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8 10:57
- 1993년 영화입니다. 근데 전 '동사서독'보다 늦게 봤고 이번에 다시 본 거죠. 런닝타임은 1시간 42분. 장르는 코미디구요. 스포일러... 따위 아무 의미 없습니다. ㅋㅋㅋ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이라는 광고 카피가 이제와서 보면 복선(?)이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ㅋㅋ)
- "금륜국의 여왕이 사촌 서독과 사랑에 빠져 국왕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안 위공주는 서독과의 결투에서 패배하고 구공진인의 도움을 받기위해 구공산에 간다. 구공진인은 단령산의 구음진경을 찾아 새로운 공력을 익혀야 한다고 한다.
위공주는 단령산으로 동사와 함께 가게되는데 묵고 있던 여관에 대메와 주백통 그리고 거지 왕초를 만나게 되고 거지 왕초와 싸움에서 부성당미 서독의 계략으로 동사가 떠나게 되지만 신인이 된 남제와 동사의 도움으로 서독을 패배시키는데..."
(하지만 모름지기 포스터는 정직하게 뽑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듀게 뻘글 인생 처음으로 포털의 영화 정보 시놉시스를 복붙해봤습니다. 스토리를 설명할 의욕을 못 느껴서요. 사실 스토리를 요약할 수가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스토리가 있긴 한데 되게 흐릿하구요. 또 스토리 자체보다 그걸 핑계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개그 퍼레이드가 핵심인 영화라서 다 보고 나면 스토리가 잘 기억이 안 나요. 여기서 뭘 하고 저기서 뭘 했던 건 기억이 나지만 그 인과 관계가 잘 안 떠오르는 거죠. 애초에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질 않으니까. 그런데... 붙여 놓고 나서 보니 이거 엔딩까지 다 적어놨네요? ㅋㅋㅋㅋ 근데 왜 뒤에 뭐가 더 있는 것처럼 "...는데..." 라고 적어 놓았을까요. 허허.
(원래 찍자고 했던 영화와는 뭔가 조금 다른 느낌!!!)
- 사실 영화 자체보다 영화의 기원담이 더 유명한 경우이기도 하죠. 다들 아시는 얘기니까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티스트병 폭발하던 왕가위가 '동사서독'을 찍으면서 시간을 너무 지체하자 배우들이 불안해하고 때려 치우고 싶어해서, 그거 달래려고 막간을 이용해서 속성 날림으로 찍은 영화. 대략 이쯤 되겠습니다. 당연히 대본도 마구 써갈긴 막장퀄 대본이고 제작비도 아껴야 하니 비주얼도 싸구려구요. 도무지 원래 '동사서독'의 스탭들이 달라 붙어 만든 영화라곤 상상할 수 없는 괴이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동사서독'과 이 영화를 비교한다면 '원피스'와 '와피스' 정도의 간극이 존재한달까요. 어느 쪽을 더 좋아하든 그건 그 사람 맘이겠지만, 일단 완성도는 그러합니다.
(왕조현이 예정대로 '동사서독'에 출연했다면 배우 커리어에 더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었을까요. 알쏭달쏭.)
- 다만 그런 날림 완성도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게 만드는 요소가 있으니 그거슨 영화의 장르입니다. 코미디구요. 그것도 8090년대 홍콩 코미디의 안 좋은 쪽으로의 전형을 보여주는 유치뽕짝 막장 폭주 저질(!) 코미디에요. 좀 심하게 말하면 20세기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신입생들에게 두어시간 준비 시간 주고 선배들 앞에서 꽁트 해보라고 시켰을 때, 브레인 스토밍으로 마구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을 여과 없이 걍 그대로 영상화한 수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습니다. ㅋㅋ
하지만 어쨌거나 각본을 쓰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아마추어가 아니구요. 진짜로 위에서 말한 저런 수준까진 아니죠. 유치뽕짝인 건 애초에 의도니까 그러려니... 해주면 진짜로 상당히 웃기는 장면들도 꽤 있고. 아이디어만 생각하면 아마추어 수준으로 썰렁한 장면들도 노련한 배우들의 몸바친 열연으로 상당히 많이 살려냅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기대치를 유치뽕짝 저질 코미디로 잡는다면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영화에요.
(양조위 하면 역시 눈빛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이 영화에는 직접 '눈빛 연기 시범'을 보이는 장면도 나와요. 그렇긴 한데...)
- 다만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라떼 공력이 필요합니다.
