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예전 형 누나들 시절에는 하루키 소설이 왠지 그럴듯해보이는 취향을 남에게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얘기를 종종 봅니다. 뭐...여대생이 가방 놔두고 상실의 시대를 보란듯이 가슴에 품고 다니는 그런 느낌; 저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요(?!)

 

그런데 이제는 역으로 하루키를 폄하하거나 하루키 애독자를 조롱하는것이 '자신의 고상한 독서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이렇게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별로 듀게 얘기는 아니고... 물론 듀게에서도 그런 경향을 좀 보긴 하지만. 하루키 좋아한다, 하루키 재미있게 읽었다, 하루키 소설 작품성 있다 라고 얘기하면 좀 조소를 받는 느낌? 유행이 바뀌었나보죠 뭐

 

하루키 소설에서 섹스 묘사가 그렇게나 인상적이시던가요? 섹스는 거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작품세계(-_-)를 요약하는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거 같아요. 우리나라에서요(외국은 안가봐서 외국인하고는 이야기한적 없어서 몰라요)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글이 올라온다든지 화제가 되면 100%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하루키 소설속의 섹스묘사'에 대한 이야기는 꼭 나오더라구요.

 

그것이 무척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뭐 이 정도가 가장 흔하고, 아예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하루키의 성적 취향을 추측해보거나 심지어 변태성욕자로 모는 사람도 있고(아주 진지하게 그런 얘길 한다는게 포인트)

 

하지만 저는 항상 의아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섹스가 그렇게 특별했나? 물론 행위가 직접적으로 묘사되니 그것이 성적으로 자극적인 것은 당연한데, 자연적인 생리현상을 일으키는 수준이지 딱히 그것이 다른것을 제쳐두고 뇌리에 깊이 각인될 만큼 인상적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것 같거든요. 장 단편을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한번도요.

 

솔직히 말해 다른 사람들의 평(혹은 악평)처럼 섹스 묘사가 '특별했'으면 전 더 좋았을것 같긴 해요. 아주 솔직하게...... 좋은게 좋은거죠

 

사실 정말로 자극을 주고 엉뚱한 생각(...)을 품게 만드는 정도의 농밀한 관능을 뿜어내는 섹스 묘사는 오히려 한국 작가들에게서 많이 읽었거든요. 장난이 아니에요. 아주 이름이 알려진 유명작가들 말이죠. 하지만 그런 작가들에 대한 비평이나 인터넷에서의 평 코멘트에서 딱히 그런 성적인 부분을 논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어요. 그냥 성애묘사는 그 작품의 줄거리에 녹아든 한 부분일 뿐이라는거죠. 그리고 이게 당연히 맞는거고. 보통은 소설 읽을때 남녀가 교접하는 장면 하나만 딱 떼어놓고 밑줄쳐놓고 복사해놓고 '내일 이걸로 토론해야지'하고 준비하진 않잖아요. 근데 유독 하루키의 경우만 그런식이더라구요.

 

하루키 작품에서도 섹스 묘사는 사실 별것 아니거든요. 정말로요;

 

물론 좀 특유한 점은 있긴 해요. 굉장히 건조하게 서술되는 느낌.. 그래서 흥(?)이 안나고 성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건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도무지 흥도 안나고 관능적이지도 않은 성애 묘사를 하는데도 하루키에 대해서만은 그것이 아주 특별히 인상적이고 충격적인것으로 한국 독자들(저는 한국 독자들밖에 모르니까;)에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이런 것일수도 있겠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라는 것은 고작 그런 수준이라는 거야' 말하자면 책장을 덮고 나면 별것 아닌 섹스묘사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의 소설들은 형편없고 텅 비어있다 라는 비판을 돌려 말하는 것? 에이 설마 그런건 아니겠죠....

 

제가 가장 흥미돋는건 노르웨이의 숲이에요. 한국 번역판 상실의 시대. 이 책이 워낙 많이 팔리고 많이 읽혀서 그런것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이 소설에 대해서 자신이 청소년기에 받은 충격(?)을 토로하는 이야기를 많이 봤거든요. 거기서 주인공은 죽은 친구의 애인이었던 여자애 생일축하해 주다가 섹스를 한번 하고, 나중에 요양원에 들어간 여자를 만나러 갔다가 오럴섹스를 해요. 미도리라는 좀 엽기발랄한 여자애가 꽤 과격하게 들이대지만, 그 방법이 유혹적이고 농염한게 아니라 너무 유치하고 직설적이라서 그냥 웃길 뿐이죠(손으로 애무해주는 장면이 한번 있긴 하죠). 이 정도가 전부인데, 그 묘사도 그냥 평범한데(?) 왜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걸까. 이 정도 섹스 묘사가 있는 책을 고교생 중학생때 읽는 것은 너무나 쉽고 또 흔한 일인데 말이죠. 아, 물론 저도 좀 의아하고 약간 정신 데미지를 입은 장면은 있긴 있었어요. 말미에 그..레이코 던가 요양원 터줏대감이던 중년여인과 관계를 갖는 장면같은 것. 거기서는 주고받는 대사도 좀 노골적이라 흠칫하긴 했네요.

 

두서없이 막 썼는데, 그래서..뭐 결론은 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거의 열이면 열 하는 얘기에 저 혼자만 공감을 못해서 의아스러운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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