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지엔슈타트의 아이들

2020.01.24 10:26

어디로갈까 조회 수:881

terzin

 

 (며칠 전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을 뒤늦게 읽었어요. 언급하신 스티브 라이히의 <Different Trains>를 기어코 듣노라니 이 아이들이 눈에 밟혀요. 명절을 하루 앞두고 적절치 않은 사진과 글이겠으나 듀게인들 연식이 짐작돼서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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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기차를 타고 잠시 몸을 뒤척이노라면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닿습니다. 이차대전 중 나치는 이곳을 휴양지인 양 속여 유대인들을 불러들였죠.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게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이곳에서 만오천 명의 아이들이 살았습니다. 어른들과 똑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고, 어른들이 본 모든 지옥의 풍경을 본 아이들이에요. 그 중 백여 명의 아이들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아이들이 도달한 곳은 크레마토리움(화장터)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갔던 날은 수많은 참배객/관광객이 관광버스를 타고 막 도착한 뒤였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언어로 떠들며 자료관으로, 서점으로, 영화관으로 흩어졌어요. 그 어수선한 무리 속에서, 저는 벤치 한쪽에 홀로 앉아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마치 동상인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어요.  사람들이 건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자신만 홀로 남자, 그제서야 비로소 노인은 안경을 벗더니 천천히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건 테레진의 아이들이 느꼈을 절대고독의 현현으로 보였어요. 아마 그 노인은 틀림없이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수용소 영화관에서는 그들이 홍보용으로 찍은 필름들을 상영해줬어요. 여자들은 수줍게 웃으며 화단에 물을 주고, 남자들은 열심히 감자를 캐고, 아이들은 초롱한 눈빛으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죠.  
아이들의 그림과 글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남아 있더군요. 이런 절규의 말들이 기록돼 있는 책입니다. "안돼, 안돼요 하나님. 우리들이 사라져 가는 걸 보고만 계시지 말아주세요." 

2.
리디체 마을 벌판 한쪽에 학살된 아이들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표현할 길 없는 표정이 배어있는 얼굴들이에요.
그들을 바라보노라니 슬픔과 분노가 뒤얽혀 제 가슴 속을 마치 운하처럼 음울하고도 나른하게 흘렀습니다. 인간이란 통째로 하나의 거대한 오류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침묵하며 외롭게 죽어갔을 이름 없는 아이들. 그 얼굴들 마다에 따스하게 깃들던 금빛 가을볕과 강아지풀만 무성하던 無言의 벌판을 저는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테레지엔슈타트에 다녀온 후 한동안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건 밤이기도 하고 낮이기도 했어요.  소란한 광장이기도 막힌 골목 안이기도 했어요. 
걷고 있는 제 앞에서 갑자기 길이 사라져요. 소름돋는 공기와 압도하는 정적.
불안한 기운에 몸이 떨려옵니다. 저는 숨을 죽인 채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죠. 
저편에서 허공의 벽을 열고 나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슬픈 얼굴들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속삭입니다.
'우리를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왜 그들이 아직도 테레진과 리디체로부터 걸어나오는지,
왜 자신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왜 이승을 떠돌며 나를 두렵게 만드는 건지,
왜 새벽녘 불길한 꿈으로 나타나 내 어지러운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대는지,
왜 살아서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산산조각 내어 부숴놓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죄의 얼굴이며 이세상 모든 상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류의 모든 죄와 상처가 분노하고 팽창하고 응결한 그 정령들이 제가 방심하고 웃으며 걷는 길에 나타나 애원한다는 것을.
'우리를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

지금도 세상 한쪽에선 그 아이들과 같은 절망들이 되풀이되는 곳이 있을 테죠. 
미국이 침공하는 이라크에서, 테레진과 리디체 아이들의 조국이 된 이스라엘이 유린하는 팔레스타인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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