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의 어떤 장면들

2010.09.10 23:04

Neverland 조회 수:2639

초등학교 독후감스러운 제목입니다만^^; 여하간 어제 저녁에 [마루밑 아리에티]를 보았습니다.

듀나님의 리뷰를 읽고나서, 혹시나 지나치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치를 간신히 끌어내린 뒤(쉽지 않았어요. 지브리 애니메이션인데다가 [마루 밑 바로워즈] 각색물이라니.. 끌어내렸다고는 해도 여전히 상당한 기대치;)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영화 내내 감도는 침울하고 조용한 공기는 느낌이 괜찮았어요. 아니, ' 괜찮다'는 표현은 뭔가 맞지 않는 것 같고 썩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는 더욱...^^

 

미야자키 옹의 감독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것인데, 제가 본 몇몇 일본 애니메이션의 병적인(혹은 데카당스한) 느낌이 희미하게 잡히더라고요.

특히 쇼(인간 남자아이) 가 아리에티와 처음 대면하였을 때, 적막한 풀밭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은 오싹할 정도였습니다.  

이때 쇼의 얼굴은 절반쯤만 보입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눈은 안 보이고 말하는 입만 보이는 것인데, 병약한 십대 소년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타인의 앞날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말을 무덤덤하게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쇼가 나오는 장면들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어요.

아리에티 부녀가 휴지를 가져가려 했을 때, 누워 있다가 '지금까지 다 보고 있었다'는 듯이 갑자기 친절하게 말을 건넬 때도, 아리에티네 집에 각설탕을 놓아주러 왔을 때에도, 인형의 집 부엌을 선물(!)하러 왔을 때에도, 한결같이 '느닷없고' (보는 눈에 따라서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쇼라는 남자아이 이외에도 인간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조금씩 음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할머니도 그리 정감이 가는 사람은 아니고, 가정부로 등장하는 아주머니는 영화에서 노골적인 악당이에요.

사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 아주머니 캐릭터였습니다. 

미야자키 옹 영화의 '악역'들은 그 나름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근작을 돌아보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유바바, 카오나시라든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황야의 마녀 같은 캐릭터들 말입니다.

그런데 [아리에티]의 가정부 아주머니는 그저 탐욕스럽고 소름끼치는 존재라, 호감이 가는 구석이 전혀 없었어요.

영화 전체의 우울한 분위기보다도 영화를 더 우울하게 한 것은 매력이 없는 인간 캐릭터들이었던 것 같아요.

이들을 자본주의라는 절대악의 현현(!)으로 만들어놓고 뭔가 묵직한 메시지를 영화 밑에 깔기 위한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메시지를 위해 [마루 밑 바로워즈]라는 기가 막히게 멋진 원작의 이야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한번 더 보고 싶어요.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339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260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001
119538 오늘 MBC 뉴스데스크 헤드라인들 여럿 대박이군요. [8] 01410 2010.09.10 4392
119537 MC몽도 가야겠어요. [27] 달빛처럼 2010.09.10 5897
119536 세무조사 명품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네요-.- [12] 사과식초 2010.09.10 5282
119535 “여사장과 하루 3번 포옹” 근로조건 내건 회사 [11] 자두맛사탕 2010.09.10 4616
119534 금요일 밤의 영퀴 (끝) [31] magnolia 2010.09.10 2421
119533 김치 어떤종류 좋아하세요? [4] Apfel 2010.09.10 1920
119532 종로4가 곰보냉면, 세운스퀘어로 이전한 후 첫 방문기 [8] 01410 2010.09.10 5675
119531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5] [익명] 2010.09.10 2147
119530 오랜만에 티브이 시청. 최희진과 양동근 [10] r2d2 2010.09.10 3808
119529 다작 했다고 착각이 드는 감독들 [3] 자두맛사탕 2010.09.10 2135
119528 고기 먹고 싶어요.. [7] 메피스토 2010.09.10 2225
119527 슈퍼스타K2 곧 있음 시작합니다~ [12] 서리* 2010.09.10 2857
» [마루 밑 아리에티]의 어떤 장면들 [6] Neverland 2010.09.10 2639
119525 오늘 청춘불패... [41] DJUNA 2010.09.10 2417
119524 이문열의 '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과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에 대해 질문있습니다. [4] 원한의 거리 2010.09.10 2609
119523 나홍진의 '황해' 티져 예고편. [10] 매카트니 2010.09.10 3666
119522 진보신당원이 조선일보 읽는다는 것은.. [8] 스티븐 신갈 2010.09.10 3100
119521 근데 왜 갑자기 곱등이붐인가요. [16] 메피스토 2010.09.11 4439
119520 괴담까진 아니고, 영화 아나타한의 실화 여인네 [7] philtrum 2010.09.11 5417
119519 누가 그러던데 FLAMING LIPS의 공연이 그렇게 판타스틱하다면서요? [2] jogger 2010.09.11 199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