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30 22:31
윌 스미스가 본인의 행동에 공식적인 사과를 하면서 (사과의 수신인에 크리스 락까지 포함시키며) 해당 논란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윌 스미스가 "사람을 때린 건" 잘못된 일이며 폭력적 응징이 어떤 사태에 대한 모범적 답안이 아니라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선 많은 사람들이 윌 스미스를 지지하긴 했지만 미국 내 여론은 윌 스미스에게 굉장히 좋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도 해당 사건을 실시간으로 반응하면서 윌 스미스에게 감정적 동조를 보이긴 했지만 좀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니 윌 스미스의 폭력이 크리스 락의 농담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좀 위험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외국인들보다 자국민들이 로컬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성은 분명히 또 다른 게 있겠지요. 한국의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같은 곳에서 50대 이상의 남자 배우가 동년배 코메디언에게 주먹질을 했다면 그게 어떻게 보였을지 생각을 해보니 윌 스미스의 행동이 굉장히 반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50대 남자배우는 이병헌, 코메디언은 김구라로 해서 상상을 해보니 뭔가 저희만의 로컬한 분위기가 또 적용되면서 부정확한 감상이 이어지더군요)
저는 윌 스미스가 나빴다고 해당 사건을 결론짓는 대신, 윌 스미스는 나쁘다는 전제 하에 다른 이야기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건을 두고 제가 가장 먼저 심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반응은 '그래도 이성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입니다. 아마 이런 반응을 여러 시위나 집회를 비하하는 그런 반응들에서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전장연 시위를 두고 그런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게시판지기인 듀나님께서는 윌 스미스는 남성이자 헐리웃 슈퍼스타로서 굳이 공개적으로 누군가의 뺨을 때리지 않아도 다른 대처가 가능하다고 지적하셨고 저 또한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사전에 있었던 폭력에 대해 끝까지 이성적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좀 불편하긴 합니다. 만약 모욕, 언어적 폭력이 질서의 범주 안에 있다면 그 질서를 지키며 끝까지 이성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어쩌면 제가 개인적으로 저런 모욕적 언사들에 조금 지쳐서 그런 건지도 모르죠.
이번 사건에서 마초적 폭력만을 쟁점으로 둘 수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약자에 대한 언어적 폭력과 그에 대한 이성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죠. 윌 스미스의 폭력은 당연히 잘못되었으나, 왜 그가 그렇게까지 격앙됐는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 락은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을 두고 지아이제인 조크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삭발을 한 이유는 그가 투병 중 탈모가 부작용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크리스 락의 삭발 조크는 병을 앓는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맥락이 있습니다. 아픈 사람의 신체적 변화를 놀림거리로 삼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 누구도 암이 아니더라도 어떤 병 때문에 삭발한 사람을 두고 머리 빠졌다면서 낄낄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존엄을 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은 그가 겪는 가장 치명적인 고통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크리스 락은 이 부분에서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더욱이 그가 평상시 흑인인권이라는 정치적 소재를 두고 풍자개그를 주로 선보였던 코메디언입니다. 약자로서의 자신을 강조하는 코메디를 하면서도 타인의 약자성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크리스 락의 농담은 모순적입니다.
이런 발언들에 대해 과연 쿨하게 웃고 넘어가야하는지, 아니면 '그건 몹시 나빴다'고 사후대응만 해야하는지 좀 의문이 있습니다. 무대 위의 크리스 락에게만 발언권이 있는 상황 자체가 이미 공정하지 못한 상황이 아닐까요. 그 상황에서 다들 참고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크리스 락의 발언은 일단 농담으로 소비가 되고, 수많은 군중이 그 농담에 합류해 같이 웃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청자들이 그 농담에 합류합니다. 실시간 모욕이 한바탕 지나간 후에야 인터뷰로 저항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이미 누군가 일방적인 피해를 입은 상황입니다. 모욕의 권리만 있고 저항의 권리가 없는 이 오스카 시상식에서, 사후반응을 했어야 한다는 의견은 어찌됐든 그 모욕을 모조리 겪으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윌 스미스의 주먹질은 굉장히 반사회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는 그러면 안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즉각적인 난입은 크리스 락의 모욕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모욕에 모두가 합류해서 낄낄대는 분위기를 곧바로 덮어버렸죠. 웃으면 안되는 말에 모두가 웃지 못하게 하는 선언적 효과가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 제3자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크리스 락의 마이크를 빼앗아서 내 아내를 모욕한 것에 당장 사과하라고 화만 냈어도 결과는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도 사후약방문이죠. 누군들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정확한 대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윌 스미스는 오죽했겠습니까.
폭력은 나빴지만 모욕은 중지되었다, 저는 그 상황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 모욕을 중지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자들을 생각합니다. 이 사건은 단지 윌 스미스와 크리스 락 두 사람만의 다툼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양인 비하로 실패한 전적이 있는 크리스 락을 굳이 또 호출해서, 그에게만 일방적인 발언권을 준 주최측의 책임 또한 아주 큽니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와 윌 스미스 부부는 크리스 락하고만 싸운 게 아니라 그런 모욕에 공식적인 권력을 준 아카데미 주최자들의 권력과도 부딪히고 있었다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어떤 폭력도 불허한다며 윌 스미스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트윗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당한 모욕은 무엇인지, 그 모욕을 마련한 주최측으로서 어떤 미안함을 느끼는지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윌 스미스는 약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모욕하는 걸 농담으로 즐기고 있는 그 상황에서, 그가 여전한 강자이며 움츠리지 않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모욕을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어떤 항의수단도 주어져있지 않다는 점에서, 모욕을 준비한 쪽이 '상을 수여하는' 권력자라는 측점에서 스미스 부부가 얼마나 침착하게 반응했어야하는지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의 어설프고 비격식적인 반응은 단지 개인의 품성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구도가 저항의 방식을 투박하게 만드는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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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의 권력이 잘못 행사될 때, 어떻게 저항해야할까요. 윌 스미스가 정확한 저항을 하는데 부분적으로 실패하면서, 이 문제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추가로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왜 당사자인 제이다는 무대 위로 올라가지 못했을까. 아마 어떤 모욕은 당사자들을 아예 움츠러들게 만들기 때문이고, 어렸을 때부터 감히 그런 반항을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 때는 대리자가 나설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아직도 아카데미는 사과하지 않았고 크리스 락 또한 조용합니다. 그리고 윌 스미스가 크리스 락을 때리는 그 장면은 이제 짤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크리스 락에게도 개운한 장면은 아닐 것입니다.
