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 안 차려주는 아내

2012.04.15 02:04

Tutmirleid 조회 수:9988

대학 입시 때문에 잠깐 다니던 학원이 있었습니다

시간강사 일과 학원을 병행하는 원장 부부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눈코 뜰 새가 없어 보였습니다.

영재반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작은 학원 규모에 비해 제법 찾는 사람이 많았던 것도 같습니다.

한 번은 1대1로 수업 중에 원장의 옛날 이야기 삼천포로 흐름이 바뀌었는데 저는 지루한 참에 그냥 듣고 있었습니다.

"아니 근데 우리 엄마는 아침밥 한 번을 거르게 한 적이 없는데"

로 시작하는 푸념은 아침밥을 차려 주지 않는 아내에 대한 투덜거림으로 이어져 돌림노래처럼 반복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시간이 없어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우곤 했지만 아내분도 하루종일 일하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저는 조금 갸웃했습니다

인스턴트가 아닌 식사가 그립다는 것인가, '차려서 갖다 주는'밥이 그립다는 것인가? 가 궁금해졌기 때문에 저는 물었습니다.

"두분 다 바쁘시니까 그렇겠죠, 집에서 시간 나시면 선생님이 식사준비를 하셔서 같이 드셔도 좋지 않을까요?"


순간 미묘하게 흐름이 뚝 끊기고, 원장의 표정은 마치 42세기쯤의 외계어를 처음 접하는 원시인의 그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저의 말을 고스란히 씹고 다시 똑같은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저는 '아 저사람에게는 남자가 밥 차린다는 개념이 인식이 되지 않는구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초고학력을 가진 지식인이면 뭐합니까, 기본 개념이 미탑재되어 있는데.


생계 활동 없이 가사에 소홀한 배우자(여자의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에)는 맞벌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에 참여하지 않는 배우자(이 경우 대개 남자)만큼이나 어그로를 끄는 주제죠. 얘기 잘못하다간 군대VS임신 수준으로 퐈이트 뜰 기세.

뭐 둘 다 디폴트로 교육을 받지 않아서 탑재가 안 된 경우도 있고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죠?

오버해서 머리 큰 성인들끼리 이런 걸로 4주 후에 뵙겠습니다 하지 않으려면 결혼 전에 충분히 얘기하고 제대로 합의를 봐야 하는 게 맞겠죠.

합의대로 잘 하지 않으면 잘못한 쪽이 당당하게 굴지 않게끔 단호하고 따끔하게 대처도 해야겠고요


쌍방 합의로 어쩔 수 없는 '일한다고 우리 아들 밥 안 차리냐!' 시어머니! 웰컴투 시월드 헬게이트!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다시 피해자를 낳고...불쌍하고 싫고 막 그렇네요.

시대는 빠르게 변해도 인간의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한 아는 사람의 말이 이러했습니다

"내 딸은 집안일 돕는 남자에게 보내고 싶다, 하지만 내 아들에게 집안일 시키고 싶지는 않다" (여자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걸 보니 윗 세대 시어머니와 동일한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고 말하자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 며 반박했지만 저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오지랖같아 보이지만 오지랖이 맞아요; 서로 막 던지는 사이.

그래도 머리 굳은 사람들의 기본 사고방식 세팅도 다음 세대에 조금씩 바뀌어가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뱀발일지도 모르지만,

맞벌이 여부에 관계없이 '내 밥은 누가 차려다 바쳐야 한다' 는 전제는 조선시대나 갖다 줘 버리라고 하고요

어떤 식으로 합의가 나든 가정 경제/운영에서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건 맞지요. 배우자는 호구가 아니니까.

만약 외벌이 가정이 9시 출근에 근거리 출퇴근이면 출근자는 출근준비로 정신없을 텐데 배우자가 저혈압으로 일어나기 힘들거나 하지 않는다면 

아침부터 찌개 끓이고 계란 후라이하지는 말고 있는 반찬 가지고 밥 세팅은 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합의 보기 나름.

외벌이 출근자가 장거리 통근자(대부분의 이공계가....ㅠㅜㅜ)에 칼새벽 출근이면 어차피 직장에서 식사를 셀프로 해결한다는 훈훈한 엔딩을 맞을 수 있습니다


결론: 이 글의 결론은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좀 찾아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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