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4 20:02
대학교 때 등록금 제값한다고 느낀 수업 중 하나가 토론 수업이었습니다. 그리스의 토론을 짧게 흝아보고 조별발표 형식으로 의제를 하나 정해서 발표를 하면 그 다음에 토론을 해보는 건데 정말로 현실 키배를 하는 기분이라 좀 즐겁기도 했죠. 그리스 로마 신화 전공을 하신 교수님께서 당시 수업을 맡으셨는데 강의 자체가 재미있어서 이 교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강의는 항상 인기폭발이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키가 굉장히 크시고 안경을 쓰고 다니시던 분이셨는데 훈훈한 이미지만 머릿 속에 남다보니 이제는 김영하 소설가의 이미지와 좀 뒤섞여버렸네요.
토론 수업의 의제들은 의외로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노키즈존을 발표한 조가 있었는데, 그 때는 이 이슈가 핫하지 않아서 노키즈존을 반대한다는 그 조에게 상당히 많은 공격들이 쏟아졌고 그 조는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트위터에서의 노키즈존을 보면 참 상전벽해다 싶은... 저는 '일본 포르노의 수입 합법화'를 발표했었는데 데빌스 애드버킷을 해야하는 남학생들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반발을 했던 게 생각이 납니다. 합법화되면 비싼 돈 내고 봐야하는데 뭐하러 하느냐, 한국 에로비디오의 규제부터 파는 게 순서 아니냐 등등... 저 때 저는 극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만 저 이슈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요.
그 당시 저희 조의 가장 큰 논거는 금주법이 실패했듯이 이미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는 사회적으로 근절할 길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저작권 침해이며 합법화를 통해 더 확실한 관리를 할 수 있으니 이걸 제대로 논의해봐야한다 이런 시각이었습니다. 발표를 듣는 학생들이 이 논지에 다들 공감했는지 좀 변죽만 때려댔는데 수업이 끝나고 교수님이 저희 조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논지도 일관성 있게 잘 세웠고 질문에 대답도 잘 했다, 다만 포르노라는 영상매체는 성기에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를 찍는 영상인데 그 행위를 영상에 담아서 유통시키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허용해도 되는 것인지는 더 생각해봐야한다고요. 이건 저한테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시각에서 말을 해주지 않았거든요. 이 때의 답변이 하도 인상깊어서 저는 종종 영화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윤리에도 같은 질문을 적용해보곤 합니다. 이 전에 여성인권영화제에서 본 '시체가 된 여자들'이란 영화도 여자 시체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들을 보면서 윤리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작품이었기도 하고...
그 때 토론은 저에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무엇에 찬성하고 반대하냐는 입장 차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르노를 하나의 영상물로만 취급한다면 그것을 유통시키자는 데 반대할 논리가 별로 없어질 겁니다. 하지만 그 영상물을 만드는 여자배우들을 생각해본다면,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될 겁니다. 그 당시 여자, 남자 조원들 다 밤 늦게까지 반대 입장을 스스로 말해보면서 논리를 세워나갔는데 끽해야 이십대 중반이다 보니 다들 생각에 한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슈를 다룰 때 그 이슈의 한복판에 끼어있는 사람을 놓치면 토론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
저에게 인상 깊게 남았던 또 다른 토론 수업의 기억은 법학개론 시간이었습니다. 강의가 오후 늦게 열려서 좀 널널하기도 했고 경찰공무원이나 법쪽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학생들이 슬렁슬렁 듣는 수업이라 아주 타이트하진 않았습니다. 교수님은 이제 막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오신 분이셨는데 가끔씩 학생들을 원으로 모아서 토론을 열곤 했습니다. 그 때의 토론은 그렇게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좀 뻘쭘해하면서 의견 표현을 잘 안했거든요.