2022.03.30 22:49
2022.03.30 22:57
뒤집어 말하면 비열한 농담을 아카데미가 하고 모든 참석자들이 낄낄대며 소비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정확한 대응을 스미스 부부가 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트위터 누군가는 윌 스미스의 사과문을 '거기서 내 아내의 병을 놀리는데 함께 웃었던 놈들'이라며 뜨끔하게 만든다고 읽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게, 누군가의 비열한 농담에 얼마나 빠르게 대응하느냐가 그 농담의 권력을 잃게 하는 거라고 봅니다. 누가 헛소리를 했을 때 곧바로 개소리 하지마, 라고 말하는 것과 한참 있다가 아까 그런 개소리를 하면 안됐어, 라고 말하는 것에는 그 발화자를 움찔하게 만드는데 굉장한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의 동조를 받고 지나가버린 상황일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윌 스미스의 무대 난입이 즉각적이었던 건 크리스 락의 농담이 얼마나 저열했는지 상기시키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볼만하다는 거죠.
물론 윌 스미스의 손찌검은 그런 의의를 많이 퇴색시키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2022.03.30 23:16
2022.03.30 23:58
윌 스미스의 인격으로만 이야기를 끝맺지 말자고 하는 게 제가 쓴 글이죠. 그 부분만 보신다면 할 수 없습니다만
2022.03.30 22:57
굳이 사실 관계 확인차 얘길 덧붙인다면
제이다는 암투병 중이 아니라고 합니다. 흑인들(또는 흑인여성?)에서 자주(얼마나 자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타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원형탈모가 와서 민 거라고 해요.
그게 큰 맥락을 바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실관계는 그렇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크리스 락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냥 머리 깎은 것만 보고 던진 얘기라고 본인은 말하던데
다른 얘기로는 크리스 락이 이미 흑인여성들에게 자주 있는 이 질환에 대한 다큐에 관련되어 있어서 모양새가 별로라는 얘기도 있고요.
뭣보다 윌 스미스가 때린 순간 이야기가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농담에 어느 정도 선을 그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물건너 갔죠.
(사실 관계 확인이라고 써놨지만 저도 뭐 결국 한국어로 쓰인 정보들을 본 거고 직접 그들에게 확인한; 얘기는 아니니까 혹시 잘못된 정보라면 누구든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2022.03.30 23:56
제이다가 암투병을 한 건 알고 있는데 그가 암투병을 한 것처럼 써버렸네요. 비유의 의미로 썼는데...
글 수정해야겠습니다.
2022.03.30 23:45
본문 내용과 관련되진 않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사건이 터지고 난 후 혼자 추상적으로 생각해봤어요.
언어폭력과 물리적 폭력 구분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러한 구분 자체가 "진짜 폭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닌 것을 주변화하지 않을까? 혹은 폭력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공통된 성질은 모욕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만약 모욕감이 폭력의 본질이라면 그때는 모욕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먼 훗날 회상했을때 스스로 폭력이라고 자각한다면 폭력이 되는 것일까요? >> 게을러서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생각을 더 이어가진 못했어요.
본문으로 돌아가면, 저도 듀나님이 말한 것 처럼 윌 스미스의 폭력은 그가 폭력 행사를 할 수 있던 위치였기 때문에(예를 들어 크리스 록보다 덜 유명하다거나 여성, 장애인 등이 었다면 더더욱 폭력 행위는 선택지에 없었을 것이므로) 크리스 록의 모욕-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으로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모욕에 대해서 어떻게 즉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드네요.
2022.03.30 23:59
분노와 품위는 같이 갈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도 좀 고민하게 됩니다.
2022.03.31 00:42
이 사건에서 가장 흥미롭고 기괴한건 모욕당한 당사자의 반응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점이죠. 마치 발언권이 없는 부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남편이 결투신청을 하는 중세시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거든요. 제이다 핀켓은 영어가 불가능하지도, 인터뷰 하나 못할만큼 유명세가 부족하지도 않을텐데 말입니다.
2022.03.31 00:55
이번 아카데미에서 외면 당한 라스트 듀얼이 이렇게 오마주(?) 되나요 ㅎ
그리고 때린 행동도 사후대응이지 예방이 아닙니다. 이미 농담은 던져졌고 누군가는 실컷 웃고 난 다음이었죠. 그리고 이렇게 결말이 났는데 아카데미가, 크리스 락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할까요.
차라리 수상소감에서 한 마디 했다면 더 울림이 컸으리라 봅니다.
결과적으로 윌 스미스가 단상으로 나가 폭력으로 응징한 순간에 이건 약자에 대한 농담을 중단하라가 아니라 내 가족을 건드리면 힘숨찐 강자인 내가 응징하는 사이다 서사로 되어버렸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