않습니다. 하하. 사실 요즘 영화들 기준으로 보면 좀 싱겁기도 해요. 왜 그러냐면요.
이야기의 템포가 많이 느긋하고 자극적인 장면들은 조금 나옵니다. 대충 이런 식이에요. 도입부에서 이 마을에 얽힌 전설을 동네 할아버지가 꼬맹이들 모아 놓고 들려주는 게 대략 5분. 그리고 안개의 1차 습격으로 인해 마을에 이상 현상들이 벌어지고 사람 죽어나가는 게 대략 10분. 이래서 이대로 쭉 가는구나! 했는데 쨍쨍 하고 날이 밝은 후에 그 마을 사람들이 미스테리를 파해치고 마을의 비밀을 깨닫는 과정으로 거의 한 시간을 채웁니다. 그동안 안개 안 나와요. 사람도 안 죽고요. ㅋㅋㅋ 그러다 끝나기 20분쯤 전에 다시 밤이 되고, 안개 깔리고 나서 클라이막스거든요. 게다가 이 안개에는 할당량(...)이 있는데 총 여섯명 죽이고 가는 게 목표구요. 도입부에서 이미 셋을 해치웠으니 클라이막스에선 셋만 더 죽으면 되죠. 그리고 이 때 관객 입장에선 죽어도 하등 상관이 없고 또 처음 나올 때부터 죽을 것 같았던 단역에 가까운 조연 둘이 먼저 죽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한 명은 또 스토리상 이미 죽음이 예정되어 있거든요.
이러다 보니 중반의 한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긴장감이 풀어지고. 막판 액션에서도 누가 죽을지 뻔히 보이니 그 외의 다른 인물들은 고생을 하고 위기를 겪어도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야기 자체가 긴장감과는 좀 거리가 멀게 짜여져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니들이 아무리 고생을 해봐야 죽을 거란 생각이 1도 안 들어서 편안했다구요.)
- 그리고 메인 스토리 역시 잘 뜯어 보면 공포감, 긴장감과는 좀 거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말하자면 바닷속에 가라 앉은 보물에 대한 이야기이고, 거기엔 숨겨진 비극적인 역사가 깔리면서 빌런으론 해적스런 비주얼의 뱃사람 귀신들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분명히 호러 코팅은 되어 있지만 그 본체는 바다에 대한, 뭔가 해적 나오고 보물 찾기 하는 그런 옛날 이야기인 겁니다. 20세기 소년, 소녀들이 많이 읽고 재밌어 했던 류의 괴담... 이라기 보단 차라리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이고 그러니 또 이게 별로 안 무서운 거죠. 이걸 '본격 호러'라고 본다면 아마 '캐리비안의 해적'도 호러로 분류를 해야 할 겁니다. 뭐 실제로 그 영화에도 호러 코드가 많이 들어있긴 하지만, 호러 무비와 호러 코드가 들어간 영화는 다르죠. 우리가 잭 스패로우의 모험을 보며 무섭다고 생각하진 않잖아요? ㅋㅋ
그래서 기대치 조정이 좀 필요합니다. 그냥 '수상하고 위험한 뭔가가 어슬렁거리는 안개가 사람을 덮친다!'는 심플한, 미니멀리즘스런 호러 영화를 기대하심 절대로 안 되구요. 으스스한 옛날 이야기가 현대로 쳐들어와서 사람들 고생 시키는, 좀 옛스럽게 괴기한 모험담 정도랄까... 뭐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안개 속 유령들은 간지가 나죠. '화성의 유령들' 아님!)
- 그래도 다행인 건 이게 어쨌거나 '리즈 시절 존 카펜터 영화'라는 겁니다. ㅋㅋㅋ
기대보다 조금 나오고 덜 죽이긴(...) 해도 영화 속 '안개'와 그 속 괴인들의 연출이 좋아요. 원경은 미니어처와 드라이 아이스, 근경은 대충 연기 발생 장치 속에 조명 좀 집어 넣고. 괴인들도 열심히 안개와 그림자 속에 꼭꼭 숨기면서 가난하게 연출한 게 다 티가 나지만 결과물은 썩 보기 좋고 신비로운 느낌도 충분합니다. 특히 원경들 같은 경우엔 그림 자체도 불길하게 예쁜 느낌으로 참 잘 잡았어요.
누가 죽고 살지는 뻔하다 할지라도 클라이막스 즈음의 전개도 좋습니다. 등대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는 여주인공이 멀리서 안개를 지켜보며 안내하고, 현장 요원(...) 제이미 리 커티스와 친구들이 그 안내에 따라 안개와 쫓고 쫓긴다는 액션 아이디어도 좋구요.
또 이런 '옛날 이야기'다운 최종 해결책과 마무리도 맘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막 재밌는 건 아니었지만 이야기 톤과 어울려서 깔끔했다는 느낌.
