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17 18:22
- 1977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100분. 스포일러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결말은 얘기 안 할 게요.
(근데 왜 한국에선 서스'페'리아인 것일까요.)
- 무슨 어린이 영화 삘나는 다정한 아저씨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수지'라는 미국 젊은이가 독일의 명문 발레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비행기 타고 방금 베를린에 도착했대요. 그래서 우리 수지양이 공항을 나서는데 자꾸 그 전설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오며 쓸 데 없이 분위기를 잡네요. 폭우 속에서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정말 현실 세상엔 있을 일이 없어 보이는 과하게 화려한 학교 건물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더니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여자애가 뛰쳐나와 "비밀!! (천둥) 아이리스!!!! (천둥) 돌려!!!! (천둥)" 이러고는 후닥닥 달려가버립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두컴컴한 숲길을 한참 달리길래 곧 죽겠구먼... 했더니 얼레. 엄청난 체력으로 그 폭우 속에 숲을 뚫고 친척 집에 도착 성공. 물론 잠시 후 집으로 찾아온 정체불명의 사람 아닌 것 같은 자객에게 난도질당해 죽습니다만. 그 체력 하난 뤼스펙...
암튼 우리의 수지는 그 날은 학교 진입에 실패하고, 다음 날에야 간신히 들어갑니다만. 뭐 당연히 그 학교가 멀쩡한 곳일 리는 없겠죠. 이후 생략.
(영화가 시작부터 끝까지 예쁨에 집착할 거라는 것과, 주인공은 죽어라 흰 옷만 입을 거라는 예고쯤 되겠습니다.)
- 뭔가 할 말이 되게 많을 것 같은데 또 생각해보면 되게 할 말이 없는 영화입니다. 음...
- 일단 스토리 측면에서 보면 명백하게 '동화풍'을 의도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 어려서 많이 읽었던 유럽 전래 동화들 있잖아요. 예에쁜 삽화와 함께 재미나게 읽지만 대놓고 어둡고 음침하며 잔혹한 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그런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을 1977년의 현실 버전으로 만든 후에 아르젠토가 좋아하는 난도질 살인 장면을 결합하면 대략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싶었습니다. 보니깐 각본을 쓴 건 아르젠토의 당시 여자친구였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런가 평소의 아르젠토표 지알로 무비들과는 톤이 많이 다르더군요.
암튼 이 동화풍이란 게 굉장히 노골적입니다. 주인공을 맡은 배우도 다 큰 어른이지만 (확인해보니 촬영 당시 나이가 이미 28세였는데요) 영화 속에선 많이 쳐줘봐야 하이틴 정도로 보이구요. 가구나 소품, 의상과 스타일링 등을 총동원해서 그것보다 더 어리고 작고 약하게 보이게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해요. 동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당시 한국식 나이로 28세였던 제시카 하퍼님인데요. 아무리 봐도 10대 느낌이)
- 그런 이야기에 비주얼도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대부분 전개되는 그 학교는 물론 도입부에서 조금 나오고 마는 시내의 집들 역시 딱 보는 순간 "현실에 저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라는 느낌이 들게 현란하고 화려하며 참 불편하게 생겨 먹었는데... 그 역시 동화 속에 나오는 마녀의 집들 분위기구요. 그리고 또 그런 환상적인 배경에 계속해서 뻘겋고 퍼런 조명들을 쏘아대고 여기저기 그림자를 깔아대며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요.
마지막에 주인공이 정체를 밝혀내고 대적하는 존재들 역시 그렇습니다. 난도질 연쇄 살인마와는 아주 거리가 먼, 동화 속 악당들의 실사판 느낌. 옷차림도 머리나 화장도 그리고 연기까지도 딱 그런 톤으로 맞춰져 있어요. 그러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정말 예쁩니다. ㅋㅋㅋ 그냥 예쁘고 기괴하게 예쁘고 기분 나쁘게 예쁘고 살짝 싼티 나게 예쁘고... 암튼 예뻐요. 배우들도 예쁘고 셋트도 예쁘고 옷도 예쁘고 스타일링도 예쁘고 다 예쁩니다. 그 와중에 저예산 티를 내느라 셋트들은 자세히 보면 살짝 명품의 짝퉁 삘이 나기도 합니다만. 배우나 의상, 소품들은 그냥 예뻐요. 살짝 '바바렐라' 생각이 나더라구요. 혹시 이 영화에도 유명한 디자이너가 참여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님 그냥 이게 본토 이탈리아 패션 파워!!! 인 것인진 모르겠지만 암튼 예뻤습니다. ㅋㅋ
그냥 한 번 보시죠.
