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공식 모임에 나갔다가 뒤풀이 자리에서 "한국의 천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머선 식의 궁금증이지? 멍한 중에 동석자들이 추천한 분이 이종철과  김성철 교수였습니다. 
이종철은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미의 깊이>를 번역해서 저에게 각인된 분이에요. <중국불경의 탄생>도 쓰셨죠. 동경대 인도철학과에서 석박사를 마쳤다는 이력을 알고 나니 끄덕하게 되더라고요. 일단 제가 놀란 것은 책의 목차였습니다.

그런데 제게 이 책을 권한 건 의외로 일본인이었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일본에서 신화 붐을 일으킨 소요자로서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자신의 독자적 연구로 흥미롭게 진행시킨 학자입니다. 어느 정도 대중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서 읽기도 편한데다, 의견이 날카로운 데가 있어서 관심을 지속시키는 장점을 지닌 글을 쓰더라고요. 가령, 불교와 샤머니즘의 구분 같은 것은 일찍이 다른 문헌에서 접할 수 없었던 논리를 펼치고, 신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주 경의를 표하는 이가 바로 이즈쓰 도시히코입니다. 일본의 구조주의 연구는 굉장한 수준이라는 풍문만 들었는데, <의미의 깊이>를 읽고 있으면 그런 심증은 물증을 얻게 됩니다. 어떤 개괄적인 이야기, 메타로그풍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느덧 전체의 그림을 자기가 의도하는 쪽으로 끌어당기는 논증의 힘이 상당합니다. 이런 식의 학풍은 가라타니 고진에서도 발견되는데, 실은 일본 인문학 전체의 학풍이 아닐까 라는 다소 개인적인 인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을 풍부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문화적 틀을 마련한다는 것이고, 하나의 문화적 틀(cultural framework)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음 학문의 진행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마치 '사소설풍'으로 여겨질 수 있는 특이한 논증 방식보다 주목하게 만드는 점이 있어요.  정말 읽지 않으면 안되는 고전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는 기초적 공부 방식에 대해 언급하며 생각거리로 이끌어주거든요. 그러면서도 그 행간에서 숨을 고르면서 현실주의적 해독과 고삐 풀린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능력이 있어요.
뭐 사실 이런 이야기는 하나마나한 말들이죠.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시크한 언설 풍으로 뭉뚱그리자면, "나나 잘하자" 라는 식의 최선의 제언이라는 것.

아무튼 <의미의 깊이>를 다시 뒤적이며 저는 언어가 왜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보고 있습니다. 의사소통 수준이라면 많은 반문과 함께 가도 상관없고, 하버마스류의 합의라면 불통되어도 상관없거든요 그러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에 개입하는 언어의 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이거든요.  우리의 존재는 세상에 '던져짐'이라는 근원적 사건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지만, 그 존재의 해독은 여전히 언어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어서요. 아니, 사유 자체가 언어 외적인 것이 불가능할 지경이라고 판단하는 쪽이어서요.. 깨친 자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즈쓰 도시히코의 탁월한 점은 그런 근원적인 언어학을 동양에 투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승불교나 이슬람에 개입시킨 언어학은 데리다의 힌트를 갖고 들어간 것이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종자' '언어 아라야식' 같은 대승기신론적인 개념도 사용하는데, 언제나 서구 언어학과 병치하면서 설명하고 있고 정확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일주일 클수마수 휴가인데 집콕 할 수밖에 없네요. 네팔에 가서 에베레스트 올라가면 엄청 좋을 시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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