(등대를 바탕으로 컨트롤 타워 놀이를 하는 아이디어도 괜찮았는데... 아니 이 짤로 위치를 다시 보니 여기에서 마을이 잘 보일 리가 없어 보이는데요? ㅋㅋㅋ)
- 사실 뭐 흠 잡자고 열심히 뜯어 보면 부족한 구석은 많습니다. 등장 인물들이 많은데 좀 어수선하게, 얼기설기 엮여 있다는 느낌도 들구요.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뭔가 설정만 잡아 놓고선 발전을 시키려다 만 것 같은 느낌이라 다 보고 나면 좀 허해요. '난 불행을 몰고 다니나봐'라고 자조하고 다니는 제이미 리 커티스 캐릭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겠죠. 그냥 바람처럼 나타나서 이유 없이 열심히 노력하다가 그냥 끝. 이런 식이라. ㅋㅋㅋ
또 앞서 말했던 중간 부분의 기나긴 비밀 파해치기 단계가 인트로와 클라이막스에 비해 긴장감이 많이 부족해서 좀 늘어지는 느낌도 있구요. 이 부분은 호러 영화보단 소년 소녀 모험 영화의 비밀 찾기 느낌입니다. ㅋㅋ 근데 또 그런 와중에 일은 놀랍도록 쉽게 풀려서 순식간에 진실에 도달해 버리고. 제작비의 문제였는지 100주년 마을 축제도 정말 썰렁하게 휙 지나가 버린 후에 클라이막스는 그냥 대략 대여섯명이 내내 북치고 장구 치다 끝... 등등.
(다들 오른쪽 여자분은 알아 보시겠죠. 호러퀸의 엄마 호러퀸, 자넷 리 여사님이십니다. ㅋㅋ 모두 함께 뤼스펙을 바치고 가도록 하죠.)
- 그런데 뭐 존 카펜터의 영화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흠 없이 매끈한 작품이었던 적은 별로 없거든요. 거의 데뷔작인 '13번가의 분노'가 오히려 가장 그런 느낌에 가까웠고 이후 영화들은 다들 '아 B급 영화구나' 하는 가운데 강력한 훅들이 첨가되어 있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 영화도 대충 그런 느낌으로 잘 봤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21세기 호러 영화들의 빠른 템포나 자극적 전개들 같은 걸 기대하심 아니되십니다. ㅋㅋ 옛날 영화다운 옛날 영화에요. 그렇게 좀 느긋하고 순한 느낌(?)으로 쏠쏠하게 재밌는 옛날 호러... 가 땡기신다면 한 번 보실만 할 겁니다. 전 그냥 즐겁게 잘 봤구요.
+ 이런 거 따지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대체 안개 속의 그 유령들은 100년 동안 뭐 하고 있었답니까. 딱 100주년 기다려 활동 개시하는 것도 희한... 그러다 원수들 후손이 그 전에 다 이사라도 가 버렸으면 어쨌으려고. ㅠㅜ
++ 생각해보니 이런 류의 공포 영화 치곤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총기류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영화였네요. 허허 건전하기도 하지...
+++ 영화를 보다가 깨달은 건데, 제 기억 속에선 이 영화가 '환상특급'의 '등대' 에피소드와 뒤죽박죽 섞여 있었습니다. 30여년만에 기억을 분리해냈는데, 결과적으로 무섭기는 '등대'가 더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마도 추억 버프일 가능성이 크겠죠. 그리고 지금 검색해보니 그 에피소드에 지오반니 리비쉬가 나왔었네요? ㅋㅋㅋ
++++ 정말 돈 없이 찍긴 한 모양입니다. ㅋㅋ 검색을 해 보니 유령 대빵 역할을 비롯해서 많은 단역들, 스탭들이 역할을 두 가지 이상씩 해가며 만든 영화더라구요.
그리고 다 찍고 편집해서 시사했더니 회사측에서 '야 너무 순하잖아?' 라고 해서 도입부와 클라이막스의 액션들을 다시 찍었다는데, 제작사가 잘 한 것 같아요. 지금이 딱 괜찮은데 여기서 더 순해졌으면 많이 심심했을 듯.
+++++ 스포일러 구간입니다.