(가운데 블랑쌤 포스를 보면 발레 학교가 아니라 런웨이 모델 회사 얘기일 것 같기도 하구요. '네온 데몬'생각도 좀 나고 그럽니다.)
- 그래서 참 보기 좋고 분위기 독특해서 좋고... 이걸로 엄청 먹어주는 가운데, 스토리 자체는 뭐 좀 그렇습니다. 사실 '뭐 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심각하게 바보 같지만 애시당초 동화풍을 의도한 이야기라는 걸로 쉴드가 쳐지는 거죠. 그래서 그냥 적당히 바보 같은 정도?
그리고 그 동화 쉴드를 인정하고 들여다 봤을 때는, 음. 전 뭐 결말이 너무 약하다는 것만 빼면 대략 납득했어요. 동화풍의 영화일 뿐 정말로 동화가 되길 의도한 물건이 아님은 분명한데, 결말부의 마지막 대결은 정말로 어린이 동화 수준이라 맥이 좀 빠지더라구요. 그보단 좀 더 피칠갑 내지는 성인스럽게 괴이한 분위기였음 더 좋았을 텐데요.
그리고 보면서 아까운 부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주인공과 룸메이트, 그리고 다른 친구 및 선생들과의 관계 같은 것 말이죠.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설정을 잔뜩 깔아 놓고 그걸 또 아주 예쁘게 잘 꾸며 놓고는 그냥 방치해버린 느낌이었는데. 뭐 아르젠토니까 그러려니... 했구요. 그래서 리메이크판에 대해 좀 기대를 하게 되더군요.
(캐릭터, 관계 잘 뽑아 놨으면 좀 써먹지 그러셨습니까 아르젠토 선생.)
- 마지막으로 아르젠토 영화니까, 살인 장면들로 말하자면. 당연히 요즘 기준으로 볼 때 자극은 많이 약합니다. 하지만 첫 번째 희생 장면 같은 경우는 그 70년대 영화스런 호들갑 연출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상적으로 잘 만들었더군요. 막 무섭고 긴장되고 그러는 건 아닌데, 그냥 보기가 좋습니다(?) 그 보기 좋음을 위해 폭우 속 창밖 빨랫줄에 빨래가 파닥거리는 것 같은 무리수를 둬서 가끔 웃기긴 하지만, 어쨌든 보기는 좋았구요.
어쨌거나 21세기 관객 입장에선 호러 효과는 큰 기대 없이 보는 게 좋아요. 이 영화는 그저 분위기와 예쁨으로 승부하는 걸로. ㅋㅋㅋㅋ
(그 호러 장면 역시 붉고 붉어서 붉습니다. 물론 예쁘(?)구요. ㅋㅋㅋ)
-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원래는 예쁨과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인한 공포... 로 유명했던 영화라면 이제는 그냥 예쁨 가득에 기괴함이 좀 남은 정도 영화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정신 나가 폭주하는 예쁨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지금 보기에도 충분히 즐거웠어요.
우주 명작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도 괴상하게 강렬한 개성이 넘치는 영화였고, 전 그런 영활 좋아하니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근데 이런 소개가 뭐 필요하겠습니까. 아직도 이걸 안 본 분이 얼마나 있겠다고. ㅋㅋ 그냥 전 재밌게 봐더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 음악 얘길 안 하면 큰일 나는 영화이기도 하죠.
80~90년대에 유행했던 야매 영화 음악 모음집 테이프나 LP에는 원곡이 아닌 '경음악'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제가 그 버전으로 이 음악을 듣던 사람이라 사람 목소리가 계속해서 깔려 나오는 걸 이제사 알고 깜짝 놀랐네요. ㅋㅋ
물론 이게 '경음악' 버전보다 훨씬 낫구요. 사람 목소리를 이렇게 악기처럼 쓰는 게 재밌네요.
