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운명의 인연을 믿으시나요?

2012.02.16 09:03

LH 조회 수:4774

 

남녀의 운명을 두고 붉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부터 서로 짝지어질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 사람들끼리 보이지 않는 연결이 있다는 것이다. 뭐 일본에서 유행하는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시작은 중국이다.

그래서 말인데, 옛날 이야기를 하나만 해보자. 당나라 말에 지금의 섬서성인 두릉(杜陵)에서 위고(韋固)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을 잃고 힘들게 살다가 점점 나이를 먹어 장가갈 때가 되었다. 하지만 끝내 인연을 맺지 못하고 여기저기 신부감을 구했지만 하는 족족 뻰찌를 먹었다.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부모를 일찍 잃고, 그러니 당연히 가난했던 탓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당연히 못 생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잘 생겼다면 언급이 있었을테고 없었다 한들, 어느 정도로 얼굴이 받쳐주면 좋다는 여자가 그렇게 한 명도 없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러기를 10년. 그래도 위고는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또다시 인연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원화 2년인 806년, 하북성의 청하(淸河)로 가던 중 송성이란 동네의 남쪽에서 하루 묵게 되었다. 이 때도 주변 사람들을 붙잡고 거하게 자기 팔자를 한탄했던 모양이다. 같이 있던 어떤 사람이 "내가 말이지, 청하군의 사마(司馬) 어르신의 딸을 잘 아는데 소개해줄까?" 라고 소개팅을 제의했다. 위고는 단박에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고- 다음날 아침에 마을 서쪽의 절 문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얼마나 얼마나 장가가 가고 싶었던건지, 위고는 아예 한밤중에 약속장소로 나가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직도 달빛이 휘황찬란한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웬 노인 한 사람이 절의 계단 위에 앉아있었다. 이런 늦은 밤에 나와있는 위고도 위고지만 노인이 있는 것도 이상해서 다가가보니 뭔가 이상한 책을 읽고 있었다. 헌데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글씨였다. 먼 옛날 진나라 때의 글씨 충서(蟲書)도 아니고, 디자인 서체인 팔분서(八分書)도 아니고, 올챙이 대가리를 닮은 기기묘묘한 글씨 과두문자도 아니고, 외국 글자 범어도 아니었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다고 하나, 글공부는 죽어라고 해서 자신이 있던 위고는 도저히 못 알아볼 글씨가 있다니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이게 뭡니까? 전 범어도 읽을 수 있는데 이건 도저히 못 알아볼 글자인데요."

 

그러자 노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답했다.

 

"이건 저 세상의 글씨니까 당연하지."

 

이걸 들으면 유령이다! 하면서 깜짝 놀랄 법도 한데, 위고가 담대했던지 아니면 궁금한 게 더 컸던 모양이다. 아니면 둘 다 너무 심심했던 것일 수도 있다. 노인은 워낙 명토의 관리로 산 사람들을 관장하고 있는데, 어쩌다가 위고와 마주친 것이고 자신이 하는 일을 미주알 고주알 다 이야기해주었다.

 

"내 담당 분야는 남녀의 결혼을 관장하는 거야."

 

이러니 노총각의 귀가 번쩍 뜨일 밖에. 위고는 득달같이 노인을 붙잡고 사정을 말했다. 제가요, 어릴 때 고아였는데요, 장가가고 싶은데요, 10년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녔는데도 안 되었거든요, 그렇게 이야기하곤 지금도 소개팅을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 소개팅 잘 되겠습니까?"

 

기대를 한껏 담아 물어본 위고였지만, 그렇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장가 못 가. 이거 자네 인연 아닐세. 자네 운명의 신붓감은 지금 세 살이니까 열 일곱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위고의 머리 위론 번개가 콰릉 내리쳤을 것이다. 이제까지 10년을 찾아다녔는데 더? 그것도 14년을 더? 게다가 세 살? 이 쯤에서 띠동갑을 두 번은 넘어선 나이 차이에다 범죄의 향기마저 나긴 하지만, 이건 옛날 이야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기자. 그리고 노인은 좀 더 보충 설명을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자루에는 붉은 끈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이걸로 서로 짝이 될 사람들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다. 그럼 이들은 어떻게든 연을 맺게 된다. 서로의 집안이 원수이든, 집이 부자든 가난하든, 신분 차이가 엄청 나든, 이쪽 땅 끝에서 살건 저쪽 땅 끝에서 살건 상관없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자네 발은 이미 그 여자애 발에 묶여있거든. 딴 여자 찾아도 소용없어."
"걔가 누군대요?"
"여기 북쪽에 살고 있는 진(陳)씨 노파의 딸이야."

 

이렇게까지 노인이 힘주어 운명을 말하니, 위고도 점점 토를 달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다. 아니, 그보다는 운명의 신붓감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마음이 커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꼭 필요한 게 있었다. 얼굴 확인이다.

 

"직접 만나볼 수 있습니까?"
"진 노파는 언제나 시장에서 딸을 안고 야채를 팔고 있거든. 내가 보여줄테니 따라오겠나?"

 

그렇게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 어느새 날이 밝았다. 하지만 온다던 소개팅은 소식이 없었다. 약속도 바람을 맞은 김에, 위고는 늙은이를 쭐래쭐래 따라 나섰다. 시장에 가니 굉장히 꾀죄죄한 차림의 한 쪽 눈이 먼 노파가 세 살 쯤 된 여자아이를 안고 야채를 팔고 있었는데, 참 초라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위고가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하고 간절하게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있을 즈음 노인은 그 쪽을 터억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쟤가 자네 신붓감일세."

