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과자 워스트 '산도'

2021.11.01 20:55

chu-um 조회 수:686

즐거운 과자 이야기 생각하신다면 뒤로가주세요. 요즘 우울한 제 기분이 반영되어 글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산도를 제가 돈 주고 사먹은 적은 없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흔한 과자였기 때문이죠. 집에 가면 항상 있는 과자.

아버지는 자주 산도를 사오셨습니다. 퇴근하는 그 분의 한 쪽 손에 봉다리가 있다면 거의 매번 산도였습니다. 작은 실망들이 매번 쌓였죠. 왜 맨날 산도지. 산도지옥인가. 

저는 매번 확실하게 실망의 어필을 했습니다. 나는 00 좋아하는데요. 산도는 이제 그만 먹고 싶어요. 등등

그래도 그 실망이 별거 있겠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과자인데. 매번 실망했지만 매번 먹었어요. 맛이 없진 않았거든요. 저는 아이였구요. 

산도가 뭔지 아시죠? 샌드위치 쿠키인데 일본어로 산도입니다. 쿠키 두개 사이에 크림 들어있는 그 과자. 

꽤 옛날 과자라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 한 때 국민과자였습니다. 


몇년 전, 진열대에 놓여져 있는 산도를 보고 어린 시절 작은 실망들이 다시금 생각났고 어른이 된 시선으로 복기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분명히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매번 산도를 사오셨을까? 

악의없는 무관심이었을까? 실망하는 내 모습에 어느 정도는 고약한 심보로 사오신걸까?  의식하지 못하는 이기심? 아 모르겠다. 그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건지...

어른의 시선으로도 잘 모르겠더군요. 어쨌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진열대의 산도를 사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좋아하는 산도 사왔어요.'


굉장히 당황스런 얼굴로 저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나직하게 말하더군요. 


'....네가 좋아하는거지. 난 산도 싫어해. 가져가라'


별로 충격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기억이 잘못된건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건지. 서로의 역사를 되짚어 부질없는 과거의 진실을 찾고 싶지 않았어요.

단지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유일한 진실은 지금 이 순간, 우리 두 사람은 산도를 싫어하고 있구나. 였어요. 그게 유일한 진실이었죠. 

관계가 잘못되는 것은 인과적이지 않습니다. 운명적이고 직시적입니다. 우리 둘의 운명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둘 다 싫어하는 그 산도였습니다. 


집으로 가던 중, 들고 있는 산도를 버리려고 했다가 문득 한 봉지를 뜯어서 먹어보았습니다. 

미묘한 맛이었어요. 리뉴얼을 한 건지 맛이 세련되졌다고 해야하나. 먹을만 하더군요. 



편안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특히. 힘들군요. 이렇게 한가득 내뱉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87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9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2329
117814 다큐멘터리 영화 인터뷰를 했습니다 [4] Sonny 2021.11.27 468
117813 Stephen Sondheim 1930-2021 R.I.P. [3] 조성용 2021.11.27 277
117812 소재의 중복, 영화 딥하우스를 보고(약스포) 여은성 2021.11.27 464
117811 월드컵 조 추첨 유럽/듄 짧은 잡담 [3] daviddain 2021.11.27 368
117810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건 참 신기하네요(쥬라기 월드 도미니온 이야기) [4] 부기우기 2021.11.26 370
117809 풍류대장 8회 [3] 영화처럼 2021.11.26 311
117808 (넷플릭스) 고요의 바다 티저 예고편 [4] 예상수 2021.11.26 533
117807 아이 이야기 하나 [3] Kaffesaurus 2021.11.26 441
117806 [KBS1 독립영화관] 더스트맨 [2] underground 2021.11.26 206
117805 슈퍼 변이 코로나 등장, 백신 무력화 우려 [2] driesvannoten 2021.11.26 537
117804 바낭 겸 잡담 - 시대에 뒤쳐진 사람(요즘 들은 노래) [1] 예상수 2021.11.26 242
117803 정인이 계모 35년 감형, "하지만 살인은 인정 복부 몇 대 때렸을 것" [5] tom_of 2021.11.26 641
117802 [영화바낭] 이번엔 코미디 영화 둘, 'PM 11:14'와 '어처구니 없는' [4] 로이배티 2021.11.26 387
117801 [회사바낭] 회사는 전쟁터, 나가면 지옥 가라 2021.11.26 594
117800 축구/랄프 랑닉 맨유 임시 감독 daviddain 2021.11.25 269
117799 빠삐용의 죄 [3] 사팍 2021.11.25 361
117798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의 특이한 기능 [6] catgotmy 2021.11.25 339
117797 <지옥> 3~4화 약 스포 간단평, 원작 애니의 음산함 / <오징어게임> 음악 정재일 미국 HMMA 상 수상 [5] tom_of 2021.11.25 661
117796 듄 (2021) [3] catgotmy 2021.11.25 516
117795 양파를 자주 먹을 수 있는 요리법은 뭐가 있을까요? [18] 산호초2010 2021.11.25 76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