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가 된 주인공의 목표는 지상을 떠나 더 깊이, 더 오래 잠수하는 것입니다. 그는 친구와의 우정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이제 그녀가 아이를 낳고 가정을 가질 수 있게됩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이 돌고래와의 우정만도 못한것이라 생각하고, 바다로 뛰어들고 한없이 빠져듭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염세적 비관주의입니다" - 정성일, 1993년 정은임의 영화음악

사람이 결핍에 대처하는 데에는 크게 두가지 반응이 있다고 봅니다. 하난 그 결핍의 근원을 컴플렉스로 만들던 지상목표로 만들던 내연기관처럼 끊임없이 폭발시켜 일생에 걸쳐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결핍으로 상실된 부분을 다른 무언가로 집어넣어 메꾸려는 겁니다. 사람들은 때에 따라서 다른 반응들을 보이는데 그랑블루의 주인공 자크는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던 유년의 상처를 끊임없이 다시 바다로써 메꾸려합니다. 그건 집착이나 편집증이란 단어론 설명되지 않는, 기갈이란 단어와 비슷합니다. 자크에게 바다는 기갈입니다. 

 엔조는 타고난 잠수부입니다. 그의 실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고, 심지어 다이빙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엔조에게 다이빙은 격렬한 투쟁의 장소입니다. 꼬맹이시절 동네에서 패거리들을 이끌고 항구바닥에서 동전을 건져올리던 아이가 정말 그대로 큰 모습입니다. 엔조는 잠수를 위해 태어난 인간입니다. 하지만 자크는 조금 다릅니다. 그는 거의 바다에서 잉태된 존재입니다.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잠수부인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고로 죽은건 어떻게 보면 관객에게 붙이는 구구절절한 부가설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환경이 어떠하였던간에,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결국 자크는 바다로 파고들었을것이다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는 그냥 바다 그 자체에요.

 엔조가 잠수를 하는 이유는 결국 바다위에 있습니다. 그는 동생과 어머니와 수많은 애인들을 부양해야하고, 좋은 양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에겐 바다를 통한 투쟁과 승리가 있습니다. 바다속으로 내려가도,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합니다. 지상으로 올라와야만이 그가 잠수하는 이유를 만족시키거든요. 엔조는 얼마나 깊이의 숫자에 집착하였나요. 결국 그는 지상에 발을 붙인 존재입니다. 지상에 발을 붙인 엔조가 보기에 자크는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자크는 바다 깊이 들어갔을때, 다시 올라가야할 이유를 못찾기에 힘들어하는 생물입니다. 그에겐 지상에 남겨둔건 결국 지극히 사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자기 아이마저도. 엔조가 자크를 어릴때부터 의식하며 챙겼던건, 어쩌면 친구에게서 느낀 미지감과 동경때문이었을 겁니다. 엔조가 바다에서 죽을 때, 자크가 그의 곁에서 그를 해저로 밀어내는 장면은 친구를 떠나보내기 보단, 오히려 인어가 마지막까지 바다와 사투한 사내에게 보여주는 환영처럼 보입니다.   

 자크는 자기 아이가 태어나던, 애인이 도망치던, 친구가 죽던 살던간에 결국 바다밑으로 떠났을 겁니다. 그는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입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들도 가끔 보이죠. 그에겐 유년시절의 상처론 설명되지 않는 태생적인 결여가 있습니다. 차라리 그는 그냥 돌고래로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그럼 여러사람 덜 피곤했을겁니다. 결국 지상위에 온갖 하찮은 것들을 뒤로 하고 그는 자기가 원래 있어야 할 '거대한 청색'으로 쏠려갑니다. 저같은 보통의 인간들은 조안나처럼 저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하고 바라볼수 밖에 없어요. 그리스 돌섬과 안데스산맥과 뉴욕을 거쳐 다시 바다로 쏠려내려가는 여정에 썩 공감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헌데 살다보면 가끔 이해못할 아득함과, 존재론적 단독감(고독은 정서적인 말이 들어갔다고 김훈이 그러더군요, 그래서 단독이라 씁니다)이 들때가 있죠. 뱃속에서 무언가 웅컹거리면서, 난 우리엄마 자궁에서 나왔는걸 분명알지만 난 왜 여기서 이렇게 태어나 살고 있는가하는 무력감, 세상 앞에 초라해지며 바짝오그라드는 오금, 거기에 뒤따라오는 무력한만큼 무장해제되며, 속수무책으로 헤집어지는 마음들. 살면서 자주 느낄 수는 없더군요. 썩 좋은건 아니지만, 이 알듯모를듯한 그 울렁거림을 다시 느끼기위해 전 스킨스쿠버와 마라톤을 합니다. 그 불가해한 아득함. 미당 서정주가 이 영화를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존재론적 고독과 원시적 자연미에 대해 서정주의 시만큼이나 뤽 베송의 영화는 잘 뽑아냈습니다. 

그랑블루는 뻥튀겨 만든 나르시즘 염세주의영화입니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나르시즘 염세주의영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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