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두 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스포일러 있어요.

The Power of the Dog,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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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잡하고 외로운 남자, 필 

자신의 본 모습을 억압한 채 수컷 우두머리로 살아가는 필은 동생 조지의 결혼에 크게 상처 받습니다. 조지는 필의 막말도 묵묵히 받아 주고 그의 우월함을 더 돋보이게 하는 존재고, 두 사람은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그 넓은 집에서 방 하나를 나누어 쓰며 '여자 없는 남자들'로 살아갔으니 말입니다. 자매 역시 오랜 세월 단 둘이 살다가 한 사람이 결혼하면 남자에게 소중한 반쪽을 뺏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더구나 필은 동성애 성향이 있는 것 같고 현실에서 이를 드러내지 않기로 한 것 같고 그러기 위해 더 극단적인 남성성을 장착해 온 것 같은데 이런 정체성을 감추며 외롭게 지탱한 삶에서 그나마 의지하던 동생이 결혼을 통보하며 분리되어 가정을 꾸려버리니 충격이 컸을 것입니다. 이 충격과 분노는 조지의 아내 로즈에게 고스란히 퍼부어집니다. 거칠고 더럽고 힘 센 서부 사나이의 외면에 연약하고 외롭고 복잡한 예일대 고전문학 전공 출신의 내면을 지닌 필. 자신의 이중성에서 오는 혼란이 동생의 결혼을 계기로, 그 아내인 로즈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식으로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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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순하고 무서운 남자, 피터

로즈의 아들 피터는 예쁜 걸 좋아하고 손재주가 좋고 깔끔한 젊은이입니다. 피터의 이런 면모, 그리고 가느다랗고 섬세한 외모는 누가 봐도 여자애 같은 청년이라 놀림을 받기도 하고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피터는 사실 엄마가 요리를 할 때 닭의 목을 꺾는 담당이며 자기 방에서 산 토끼도 즉석 해부해서 들여다 보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는 강심장의 소유자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며 우리는 이 청년에 대해 조금씩 놀라게 되지만 피터가 처음부터 감추려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이 보이는대로 추측한 것일 뿐입니다. 피터는 뭘 가리거나 남들의 눈을 속이며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얼마 살지도 않았고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문제가 되어 좌절한 경험도 별로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생긴대로 단순하게 지내왔어요. 한편 피터의 아버지는 목매달아 죽었고 시신을 본 피터가 그 줄을 잘랐으며, 아버지의 조언을 깊이 가슴에 담고 있는 청년입니다. 아버지의 조언은 '장애물을 없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입니다. 이런 경험이 원래 냉정한 성격의 이 청년을 더욱 냉정하고 단단한 인간이 되게 했을 것 같습니다.


3. '불행을 견디면서 어른이 된다.'란 생각을 품고(그놈의 브롱코 헨리) 견디고 살아온 필과 '장애물은 제거한다.'는 생각을 하는 피터 중 누가 사악한 힘인지는 보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악한 개가 이자다, 라고 한 쪽을 지목할 필요도 없을지도요. 필을 허황된 남성성을 두른 서부 사나이로 보고 피터를 새로 등장한 세대의 대표로서 약자를 괴롭히는 마초에 대한 응징자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장애물을 없애 가는 것이 인생' 이라는 생각은 정말 마초적이지 않은가요? 하지만 필처럼 불행을 견디다가 그 부작용으로 타인을 괴롭히게 되는 것도 잔인한 짓이며 비극이겠죠. 저의 경우에는 영화가 끝나자 필이 안타깝고 안 된 마음이 많았습니다. 필의 왜곡된 삶에는 대화의 여지가 남아 있을 것 같은데 피터의 단순함과 냉정함은 그 칼끝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매우 위험해 보이고 타협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필과 피터가 겨루면 필이 패배하는 건 당연한 수순입니다. 필이 밤늦게 귀가한 조지와 대화하다가 로즈를 만나러 다녀왔다는 걸 듣고 컴버배치가 눈동자를 마구 떠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필의 마음 속은 미련과 혼란으로 끓고 있으며 이런 사람은 헛점 투성이일 수밖에 없겠죠. 


4. 이 영화를 보고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에 진심 놀랐습니다. 연극으로 다져진 찐연기자로 잘한다, 잘한다 말은 들어도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선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여기선 팬심이 생길 정도입니다. 저 길쭉한 청년 코디 스밋 맥피 역시 정말 역할에 맞는 좋은 연기였어요. 부부로 나온 부부도 좋았어요. 커스틴 던스트의 출연작 본 중에 가장 혼신의 연기인 것 같고 제시 플레먼스는 도대체 듣고는 있는지 연기 중인 건 맞는지 싶은, 안 하는 듯 잘 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는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 영화인데 '파워 오브 도그'는 참으로 좋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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