알고 보니 요 마을은 비겁하고 잔인한 범죄로 이뤄낸 결과물이었습니다. 멀리서 배 타고 나병 걸린 갑부가 찾아와 자기들 정착시켜 주면 금을 주겠다 그랬는데, 나환자촌을 마을에 들이기 싫었던 마을 리더들이 가짜로 수락하고는 안개 낀 날에 암초로 그 배를 유인해서 다 수장시켜 버렸어요. 그러고 나중에 금을 탈취해서 마을 살림에 보탰던 것. 안개 속 유령들은 당연히 그때 빠져 죽은 사람들이었구요. 근데 좀 웃기는 게, 이 때 마을 악의 축이 다 해서 여섯명이었대요. 그래서 유령들은 걍 사람 여섯명을 죽이는 게 목표입니다. 아무나 여섯 명이요. ㅋㅋ 그래서 도입부에 죽어 나간 마을 뱃사람 세 명 + 기상 담당관 + 여주인공 아들을 봐주던 동네 할머니까지 다섯명이 죽고 맨 마지막에 그 시절 호러 영화답게 '끝난 줄 알았지롱?'하고 다시 유령들이 튀어나와 죽이는 동네 목사 한 명(이 사람은 100년 전 빌런들 중 리더의 후손입니다. 어차피 반드시 죽었어야 할 사람.)으로 여섯을 채워요.
바꿔 말하자면, 나름 주요 인물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중에 죽는 사람은 목사 딱 한 명이란 얘깁니다. 나머지는 고생은 좀 하지만 다치지도 않아요. ㅋㅋ 참 순한 맛 호러였습니다.
2023.05.24 22:38
2023.05.25 12:03
2005년작은 대략 평이 '...만들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수준이더군요. ㅋㅋㅋ
2023.05.24 23:09
글 잘읽었어요. 계속 기대가 커요 :)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동에서 서울극장으로 옮겼었어요. 아트시네마가 특이한게
드팔마나 카펜터 영화제를 따로 하는게 아니라 다른 프로그램에 대표작 다섯편 정도를
끼워서 해줘요. 저는 좋았어요. 매사에 아주 긍정적인 사람이거든요.
그때 <할로윈>, <안개>, <뉴욕 탈출>, <더씽>(이건 세번! 다른 프로그램 때요.), <빅 트러블>등을 보았어요.
제가 어린 마음에 제일 대단하게 생각한건 영화감독이 영화 제목 앞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는 거였어요. 천하의 히치콕을 제외하면 별로 기억이 나지않아요.
재미있는 내용이 많네요.
"한국 비디오 표지로 참 엉터리 왜곡을 여러 번 겪은 바 있다. 할로윈 금성 비디오는 뒷표지로 카펜터즈의 존 카펜터라고 왜곡했고
스티븐 킹이 원작과 감독, 카메오를 맡은 맥시멈 오버 드라이브 세신영상 비디오에서는 스티븐 킹 감독이 아닌 존 카펜터 감독이라고
역시 왜곡했으며 지금은 사라진 영화잡지 로드쇼에서는 이것을 거장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씨네마트판 매드니스 비디오 표지에서는
나이트메어의 존 카펜터 감독이라고 역시 왜곡했다!"
2023.05.25 12:53
서울 아트 시네마라니!! 지역민 입장에선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네요. ㅋㅋ 이런 곳을 좀 팍팍 지원해줘서 제대로 키워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맨날 K 어쩌고 하면서 호들갑 떠는 것치곤 이런 기본적인 부분에 여전히 인색한 것 같아요.
저도 그 중에서 '괴물'(=더씽)을 가장 많이 봤습니다. 사실 그걸로 존 카펜터 입문을 했던 것 같아요. ㅋㅋ 그게 너무 좋아서 원작을 아직도 안 봤는데 문득 이제라도 한 번 봐야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네요.
카펜터스... ㅋㅋㅋㅋ 게다가 나이트메어 감독이라니 이건 원 샷 투 킬이네요. 고 웨스 크레이븐님의 평안을 빕니다... 하하.
2023.05.24 23:47
2023.05.25 12:57
매드니스 저도 극장에서 봤는데, 고딩 남자애들과 함께 본 공포 영화치곤 다들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다시 보고 싶은데 아무 OTT에서도 챙겨주지 않아서 떠오를 때마다 슬퍼요. ㅠㅜ
mz호러라고 하시니 재밌네요. ㅋㅋㅋ mz는 모르겠지만 요즘 호러 트렌드는 소수자들 내세워서 예전 호러의 보수적인 부분을 뒤집고 조롱하는 쪽 같아요. 요즘에 평가 좀 좋다 싶은 호러 영화 주인공들은 싹 다 여성 아니면 흑인 아니면 흑인 여성이더라구요. 그게 아니면 이거슨 아트하우스인가 호러인가... 싶은 하이 컨셉(?) 호러들인데. 저야 호러라면 다 좋지만 요즘의 그런 세련된 영화들 보다가 가끔 70~80년대 호러들 보면 좋아요. 거칠거칠하면서도 힘과 열정이 유난히 팍팍 느껴진달까. 그런 기분이네요.
아 이게 원작이었군요 전 2005년작을 봤어요. 그리고 항상 <리에니메이터>과 원작/감독이 같은 <데이곤>이라는 영화랑 혼동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