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공장 소녀'를 봤어요.

2022.01.17 21:40

thoma 조회 수:567

성냥 공장 소녀 Tulitikkutehtaan tyttö,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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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입니다.

위 포스터에서 뭔가 실험하고 있는 듯 찍힌 소녀가 주인공 이리스입니다. 이리스는 성냥 공장에서의 단순한 노동이 끝나면 귀가 길에 빵을 사서 엄마는 담배만 계부는 tv만 끼고 사는, 사지멀쩡하고 게으른 부모와 먹을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합니다. 설거지까지 마치면 유일한 낙인 댄스장으로 가서 즐겨보고자 하지만 왜소하고 지쳐 보이는 이리스에게 아무도 춤을 청하지 않아요. 자기 봉급에 손을 대(본인 돈인데 봉투에 돈이 빈다고 계부에게 따귀를 맞네요) 마련한 원색의 옷을 입은 날 어떤 남자와 하루를 보냅니다만 이후의 첫데이트에서 결별당하고 임신을 알게 되네요.....숱하게 많이 본 이야기입니다. 

이리스의 엄마는 딸을 착취하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고 매우 이기적이며 이리스에게는 소통할 친구조차 없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터의 단순 노동과 가사 노동에서 아무 보람도 기쁨도 느낄 수 없고 자기만의 공간도 없어요.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며 한가닥 희망이 짓밟히면 이리스는 완전히 절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끝에 이리스가 하는 행동은 짐승이 구석에 몰렸을 때 자신을 보호하려는 몸짓 같습니다. 

이야기만 보자면 삭막한 환경에서 외로움이라는 병에 시달리다가 절망적 사건으로 끝맺게 되는 젊은 여성이야기, 라는 흔한 영화 같지만 '성냥 공장 소녀'에는 특별한 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영화에 대사가 정말 적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말 이외엔 어지간하면 다들 말이 없어요. 심정을 대사로 드러내는 것은 이리스가 한 번 정도 있었던 것 같고 그 외에 제대로 속을 표현한 것은 편지를 쓰며 독백처리가 되는 장면이 있을 뿐, 주고 받는 대화다운 대화는 없는 영화입니다. 이렇게 말을 안 나누니 서로 눈을 마주치지도 않게 되고 표정이 다양할 일도 없어요. 대부분 배우들이 시종 무뚝뚝한 표정으로 연기를 하고 전체적으로 영화가 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의 메마름으로인해 이리스가 유일하게 뺨을 다 적시며 우는 장면이나 밤늦은 시간 식물원에 혼자 앉아 있는 장면 같은 것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삭막하니 종종 사용되는 유행가인 듯한 노래도 귀에 확 다가 옵니다. 내용의 안타까움과 격렬함을 침묵과 무표정으로 감싼 영화라고나 할까요. 좋은 영화였어요.

유럽 영화 중에 음악 사용 안 하고 조용한 일상이 길게 인물들의 연기만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있는데 보면 또 보게 되지만 시작하기까지 작정하고 봐야하는 부담감이 있지요. 이 영화도 그런 영화와 톤이 비슷하지만 이건 70분 정도의 짧은 길이라 충분히 흥미를 유지하며 볼 수 있었습니다. 

감독의 '르 아브르'를 좋게 본 기억이 있어 왓챠에 있길래 찜해 두었다가 본 영화입니다.   

핀란드는 사우나가 유명하고 무민의 나라인데 이 영화는 그런 따뜻함이나 몽글몽글함은 느낄 수 없네요. 인접한 같은 스칸디나비아국인 스웨덴의 선진국스러움보다 다른 인접국인 러시아의 소도시스러움이 더 많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된 영화긴 합니다만. 변두리 공단 동네라 쇠락한 느낌이 들고 배우들의 외모도 뭔가 러시아인 같은? 모두 가 보진 못했고...소설이나 영화를 통한 이미지일 뿐이죠. 

핀란드 사람들이 행복 지수 조사에서 자국이 선두라는 말을 들으면 '우울한 사람은 이미 자살해서 그런거 아냐?' 라든가 '우리가 말하기 싫어 해서 불행하다는 말을 안 해서 그런거 아냐?' 라고 한다는 농담이 있답니다.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 못지 않게 뚱하고 비사교적이라는 풍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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