어느 날은 무려 '동성애자를 우리는 찬성해야하는가 반대해야하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되게 황당한 주제인데, 교수님이 인권의식이 그러신 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해 반대가 너무 일상적으로 박힌 학생들에게 이 이슈를 조금이라도 더 공적으로 생각하고 말해보게끔 하는 기회를 주려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이 날 토론은 생각보다 조금 더 뜨거웠고 저는 이 날 말을 되게 많이 하게 되었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들이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뻔하디 뻔한 편견들을 근거로 반대의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섭리 등등... 그 중 되게 조용하고 순하게 생긴 어떤 남학생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는 동성애자들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군대에 가면 다른 사람을 강간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백퍼센트 실화입니다. 그 당시 동성애자를 찬성(?)하는 사람은 저와 어떤 여학생밖에 없었는데 이 말을 듣자마자 그 동안 조금 온건하게 토론을 하던 찬성파 학생이 "말도 안돼~~!!" 하면서 거의 토론을 포기하는 혼잣말을 뱉었기 떄문이죠.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서 웃긴데, 그 당시 저는 너무 황당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잠시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마 그 때 그 학생이나 저의 표정을 카메라가 찍고 있었다면 저는 유튜브 썸네일로 "한방 먹고 당황하는 쏘니!!" 이런 식으로 편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지는 비논리에 대한 경악과 논리적 패배로 인한 침묵을 구분하지 않으니까요.
그 토론을 통해서 반대자들이 과연 생각을 바꾸었을까? 혹은 자신의 비과학적인 편견을 폐기했을까? 좀 회의적입니다. 애초에 찬성과 반대의 입장 차이를 설정해둔 토론의 구조 때문에요. 세상에 어느 사람이 아, 그래? 그럼 이제부터 동성애자에게 찬성해야겠군~! 하고 자기 입장을 바꾸겠습니까. 차라리 동성애자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말하고 그에 대한 반박을 차례대로 해보게끔 하면서 교수님이 명확한 방향을 설정했다면 더 좋은 시간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
토론은 과연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가. 어떤 의제를 찬반의 입장 차이로 이미 전제를 세워두는 것 자체가 이미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함정이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입장 차이의 선해를 낳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방송국이 너무 흥행 욕심에 빠져 이런 불필요한 토론을 내보낸 건 아닌지 좀 슬프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밖에 마이크를 쥐어주지 못할만큼 공론장 자체를 기울게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2022.04.14 21:32
2022.04.15 08:10
2022.04.14 22:27
2022.04.15 08:13
2022.04.15 01:25
좋은 글 감사합니다(2) 저 동성애자 반대하면서 한다는 얘기는 얼마나 상대적으로 확률은 낮지만 자기가 당할 가능성이 생길 때만 유별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는 사례죠. 요즘에도 저런 주장 종종 봅니다.
2022.04.15 08:22
2022.04.15 08:22
교수 뭐 별 거 있나요. 전 학생 때 중국의 뭔가를 소재로 한 토론을 했는데, 통계 자료 다 준비해와서 주장하는데 상대방 학생이 '내가 살다 와서 아는데!!' 하나로 시종일관 바득바득 우겨대는 바람에 대화가 안 돼서 망했거든요. 근데 끝나고 교수가 평을 하면서 '내가 살다 와서 아는데!!'를 매우 칭찬하고 그쪽에 A, 제 쪽에 B를 줬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ㅋㅋ
2022.04.15 08:39
2022.04.15 10:30
2022.04.15 10:47
2022.04.15 11:0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정인의 이미지가 섞여서 엉뚱한 사람이 떠오르는 건 나이 때문인 줄 알았는데 쏘니 님도 그러신 걸 보니 위안이 되네요. ㅎㅎ
충분한 정보와 안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토론 수업은 수사학 같은 기술을 연마하는 시간이 되기 쉽겠죠. 토론이라는 게 자기 주장을 끝까지 붙들고 방어해야 하는 것이니 말하는 사람은 순간의 말장난으로 모면해 놓고 만족하고 구경하는 사람도 자기 입장을 공고히 하는데 쓰기만 하고, 의견 차이를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이 잘 안 되는.
엊그제 우리가 봤듯 애초에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주제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선 특히 부정적인 면이 큰 거 같습니다.
2022.04.15 14:49
2022.04.15 17:13
2022.04.15 19:57
현대사회에서 그 누구도 성기의 노출과 그에 대한 육체적 접촉을 쉽게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영화에서는 섹스를 하는 시늉만 하면서 그걸 카메라로 커버하지 진짜로 섹스를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기의 표현은 영상매체에서 마지노선에 걸쳐있는 영역이고 한편으로 인간의 성에 대한 존중과도 얽히는 문제입니다. 리얼리티를 위해 배우가 칼에 찔리는 씬을 진짜로 칼로 찔러서 (생명의 위협이 없게끔 한다는 전제하에) 표현해도 되는가, 같은 문제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2022.04.15 22:26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따위는 토론같은거 할 실력이 안된다는 열패감?에 빠져있었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말씀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을 반박할때마다 우리가 잘해서 상대가 할 말이 없는거라는 그 생각이 환상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