++ 위에서 '세상에 이런 건물이 어딨어 ㅋㅋㅋ' 드립을 쳤습니다만
그렇잖아요. 어떤 놈이 사람 들어가 생활할 건물을 이딴 식으로
지었더라구요. ㅋㅋㅋ
아래 사진이 실제 건물이고, 영화 속 건물은 이걸 본따서 지은 셋트라고 합니다. 붉은색 톤 차이가 크긴 합니다만, 그래도 특이하네요.
+++ 리메이크판 '서스페리아'를 보기 위해 봤습니다. 이제 넷플릭스에 있는 그 영화를 볼 차례인데... 런닝타임 두 시간 반이라니. 호러가. 감독님이 상도덕이 없으시네요. ㅠㅜ
++++ 올레티비 vod로 봤어요. 근데 스탭롤이 다 올라간 후에 한글 자막이 뜨길래 뭐지? 하고 봤더니 이 버전(?)에 대한 설명이더군요. 이게 아르젠토 감독이 좀 더 멋진 색감을 위해 관련 회사에다 당시 흔치 않던 기법을 주문했었고, 그리고 온전한 판본의 필름이 소실 되었고, 그래서 그동안 돌았던 이 영화 관련 비디오든 디비디든 vod든 간에 다 구린 화질에 프레임이 뚝뚝 끊기는 버전이었다. 그런데 2017년에 상태 좋은 게 발견되어서 그걸 바탕으로 고화질로 디지털화, 그리고 당시 색조견표인지 뭔지를 바탕으로 원래 감독이 의도했던 색감을 재현, 마지막으로 끊어지는 프레임은 디지털 프레임 보정 기술로 채워 넣었다고. 그래서 요즘 서비스되는 요 버전이 최종판이자 이전과는 다른 고퀄판이다... 라는 얘기였습니다.
근데 전 그런 건 잘 모르니 그저 '이탈리아 사람들도 한국처럼 원판 필름 잘 보관 안 했구나' 라는 생각만 했네요. ㅋㅋ
2022.01.17 18:42
2022.01.17 19:12
본문에도 적었지만 이 영화 보고 감동 받으며 자란 사람들 중에 한 명이 '네온 데몬' 감독님이 아니신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스토리 따위!! ㅋㅋ
2022.01.17 19:48
2022.01.18 10:25
상징도 좋고 그걸 따져보는 것도 좋은데 '네온 데몬'의 문제는 그걸 따져볼 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거였다고 생각해요. 뭐 사실 취향의 문제겠습니다만. 제게는 그랬어요. ㅋㅋ
2022.01.18 11:40
2022.01.17 19:20
와우,,,
저 며칠 전에 본 영화에요....
바낭을 올릴까 말까 잠깐 생각했는데, 말까가 되었어요.
바낭글을 안쓰길 잘했네요.
제가 글을 못 쓰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이런 영화를 봤다는 것이 부끄러웠는데,
로이베티님이 보셨으니 자존감이 회복되네요....
2022.01.17 19:25
아뇨 이거 전설의 레전드 반열에 오른 고전 호러 무비입니다. 자존감 잃으실 필요 절대로 없으세요!!! 하하.
이걸로 안심(?)이 안 되신다면 썩은 토마토 지수 93%에 빛나는 영화입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2022.01.17 19:20
오래 전에 봐서 기억이 잘 안나요. 별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하도 무섭다고 해서 친구랑 벌벌 떨면서 봤어요.
올려주신 사진은 구찌나 미우미우 화보같네요.
부실한 스토리를 스타일로 메웠다면 리메이크를 만드는 의미가 있을까요? 2시간 반은 진짜 너무 기네요.
2022.01.17 19:27
어려서 무섭다고 본 영화들 중에 지금 봐도 무서운 게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죠. ㅋㅋ 대표적으로 전 국딩 때 '여곡성'을 보다가 무서워서 중간에 도망쳐 버린 경험이 있거든요. 지금 보라고 하면 아마 중간에 잠들어서 끝까지 못 볼 듯...