일단 그 시절 홍콩 코미디 특유의 유치뽕짝에 대한 경험치가 있어서 거기에서 일종의 정겨움 같은 걸 느낄 수 있어야 즐겁구요. 또 당연히 21세기 기준으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지뢰들이 겹겹이 꽃을 피우고 있는 개그 소재들을 '그땐 그랬지'라고 웃어 넘길 수 있어야 하죠. 특히 동성애 소재 개그 같은 것들은 참... 하하;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배우들에 대한 추억이 없이는 즐기기 쉽지 않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우리 분위기 쩌는 미장년 양조위 선생이 괴상망측한 분장을 하고 몸개그 하는 모습이라든가, 많은 분들에게 아련한 미청년으로 남은 장국영의 격렬하게 망가지는 코믹 연기라든가... 이렇게 하나씩 언급하기 힘들 정도의 호화 캐스팅이잖아요. 여기에다가 양가휘, 장학우, 장만옥, 임청하, 왕조현, 유가령이 추가되는데 이런 홍콩 배우 올스타에 가까운 배우들이 우루루 몰려나와서 뽀샤쉬하게 젊은 얼굴로 개콘 인기 없는 코너 개그맨들 같은 연기를 하는 풍경이라니.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얼척 없이 웃깁니다. 런닝 타임 내내 그래요. ㅋㅋ 다만 그렇기 때문에 이 배우들의 당시 인기와 위치 같은 걸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의 재미는 반의 반의 반감되겠죠. 적어도 2022년 현재에는 그 시절 겪어본 사람들만을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이 양반들이 다 뭐하는 사람들이고 당시 어떤 이미지, 어떤 위치였는지를 모르면 재미있게 보기 힘들 겁니다)
- 아. 한 가지 참 기대도 안 했는데 꽤 멀쩡한 구석이 있긴 있네요. 액션 연출은 수준급입니다. 그 자체로도 절대 저퀄은 아니고,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와 대비를 이루어서 더더욱 훌륭해 보이는 게 이 영화 속 무술 액션이에요. ㅋㅋ 크레딧을 보니 홍금보가 액션 연출을 맡았던데. 그 시절 홍콩 영화답게 천천히 연기한 후 빨리 감기로 고난이도인 척하는 게 무척 티가 나긴 하지만 어쨌거나 결과물은 꽤 괜찮습니다.
그리고 김용 선생 소설들 팬이라면, 그리고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면 별 거 아닌 장면에서도 피식거리며 많이 웃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해요. 원작에서 강하고 멋진 무공으로 묘사되던 것들이 우루루 몰려 나와서 역시 개그 소재가 되긴 합니다만. 뭐 원작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추억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진짜 아무 것도 아닌 장면에서도 웃음이.
(짱 센 무공 시전 중!!!)
- 더 길게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 시절 홍콩 영화들 중에서도 좀 완성도 포기하고 막 나가던 개그 영화들의 전형 같은 작품입니다. 거기에 쓸 데 없이 화려한 캐스트와 불필요하게 유명한 원작이 어우러져서 괴작의 재미를 물씬 풍기는 영화구요. 동시에 지금 시점에선 참 추억팔이의 힘이 강력한 영화이기도 하네요.
말하자면 '오션즈' 시리즈의 배우들이 짜잔~ 하고 나오는 '무서운 영화'가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좀 비슷하려나요. 세상에 이런 영화가 꼭 있을 필요는 없는데요.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따져본다면 크게 의미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존재 가치는 충분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 시절 홍콩 영화, 그리고 그 배우들에게 추억이 있는 분들만 보세요. 요즘 시대에 안 맞는 유치뽕짝 안 PC한 개그 퍼레이드는 각오하시구요. ㅋㅋㅋ
저야 뭐 라떼人의 한 사람으로서 그냥 재밌게 봤습니다.
(그래도 배우들은 즐거워 보이니 다행인 걸로. ㅋㅋㅋ)
+ '열혈남아'도 찍고 '아비정전'까지 나온 다음에 이런 영화를 찍었던 장만옥은 황당했을까요 즐거웠을까요.
++ 여장, 동성애를 굉장히 적극적으로 웃음거리로 삼는 영화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그 시절 답다 싶었던 건
남자 좋아하는 남자 캐릭터를 만들어 놓고 배우는 유가령(!)에게 시켜 버린 거네요.
전 당연히 나중에 노출 장면 같은 거 넣어서 '알고 보니 여자'를 시전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그냥 남자인 걸로 밀고 나가서 당황했습니다. ㅋㅋㅋ
2022.04.08 13:09
2022.04.08 13:27
이제와서 이 영화에 가치를 매긴다면 아무래도 사료로서의 가치가 가장 크겠죠. 왕가위와 동사서독 제작에 얽힌 비화, 올스타급 출연진, 그 시절 홍콩 영화들의 단순무식 스타일 등등. 반면에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철저히 무의미하겠구요. ㅋㅋ 그 시절엔 그냥 어쩌다 튀어 나온 쓰레기(...) 영화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지금 와서 보면 또 나름 이런저런 의미는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 게 재밌기도 해요.
