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간단히 상황정리부터 해보겠습니다.

지금 20대 후반이고, 별 재미는 없지만 매우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물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으나 수학을 지지리도 못하고 또 싫어해서

철밥통이나 건지자 이러면서 문과로 도망쳤는데도 수의사나 동물행동학자에 대한 꿈과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고요.

그런데 며칠 전 서울대에서 수의대 교차지원을 허용한다고 해서 수능을 다시 쳐야하나 말아야하나 엄청난 혼란에 빠졌습니다.

아 물론 서울대를 노리겠단 건 아니고, 곧 다른 대학들도 따라할테니까요.

 

만약에 수능을 다시 친다고 했을 때의 난관은 수학입니다.

언어, 외국어, 사탐은 과목당 1달씩만 공부하면 적어도 2등급은 받지 않을까 싶은 자신감이 있는데 수리는 아니에요.

고등학생 때 수능 성적은 문과 수학(그게 가형인지 나형인지도 기억 안나네요) 기준으로 3등급이었고, 모의고사에서도 항상 그 수준이었습니다.

어제랑 오늘은 올해 수능 언어랑 외국어를 B형으로 한번 풀어봤는데 예상 등급컷으로 언어는 2등급, 외국어는 1등급이 나오길래

만 8년만에 풀었는데 이 정도니까 문학 공부 조금하고 감만 안 떨어지게 하면 1등급 무난하게 나올 것 같은데? 싶은 자만에 빠져 있는 상태입니다.

사탐은 진짜 기억 나는 게 별로 없어서 경제만 풀고 말았는데 이것도 과목당 한달씩만 보면 안되려나? 막 이러고요.

 

다음으로는 경제적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수능을 쳐서, 만약에 수의대에 붙었다고 하면 학비가 국립대로 잡아도 한학기에 최소 300,

또 제가 사는 지방에 수의대가 아예 없으니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한학기 넉달 잡고적어도 700의 돈이 들겠지요.

물가상승 등등을 고려하지 않아도 6년의 학교 생활을 하려면 8천 4백이라는 돈이 필요합니다.(실제로는 1억쯤 들듯요) 

제가 천재라서 내년에 수능치고 2015년도에 입학한다고 가정하면 제 수중에 있는 돈은 딱 6년 학비 정도일 거고,

생활비 등등은 알바로 벌어야 하는데 저 스스로가 과연 학업과 생계를 병행할 수 있는 강인한 인간인지 확신이 없어요.

어머니는 이 지점에서 반대합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면 어떡하냐고요.

엄마 진주(제일 가까운 수의대 소재지)엔 지하철 없다-라고 했는데 지하철이 생길 수도 있겠죠.

 

다른 대학들이 서울대 안 따라해주면 어떡하나, 난 서울대 갈 성적은 절대 못 받는데! 라는 걱정도 들어요.

전국에 수의대는 고작 10개이고, 넘사벽 서울대와 사립인 건국대를 제외하면 제가 접근가능한 대학 8곳 모두가 교차지원을 허용하더라도

수학은 못하지만 동물은 좋아하는 저같은 불쌍한 중생들이 몰려들어서 커트라인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을텐데

서울대만 허용하거나 두세곳만 문을 열어주면 제가 수리 빼고 전부 만점을 받더라도 힘들 것 같거든요.

사실 최악은 막상 수의대에 가서 "내가 상상한 수의대는 이렇지 않아!"라고 외치는 상황이지만 그건 수능 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겠지요.

 

이런저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혼자 살다 죽을 인생 이 정도는 내 맘대로 해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혈기 넘치는 생각이 들어서

아는 수의사들(이래봤자 두명)한테 수의대에서 동물실험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야생동물보호센터 같은 곳은 경쟁이 치열한 자리인지까지 물어보고 다니는 중입니다.

진짜 20년을 원했던 일에 접근할 길이 이제서야 열렸다고 생각하니까 뭘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안 서는 상태예요.

일단 내일은 서점 가서 수학 교재나 한번 들춰볼 계획인데 이 기세라면 다음주부터 수학 과외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비슷한 상황을 겪거나 목격하셨거나 아니면 그냥 이 얘기에 감정이입 하시는 분들, 어떤 얘기든 좋으니 조언이나 의견 부탁드려요.

 

*제가 글을 조금 오해의 여지가 있게 쓴 것 같네요. 수능 공부한다고 직장을 관둘 생각은 아닙니다.

수의대 붙을 때까진 당연히 밥줄 붙잡고 있다가 수의대 들어가면 그때부터 철밥통은 안녕이고 노년에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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