리메이크판은 아직 안 본 상태라 모르겠지만, 아마도 원작에서 설정만 만들어 놓고 넘겨버린 인물들 이야기를 대폭 디테일 추가해서 전개하지 않을까 싶구요. 또 허황된 동화 같은 분위기도 현실적인 느낌을 많이 넣어서 바꾸지 않을까 싶고... 그렇습니다. 일단 영화를 봐야겠네요. ㅋㅋ
2022.01.18 00:21
기본 설정만 가져와서 완전 제멋대로 만들었습니다. 리메이크가 아니라 리크리에이트라고 불러야할 수준이에요 ㅎㅎ 그리고 원작에서는 독일이 그냥 배경이지만 리메이크에서는 당시 역사적 배경이 나름 중요합니다. 저도 볼 때는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나중에 리뷰들 보고 검색해보고 알았네요.
회원 리뷰란에 Q님이 올리셨던 글이 아직 살아있더라구요. 호러에 워낙 조예가 깊으신 분이니 미리 참고하셔도 좋을듯합니다.
2022.01.18 10:26
다 보고 나서 이 댓글을 봤네요. 확실히 역사적 배경 지식이 일천하니 좀 난감하더라구요. ㅋㅋㅋ Q님 리뷰도 감상 후에 읽어봤는데 공감가는 부분이 많네요. Q님 같은 분이 아직 이 게시판을 안 버리고(최근 글이 반년이 넘긴 했습니다만;) 리뷰 남겨주시는 건 참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22.01.17 19:29
2022.01.17 19:32
신기하죠? 저도 이런 건 처음 봤네요. 쿠키가 나올 영화도 아닌데 마지막에 갑자기 자막이 떠서...
근데 뭐 진짜 심플한 설명이에요. 검은 화면 가득 하얀 글자가 떠 있고, 그걸 한글 자막으로 두 줄씩 끊어서 번역해 보여준 후 끝. 이랬습니다. ㅋㅋ
2022.01.17 20:05
2022.01.18 10:27
맞아요 집요한 대칭구도. ㅋㅋㅋㅋ 천박하고(칭찬입니다? ㅋㅋ) 야한 버전의 웨스 앤더슨 영화 미장센 같단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리메이크까지 다 본 지금 말씀드리자면 저도 원작 편입니다. 모자란 데가 많지만 모자라서 더 매력적인 것 같기도 하구요.
2022.01.17 22:22
영화에 사용된 음향과 음악이 기억에 남아요.
저에게 무서운 영화로 각인된 대표가 이 영화와 엘리자베스 테일러 나온 '나이트 워치' 두 편입니다.
2022.01.18 10:29
음악이 정말 유명했죠. 80년대 영화 OST 모음집 같은 거 보면 굉장히 높은 빈도로 들어 있던 걸로 기억해요.
'나이트 워치'는 못 봤는데 어디서 볼 수 있나 한 번 찾아봐야겠어요!
2022.01.17 22:49
2022.01.17 23:04
그 영화는 아마 <페노미나>인 듯 하네요. 같은 감독이고, 설정에 비슷한 부분이 있죠.
서스페리아 뒷부분에도 나름 흉한 존재가 나오긴 합니다만 '확' 나오는 느낌은 아니고..
2022.01.17 23:22
2022.01.18 10:30
마지막에 흉측한 게 나오긴 하는데 괴물은 아니고... 좀 애매하네요. ㅋㅋ 그래도 그때 보신 게 맞지 않을까요. 어려서 본 영화들을 성인이 된 후에 다시 보면 기억과 완전 다른 경우 흔하잖아요. 자라면서 다른 영화와의 기억이 뒤섞였을 수도 있구요.
2022.01.17 23:39
아르젠토의 '서스피리아'를 즐겁게 봐서 리메이크 작도 즐기려고 했는데
리메이크작은 엄청 진지하고, 시각적 통각적 고통을 자아내서 같이 보러 간 사람이 많이 힘들어해서 난감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르젠토의 deep red와 서스페리아 두 편 다 즐겁게 봤는데,, 숨어서 봐야할 영화(?)라 듀게 리뷰가 더 반가워요.
2022.01.18 10:30
아니 왜 아르젠토 영화가 숨어서 볼 영화가 되었죠. ㅠㅜ 시대가 흘러갔다지만 고전인 것인데요!! 자신감을 가집시다 여러분! 하하.
리메이크판을 즐겁게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