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산책 잡담......

2022.02.06 14:48

안유미 조회 수:429


 1.사람들에게 가끔 신림이나 봉천동에 간다고 하면 '네가 봉천동 같은 곳엘 가?'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해요. 그들은 나를 무슨 황태자 쯤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게다가 '신림 같은 곳' '봉천동 같은 곳'이라는 말부터가 이상해요. 나름대로 서울의 한 축인 신림을 무시하는 소리잖아요.


 물론 굳이 비교하면 신림은 서울에서 개발이 끝난 구역보다는 낙후된 곳이긴 해요. 이건 어쩔 수 없죠. 호텔-쇼핑몰-식당가-영화를 풀패키지로 때려박은 랜드마크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곳은 자금과 기술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하이엔드급으로 지어지는 법이고요. 당연히 때깔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2.하지만 신림이라는 곳은 뭐랄까...시골 느낌으로 낙후된 곳은 아니예요. 서울은 서울인데 마치 과거의 서울에 여행온 듯한 기묘한 감각이 살아있는 곳이죠. 공간적으로 낙후되었다기보다 시간상으로 낙후되었다는 느낌이죠.


 어차피 혼자다닐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쇼핑의 수준이나 호텔, 식음료장의 수준이 아니고요.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주로 시간과 발품을 들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강남 사람이나 신림 사람이나 똑같거든요. 매일 미용실에 가고 안가고의 차이, 비싼 피부관리를 받고 안받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신림에도 강남에도 A급은 있어요. 



 3.요즘은 신도시도 다녀봤는데 역시 뭐랄까...때깔도 좋고 구획정리도 깔끔하게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해야할지, 존재의 강도라고 해야할까, 개념의 강도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이 매우 옅고 얇아요. 


 분명히 공실 없이 깔쌈한 프랜차이즈가 많고 길거리는 깔끔하고 다양성 면에서도 제법 가게가 많은 것 같지만 대로변-대로변에서 1블록 뒤-대로변에서 2블록 뒤...이렇게 찬찬히 살펴보면 상권의 규모와 강도면에서 두터움이 느껴지지 않는 거죠. 너무 그럴듯한 가게들만 입점해 있고 그런 그럴듯해 보이는 도금은 대로변에서 벗어나 블록 뒤로 갈수록 벗겨지는 게 느껴져요. 상권이란 건 단기간 내에 그럴듯한 것들을 때려박을 수는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서 두터운 강도와 다양함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은 거죠.



 4.휴.



 5.그렇기 때문에 산책하기에는 어느정도 세월이 쌓여서 규모와 강도가 누적된 곳이 좋아요. 홍대나 신림이나 광화문 같은 곳은 아무리 걷고 걸어도 양파 껍질을 벗기듯이 무언가 새로운 가게, 아주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낸 흔적을 자랑하는 가게 같은 것들이 나오곤 하거든요. 


 그래서 홍대나 신림에 가도 요즘은 대로변은 잘 걷지 않아요. 결국 대로변에는 새로운 가게나 프랜차이즈 같은 것들이 점령하게 되니까요. 진정한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최소한 2~3블록 안...그리고 더욱 더 안으로 들어가면서 최심부에 도달하는 길을 찾아봐야 하는 거죠.



 6.물론 그런 흔적들은 신선하긴 하지만 그건 관찰자인 나에게 해당되는 일이고...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한 곳을 지켜낸 듯한 가게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곤 해요. 누군가의 노동력만이 아닌 누군가의 인생 10년을 고스란히 줘버린 듯한 장소...20년을 줘버린 듯한 장소를 볼 때마다요. 그런 가게들에는 20년어치의 감정, 설움, 보람같은 것들이 누적되어 있겠죠.


 어쨌든 그래요. 요즘은 오래된 가게나 저예산으로 지어진 듯한 가게를 보면 가슴이 뛰곤 해요. 저 뒤에는 어떤사람들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말이죠. 


 

 7.그야 혼자서 하는 산책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문정역이나 마곡역 같은 곳도 나쁘지 않아요. 사람을 만난다면 식당과 카페 2곳...많아봐야 3곳 정도의 가게를 들르고 끝이니까요. 그럴 때는 그냥 깔끔하고 뭘 시켜도 중간이상은 할 것 같은 프랜차이즈에 가서 편하게 만나는 게 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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