배우들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걍 화면에 비치는 모습만으로는 되게 즐겁게 찍지 않았을까 싶어서 좋았습니다. ㅋㅋ 세상 떠난 장국영도, 이제 은퇴했거나 거의 그 비슷한 상태인 배우들도, 아직도 쌩쌩 잘 나가는 양조위도 그냥 모두 다 젊고 귀엽고 활기차고 즐거워 보여서 좋았어요.
2022.04.08 13:44
2022.04.08 14:51
ㅋㅋㅋ 맞아요. 뭐 정색하고 따져보면 주성치 영화라기엔 출연진이 과도하게 화려하긴 한데, 보다보면 딱 떠오르는 게 주성치 영화죠.
2022.04.08 21:26
2022.04.08 23:16
맞아요.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이 '시대를 뛰어 넘은 걸작'이라고 부르는 영화들 중 상당수는 사실 못 뛰어 넘었는데 라떼 마인드로 사랑하는(...)
좀 다른 얘기지만 옛날 오락 영화와 요즘 오락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전개 속도와 개연성 같아요. 옛날 영화들은 참으로 느긋하고, 또 착한 편 - 나쁜 편 가르고 나면 개연성도 그 안에서만 대충 돌아가던 게 대부분이더라구요. 재밌게 보냐 아니냐와 별개로 요즘 영화들처럼 타이트한 작품들이 드물어요. ㅋㅋ
2022.04.09 03:49
2022.04.09 13:39
네 촬영 비화(?)에 대해선 저도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사실이라기엔 너무 황당한 사연인데, 그래서 그런지 일요일 오전의 벗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뤄진 적 있다고 하더라구요. ㅋㅋㅋ
개인적으론 그 시절보다 지금 다시 보면서 더 즐거웠어요. 처음 볼 땐 제가 시네필 워너비병에 걸려 중2병스럽게 영화를 보던 시절이기도 했고, 또 세월이 흐른 뒤에 보니 보는 내내 저 화려한 배우들의 이후 행적과 현상태를 떠올리며 아련한 기분이 들어서 더 그랬네요.
2022.04.09 08:36
2022.04.09 13:40
그런데 말씀하신 저 양조위 스틸컷이 이 영화의 매력이자 핵심이죠. ㅋㅋㅋ
언젠가 Sonny님도 보신다면 아마 영화 자체보단 배우들 때문에 좀 아련한 기분으로 보시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22.04.09 14:09
2022.04.09 10:17
라떼 감성 하니.. 주성치 영화를 별로 본 적이 없는 집친구한테 추억을 떠올리며 신나서 같이 보자고 했는데 10분쯤 보다가 제가 부끄러워져서 껐습니다. 저랑 친했던 친구들이 주성치 팬이어서 전도당했었거든요. 그때처럼 같이 웃으면서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아.. 세월이여...
2022.04.09 13:42
사람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곱게 늙는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이 듭니다. ㅋㅋㅋㅋ
특히 '추억의 영화'는 같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끼리 보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고 현명한 것 같아요. 아마 똑같이 주성치 좋아했던 친구를 옆에 앉혀 두고 보셨으면 최소한 완주는 하셨을 텐데요... 하하.
2022.04.10 07:48
2022.04.10 14:35
시작부터 끝까지 내내 그냥 정신도 맥락도 없어서 나중엔 그냥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ㅋㅋㅋ
언젠가 꼭 보시길!
내가 뭘 본거지? 싶었는데 세월이 좀 지나고 제작비화를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거리게 됐던 그 영화네요.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사실 비평이라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보다가 항마력이 딸리면 꺼버리던가 아님 즐기던가겠죠 ㅋㅋ
배우들이 일단 하기 싫은데 억지로 제작자들에게 끌려서 한 느낌은 아니고 나름대로 스트레스 다 발산한 것 같아서 그건 다행(?)입니다. 사실 당시 홍콩영화계도 스타배우들 공장장처럼 돌리다보니 은근히 유치한 영화도 각자 나오고 그랬던 걸로 아는데 이렇게 지금 할리우드로 따지면 어벤져스급이 한 작품에 다 모여서 이런 식으로 찍은 건 거의 유일해서 희귀성이 대단한 작품이네요.
제가 저번에 장국영 글에 댓글달 때 양조위 코가 부어오른 분장이라고 썼던 것 같은데 지금 사진을 보니 코만 빼고 나머지였군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