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6 21:36
이키루(1952)
30년 근무한 시청 시민과 과장님이 주인공입니다. 저기 영정 사진의 주인공입니다. 위암 선고를 받고 5개월 후에 돌아가셨죠.
러닝타임 2시간 20분 중에 30분 넘는 영화의 뒷부분엔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뻔한 교훈극일 수도 있는데 이런 구성상의 특징이 영화의 교훈성을 복합적으로 깊이 있게 만드는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주제면에서 보자면 주인공이 사라지고 나서 영화의 사분의 일 정도 분량이 주인공이 등장한 사분의 삼 분량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앞 부분이 있어야 뒷 부분이 존재하지만 뒷 부분이 이런 형태가 아니라 그저 짧막한 후일담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저그런 영화가 됐을 거 같네요. 솔직히 저는 재미로도 주인공이 없는 위의 사진의 군상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더 나았습니다. 너어무 일본스러움을 희화화한 장면인데 한 명 한 명이 사람이라기 보다 역할극을 맡은 목각 인형 같았어요. 특히 과장급 이상은 다 물러난 후 하급직들이 둘러 앉아 복지부동에서 벗어나 고인의 유지를 잇자며 설왕설래 결의를 하는 부분에서 서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추임새를 하는 장면은 정말 웃기더라고요. 누군가 목 뒤에 끈을 달아 당겼다 늦추었다하듯이 주억거립니다.
술 기운과 순간의 치기로 인간이 변할 수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일까. 게다가 직장 잘려도 아무 타격 없는 30년 근무한 시한부 인생도 아니잖아요? 몇 달 후에 죽을 것이면 몰라도 계속 살아야 한다면 죽은 듯이 살아야 살 수 있는 게 대부분의 사람들 형편이죠. 이렇게 쓰다보니 오래 전에 아는 분이 한 말이 생각나네요. 33년 살고 공생활은 3년만 한다는 걸 안다면 나도 예수처럼 살 자신이 있다, 이런 비슷한 말이었어요. 불꽃처럼 산다는 건 순간을 살겠다는 것이고 실제 산다는 것은 지루하며 끈질긴 관성의 집합이라고 봐야겠지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다른 영화는 '요짐보'만 봤습니다. '이키루'가 좋은 영화인 건 알겠지만 저는 그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아니었어요. 너무 교훈적이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가의 작품은 기대를 많이 하게 되니 그런 점도 있을 것이고요.
아래는 추측이지만 1910년 생이니 이 영화를 만들 즈음의 감독님이 아닐까 싶어 가져왔습니다.
2022.02.27 11:30
2022.02.27 12:43
그러시군요. 개인의 중요한 체험과 연결되면서 각별한 영화가 되기도 하는데 제 경우엔 자꾸 잊어버리는 거 같아요 ㅎ
2022.02.27 14:20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걸 본지 20년쯤 (아마 조금 더?) 되어서 사실 기억이 안 나요. ㅋㅋㅋ 그래도 이 글을 읽으니 그 어색 뻘쭘하기 그지 없던 '결의' 장면이랑 그 분위기가 떠올라서 웃음이. 아무래도 지금 현재 제 나이의 절반쯤 되던 시절에 본 것이니 지금 보면 소감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그래서 본지 오래된 영화들, 특히 감명 깊게 본 영화들은 한 번 다시 봐야하나... 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랬다가 좋은 기억 망가져서 지금 나에게 좋을 게 뭐가 있나. 싶어서 참고 있어요. ㅋㅋ
글 잘 읽었어요. 아키라 아저씨 젊은 시절 사진은 별로 본 적이 없어서 볼 때마다 새롭네요.
2022.02.27 20:37
저는 다시 봤던 경험 중에 그땐 이런 분위기 좋아했구나, 이젠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 벗어나는 기분도 그리 나쁘진 않았습니다. 변화랄지 영화 보는 눈이랄지가 느껴져선지요.
좋은 기억 박살 날까봐 다시 안 보는 영화도 물론 있지만요.ㅎ
좀 다른 얘긴데 사실 한 번만 보면 인상은 남지만 제대로 이해가 안 되는 영화가 많아서 다시 보기를 하는데는 요즘 집에서 보는 환경이 좋은 것 같아요. 극장엔 아무래도 같은 영화 여러 번 보러 가는 건 아주 특별한 영화 아니면 힘드니까요.
2022.03.02 00:57
2022.03.02 09:44
상세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촬영기법이나 소리의 사용 등을 내용과 연결지어 세밀하게 분석하신 애정이 담긴 글이네요.
(저하고 결은 다르지만 예수를 언급하셔서 놀랐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