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05 14:25
로이배티님의 글을 보고 복기해보는 글입니다. 로이배티 당신이 틀렸어...!! 이런 건 아니구요.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page=3&document_srl=14040821
이 영화의 결말부터 좀 되새겨봅시다. 왜냐하면 결말이 정말 이상하거든요. 어떤 이야기가 감정적인 결론에 다다를 때 제일 쉽고 직관적인 도착지점은 아주 긍정적이거나 아주 부정적인 이분법의 세계 중 어느 한 쪽으로 발자국을 남기는 것입니다. <프라미싱 영 우먼>에 이 방법론을 적용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소위 "어중띄는" 느낌입니다. 복수를 하긴 했는데, 주인공이 죽어버렸습니다. 일단 주인공이 살아야 복수의 의미를 찾든 말든 하죠. 여태 관객들은 주인공에 이입해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표지판을 잃어버렸습니다. 단죄의 대상이었던 알은 캐시를 죽이고 시체를 불태워버립니다. 주인공이었던 캐시의 육체가 오히려 유린당한다는 느낌은 마지막에 경찰이 그 시체를 찾아내는 내용으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그 여자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문장을 완성해버립니다. 조금 잔혹하게 말하자면, 캐시는 자신의 친구인 니나가 당했던 '능욕과 죽음'을 순서만 바뀌어서 다시 당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복수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로 남습니다. 해소되는 건 없고 억울함만 더 쌓이니까요.
이 영화의 마무리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왜 감독은 그렇게 이야기를 짜나간 것인지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로이배티님이나 다른 분들이 "현실성"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다른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현실성"이란 단어 자체가 품고 있는 함정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말미에 조금 더 풀어볼 것이고 일단은 결말을 조금 더 거슬러가보자면요.
1. 캐시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윤리적 응보이다
캐시는 복수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수는 목적에서는 공분을 얻을 수 있어도 실행과정에서는 그 명분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캐시의 복수극 역시 그렇게 덜컥거립니다. 가장 단순해보이는 "너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라는 그 역지사지의 논리는 지난날의 가해자를 피해자의 위치에 세워놓으면서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위치의 역전을 주도하는 캐시 역시 비슷한 가해자의 위치로 이동시킵니다. 그 2차 가해자들은 니나의 강간사건을 두고 가해자들을 두둔했던 의대 학장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학장의 딸, 2차가해를 했던 동기 메디슨입니다. 캐시는 주요 2차 가해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강간 직전의 상태로 그들 혹은 그들이 아끼는 사람을 몰아넣고 강간의 위기감을 느끼게 합니다.
캐시에게 위협을 당한 이들은 캐시가 의도한 대로 강간피해의 두려움을 느끼고 본인들의 무지와 2차가해에 대한 뼈저린 각성을 합니다. 그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해서, 캐시의 이 "미러링"을 과연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습니다. 캐시가 정말 정확한 보복을 하고자 했다면 캐시는 2차가해를 한 이들에게 똑같이 2차가해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캐시의 복수는 준강간에 가까운 실질적 위협으로 2차 가해를 훨씬 뛰어넘는 정도의 보복을 합니다. 메디슨은 캐시에게 협조를 하면서도 치를 떨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엘리자베스 학장은 자신의 딸이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캐시의 행위는 그 목적을 알리바이로 놓기 어려울만큼 비열하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캐시가 보복을 행하는 이 2차 가해자들이 자신과 동일한 사회적 위치에 놓인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캐시의 죽음은 윤리적으로 필연적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친구가 당한 강간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들을 희생양 삼아서, 혹은 수단으로 삼아서 그 분노를 해소해도 되는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캐시의 죽음입니다. 이 영화는 여자를 강간한 남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죄의식으로서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강간의 위험에 빠트려도 되는지 이 질문을 영화가 피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캐시는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숭고함이나 상처와 무관하게, 캐시가 결국 다른 여자를 강간의 트라우마로 빠트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이 영화의 감독인 에메랄드 페넬은 강간이라는 행위를 증오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강간은 주인공조차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죄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어쨌든, 캐시는 죽어야 합니다. 어쩌면 강간의 끔찍함을 아는 여자인 당신이 그런 짓을 하는 건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는 메시지를 새겨넣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2. 캐시의 죽음은 캐시가 바라왔던 해방이다
