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23 13:56
[필립 모리스]라는 제목만 본 사람들은 대부분 담배회사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할 것입니다. [I Love You Phillip Morris]라는 원제는 보다 친절하지만 그래도 담배회사에 대한 냉소적인 다큐멘터리일 가능성이 더 높죠. 하지만 이 영화의 필립 모리스는 담배회사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우연히 이름이 담배 회사와 같았던 남자지요. 그럼 그에게 사랑한다고 외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스티븐 제이 러셀입니다.
스티븐 제이 러셀은 실존인물이고 이 영화가 그리는 그의 인생 상당부분은 사실입니다. 그는 한동안 평범한 경찰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었다가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이혼한 뒤 전문 사기꾼으로 살았습니다. 사기꾼으로 벌인 그의 경력도 화려하지만 더 유명한 건 그가 체포된 이후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치미 뚝 떼고 벌인 일련의 탈옥 행위 덕택에 그는 '후디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어요. 그의 탈옥시도는 절묘할 뿐만 아니라 로맨틱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감옥에서 만난 그의 애인 필립 모리스와 같이 있거나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니까요.
그 결과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좀 괴상합니다. 괴상한 사람의 이야기로 괴상한 영화를 만든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고 물을 수 있을 텐데, 그렇지가 않아요. 전 러셀의 이야기를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로 처음 접했는데, 그 때 저에게 러셀과 러셀의 이야기는 놀랍고 신기하지만 무척 진지하고 정상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러셀의 전인생을 몽땅 짐 캐리식의 신경질적이고 과장된 코미디에 맞추어버렸어요. 그의 정체성 고민, 입양아로서의 갈등, 사랑, 범죄와 같은 것들은 모두 코미디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짐 캐리 영화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 나온 결과물은 엄청나게 신경질적입니다. 굳이 웃기지 않아도 될 재료로 웃겨야 하고 적당히 유머스러운 설정도 캐리식으로 과장해야 하니까요. 이 과장이 너무 지나쳐서 영화는 종종 진짜 짐 캐리 영화보다 짐 캐리 영화의 흉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캐리는 진지해지려면 얼마든지 진지해질 수 있는 배우죠. 전 캐리를 주인공으로 더 진지한 영화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러는 게 스티븐 제이 러셀이라는 남자의 진실을 그리는 더 정확한 방법이었다고 믿습니다.
영화는 동성애 소재를 다룰 때 가장 아슬아슬합니다. 영화는 러셀과 모리스의 사랑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화 전체가 허물어질 테니까요. 아마 영화는 러셀이 동성애자라는 걸 놀리거나 비난할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동성애를 그리는 태도는 여전히 위험해보입니다. 늘 소재의 의미를 인식하고 그걸 극단적으로 과장하거나, 반대로 과장하지 않은 척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농담인지 욕설인지 구별할 수 없는 묘한 장면들이 많아요. 짐 캐리의 연기도 마찬가지지고요. 이로 인해 만들어진 영화의 질감은 아주 독특하고 괴상한데, 이건 개성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신경질적인 결과물 안에 진짜 로맨스가 담겨져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가 의도인지 모르겠어요. 이건 스티븐 제이 러셀이라는 자연인의 삶이 그러한 인위적인 과장 속에서도 여전히 울림을 잃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기타등등
아직 미국에서는 개봉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를 다룬 주류 코미디 영화라는 게 핸디캡이었을까요.
**1/2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 DJUNA | 2023.04.01 | 30083 |
공지 |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 엔시블 | 2019.12.31 | 49089 |
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59405 |
125370 | {기사} 신정환 직접만나 들은 '필리핀 잠적 전말' [11] | 입춘대길 | 2010.09.08 | 7583 |
125369 | 그 분의 시신이 발견되었군요. [29] | 스위트블랙 | 2013.07.29 | 7581 |
125368 | 추천하는 한국드라마 [35] | 보이즈런 | 2010.08.19 | 7581 |
125367 | 북방계 미인과 남방계 미인 [8] | 베이글 | 2011.03.31 | 7580 |
125366 | 디아블로 3 북미판, 한글판 차이점 [8] | 남자간호사 | 2012.05.17 | 7577 |
125365 | 직장내에서 도시락 못먹게 하는건 충분히 이해할수 있지 않나요? [38] | 아카싱 | 2013.04.18 | 7576 |
125364 | [아래 글에 이어] 마른 남자 사진 조공합니다.ㅋㅋㅋ [22] | 카레여왕 | 2012.09.30 | 7572 |
125363 | 조영남 연애관 [34] | 가끔영화 | 2010.09.02 | 7567 |
125362 | 레이첼 맥아담스 레전드 사진 모음 [11] | magnolia | 2010.06.16 | 7565 |
125361 | 지금 jtbc 9시뉴스 특종이네요 [22] | 이게무슨 | 2014.04.21 | 7557 |
125360 | 고은태? [24] | 자본주의의돼지 | 2013.03.21 | 7557 |
125359 | 한국을 잘 모르는 알랭 드 보통 [54] | 김전일 | 2015.01.23 | 7555 |
125358 | 카페인 이야기가 나와서 (참고로 더치 커피) [9] | 늦달 | 2010.08.22 | 7554 |
125357 | 나얼- 한혜진 결별 [22] | 자본주의의돼지 | 2012.12.21 | 7553 |
125356 | 계단오르기 운동하고 있는데요... 종아리 근육 많이 생길까요...? [8] | ㅠㅠ | 2012.09.17 | 7552 |
125355 | 원더걸스 선예, 결혼하네요. [27] | 자본주의의돼지 | 2012.11.27 | 7552 |
125354 | 지인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35] | LH | 2012.10.22 | 7551 |
125353 | sbs 연기대상 [3] | 감동 | 2011.12.31 | 7550 |
125352 | 콩나물국밥vs베트남쌀국수, 뭐가 해장에 더 좋나요? [27] | 나미 | 2010.09.16 | 7550 |
125351 | 설리, 윤아, 크리스탈, 고아라 [14] | 아리마 | 2010.11.06 | 75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