 

이렇게 처참한 현실 앞에 위고는 화를 버럭 냈다. 이건 인정할 수 없어!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겠다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노인은 실실 쪼갤 뿐이었다.

 

"안 될 걸. 쟤는 복을 타고 났어."

 

그리고는 옛 이야기에서 늘 그러하듯이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위고는 발을 구르면서 한참 노인을 욕했다.

 

"망할 영감탱이! 내가 이래뵈도 훌륭한 가문 출신인데! 좋은 집안의 아가씨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예쁜 기생을 돈 주고 사들여서 본처로 들이던가! 그런데 저런 못나고 꾀죄죄한 노파의 딸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에서 위고가 왜 장가를 가지 못했는지 이유가 대강 짐작이 간다. 눈이 머리 위 30cm 상공에 가서 붙어있었떤 것이다. 만약 그 노파의 딸이 예쁘기라도 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었겠으나... 가난해서 지저분한데다가 고작 3살짜리 아이인데 어떻게 예쁘고 아니고가 구분이 가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위고는 운명조작을 실현하려고 들었다. 하인에게 날카로운 단검을 준 뒤, 시장에서 그 아이를 찔러 죽이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직접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 치사하단 느낌은 있지만, 하인은 시키는 대로 다음 날 야채시장에 가서 노파의 품 안에 안겨있는 여자아이를 찌르고 도망쳐 왔다.

그렇지만 작은 실수가 하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이의 심장을 찔러 단박에 죽일 것이지만, 손이 미끄러져서 미간에 맞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어린아이이고 큰 상처였다. 위고는 일이 잘 처리 된 것으로 믿고, 하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자기 욕심을 위해서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를 해치게 하다니 참 나쁜 놈이다 싶지만, 그 천벌을 받은 탓인지 이후로 14년 간 들어오는 혼담마다 족족 파토가 났고 위고는 계속 노총각인채로 남았다. 그렇지만 장가는 못 갔어도 출세는 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것저것 공을 세운 것이 있었기에, 위고는 그 덕으로 상주(相州)의 참군(參軍) 자리를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성실하고 열심한 사람이었다. 워낙 일을 열심히 하다보니 상관인 자사 왕태가 그를 자기 밑에 두었는데, 이후로도 솜씨가 아주 좋자 마음에 들어하며 혼담을 주선했다.

 

"내 딸이랑 결혼하지 않을래?"

 

왕태의 딸은 꽃 같은 나이 16세인데다,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예뻤다. 당연히 위고는 감사하다고 넙죽 인사하고 혼담을 받아들였으며 - 그리고 이것은 성사가 되었다! 위고는 마침내 기나긴 24년간의 노총각 생활을 청산하고 이쁜 마누라를 두어 행복한 신혼생활을 지냈다. 그런데 행복에 겨워 1년 정도 지났을 때, 위고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눈치챘으니, 아내는 항상 이마 사이에 꽃 모양의 장신구를 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든, 방에 있든 절대로 떼어놓지 않았다.
이걸 들으면 독자들은 대강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고는 - 무엇보다도 양심이 찌릿찌릿하게 캥겨, 혹시 하는 마음에 어째서 꽃을 붙이고 있냐고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아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연을 이야기했다.

 

"사실 저는 자사님의 친딸이 아니어요."

 

그녀의 과거도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다. 워낙 친아버지는 송성의 관리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마저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갓난아기인 그녀 혼자만이 남았는데 가족 하나 없이 남게 된 처지를 딱하게 여긴 유모 진씨는 그녀를 거둬들였고, 유일하게 남은 재산인 밭을 일궈 야채를 가꿔 팔아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 먹고는 살아야 했고, 애를 맡길 데는 없으니 직접 아이를 안고 시장에 나가 야채를 팔았다.

"그런데 시장에서 웬 나쁜 놈이 나타나 제 이마를 칼로 찔러서 큰 흉터가 남았어요."

그러다가 천만 다행으로 그녀의 숙부인 왕태가 자사가 되어 여기에 부임하게 된 것이었고, 조카를 거둬들어 수양딸로 삼은 것이었다. 이후에 위고에게 혼처로 소개해준 것이고. 이렇게 사연을 듣자 위고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 진씨라는 노파, 혹시 한쪽 눈이 안 보이지 않았소?"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러자 위고는 부인에게 자기가 한 짓을 고백했다. 부하를 시켜 장래 부인이 될 여인의 이마에 칼빵을 놓은 그 일을 말이다.
이렇게 되면 남편이 진짜 나쁜 놈이다 싶어 화를 낼 법도 한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들 부부의 사이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서로 죽이려 하고 죽을 뻔한 사이인데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마 양 쪽 다 정해진 운명에 자포자기 한 게 아닐까 한다. 아니면 위고가 정말 바닥에 배 착 깔고 엎어져서 싹싹 빌었다던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 부부는 이후로도 잘 먹고 잘 살았고, 여기에 더해 출세까지 했다는 것이다. 위고는 안문(雁門) 태수가 되고 부인은 태원군 태부인에 봉해져서 떡두꺼비 같은 자식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나중에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자 위고가 노인을 만난 마을은 정혼점(定婚店)이라고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니 자신의 짝을 찾는 이들이여, 결코 서둘지 말지니,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운명이란 게 있다면 억지로 무언가를 하며 안달하지 않아도 언젠가 자신의 짝이 빨간 실을 가지고 와서 "이거 님 꺼여요?" 하고 물어보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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