전후 생전자들이 겪는 PTSD에는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종류의 죄책감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을 비겁한 겁쟁이인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직접적 행위로 인한 상처가 아니기에 이런 종류의 트라우마는 매우 잔인하고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생존자를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그 때 함께 희생되지 않았다면, 나중에라도 희생되어서 덜 부끄러워져야 한다고요. 영화가 묘사하는 캐시의 심리적 상황은 종종 이런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연상케 합니다.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인 캐시가 의사가 될 기회를 걷어차고 변변찮은 까페숍에서 웨이트리스 알바나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캐시가 그렇게 주저앉은 것은 심리적인 불가항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자신의 미래를 외면하면서 방황하기를 선택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캐시의 복수에는 전혀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캐시의 복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선결과제, 즉 단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삶 VS 성폭력의 현실을 잊고 살아가기라는 이지선다의 구조 안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캐시가 언제까지 밤에는 인사불성 상태를 연기하다가 남자들에게 일침을 놓는 히로인 노릇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 짓을 7년이나 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하고 캐시의 중독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묘사입니다. 캐시는 배트맨의 가면을 쓴 브루스 웨인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낮에는 까페 알바를 하고 밤에는 복수자를 한다는 걸 양면적인 삶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캐시의 "브루스 웨인"적인 면모는 의사가 됐어야 이뤄지는 것입니다) 캐시의 복수는 복수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죽지 못해 그나마 그런 짓이라도" 하며 살아가는 행위에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캐시의 술취한 척 남자 낚시하는 행위를 로이배티님은 위험천만한 짓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 위험함에 이 모든 행위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캐시는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부러 같은 고통을 자초할 수는 없으니 그런 위기상황에 자신을 계속 던지면서라도 "만만치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누군가에게 항변하고 싶은 심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 증명대상 중 가장 커다란 존재는 죽은 친구, 니나겠지요.
캐시는 영화 중반에 모든 걸 잊고 라이언과 행복한 연애를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손아귀에 그 영상이 돌아오기 전까지는요. 7년간이나 미쳐 살다가 2차 가해자들도 적당히 혼내주고, 참회하는 다른 2차 가해자도 만나면서 캐시는 마음의 안정을 얻었습니다. 복수의 끝은 승리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캐시는 간신히 그 평화를 얻고 라이언과 함께 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그 라이언이 2차 가해자 중 한명입니다. 여태 죽고 싶던 여자가, 간신히 삶의 활력을 얻었는데 그 작은 희망을 다 포기해야합니다. 캐시가 확실하게 죽고 싶어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복수가 성공한 이후에도 캐시는 스스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자라서 약하다는 게 아니라, 복수 말고는 삶을 지탱하는 게 없는 사람이 복수를 완수했으니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냐는거죠. 자그마치 7년입니다. 죽은 니나를 생각하며 여태 시시하고 찌질하기까지한 대리복수를 하고 살았던 게 7년입니다.
캐시의 예약 메시지는 여러모로 이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정말정말 죽여버리고 싶은 복수 목표가 있습니다. 계획도 확실하게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세우면서 어느 누가 "혹시 내가 실패해서 죽을지도 모르니 내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상정해서 사회적 매장을 시켜버리는 플랜 B도 세워놔야겠다"고 할까요. 복수를 하거나,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생각해도 복수에 실패해서 죽거나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세워놓는 건 좀 이상한 일입니다. 만일 그 복수가 핸드폰 메시지로만 완성이 된다면 차라리 결혼식에 가서 의기양양하게 폭로를 하고 온라인에서 퍼트리는 게 훨씬 더 확실한 응징입니다. 캐시의 이 같은 준비는 캐시가 7년간 해오던 "취한 척 남자를 유혹해서 일침놓기"의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단히 위험천만한 상황에 몸을 계속 내던지던 캐시는 죽음을 각오했다기보다는 죽음을 예상하거나 선택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복수를 하다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그는 장렬한 "전사"를 바라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3. 캐시의 죽음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보내는 성장의 메시지다.
영화에서의 판타지는 가끔씩 완벽한 승리를 선사하면서 현실의 패배만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비참함을 남기기도 합니다. 원더우먼이나 캡틴 마블이 아무리 여성을 고취시킨다고 해도 대부분의 현실 속 여성들에게는 슈퍼파워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대의 전략을 취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영화에서의 뼈저린 패배를 보면서 오히려 현실에서도 똑같이 패배하지는 말라는, 일종의 제물과도 같은 영화들이 있습니다. 영화가 현실의 패배를 답습한다고해서 뭐가 더 나빠지겠습니까? 참혹한 현실에 참혹한 이야기 하나가 더해질 뿐인데요.
역으로 이 영화를 하나의 백신처럼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 속 실패를 혹독하게 겪으면서 현실의 실패에 더 강인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그런 항체 같은 거죠. 니나와 캐시는 여성은 이렇다고 문장을 끝맺는 캐릭터들이 아니라 어떤 여성들은 이랬지만, 이라면서 관객들이 문장을 뒤이어가주는 그런 역할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여자는 성폭력 때문에 자기 삶을 잃고 포기했지만, 어떤 여자는 성폭력을 저지른 남자들에게 복수는 했으되 그 자신도 끝내 삶을 지키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리고 영화는 여성인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꼭 이들처럼 삶의 주도권을 다 잃고 기쁨과 희망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도,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당신만큼은 폭력의 피해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여자들을 보았으니 조금은 다른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캐시가 복수에 성공하고 무사히 살아내는 그런 이야기라면 어떤 관객들 역시 복수를 꿈꾸며 거기에 인생을 사로잡힐지도 모르죠. 복수는 나쁜 것이라거나 덧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언젠가는 그 상처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가 기다리고 있기에, 약하고 비참한 자신을 보듬어내면서 그 앞을 바라보고 걷는 삶을 관객들은 살아주라고 감독은 주문하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졌단 이야기죠. 이 영화를 보고서 당신 인생의 살풀이를 어느 정도는 덜어냈으면 한다고.
그래서 캐시는 죽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절대 이루지 못할 복수는 이뤄내되 죽고 싶은 누군가의 눈 앞에서 죽어버리면서 당신만큼은 반드시 살라고 희생을 해야하니까요. 어쩌면 이 영화의 숭고한 지점은 그 폭력의 대리인으로서 피해자의 위치조차도 대리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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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생각만큼 시원하지 않은 것도, 주인공의 죽음으로 당황스레 끝나는 것도 감독이 예상하지 못했을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헐리우드 영화 공식에 맞춰 내놓은 이 영화가 이런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것은 쉽게 밟아나갈 수 있는 통쾌함의 길로 가는 걸 애써 참으면서 추접하고 비참한 길로 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쩌면 그조차도 영화는 현실의 성공 혹은 실패를 극명하게 재현해야한다는 설익은 믿음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영화 안에서 캐시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려했는지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증명이 됐을지도 모르죠.
@ "현실성"이란 단어를 이야기할 때 복수의 불가능이나 확률적으로 당연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영화가 현실과 "타협"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같은 의미이지만 저는 영화가 판타지를 배제하고서 최선을 다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2022.01.05 15:20
2022.01.07 19:54
그쵸... 굉장히 고통스러운 영화입니다. 화려한 복수극으로 시작할 듯 하다가 이내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주인공을 내내 보여주는 게 정말 속편한 영화가 아니죠...
2022.01.05 18:44
저번 글에도 적었지만 영화의 모든 요소, 사건, 캐릭터가 주제를 드러내고 강화하도록 잘 짜여져 있다. 라는 부분에는 전혀 이견이 없습니다. Sonny님과 제 차이는 아마 90% 이상이 그 메시지를 드러내는 방식을 받아들이는 입장의 차이인 것 같고 그건 매우 주관적인 부분이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그런 가운데 전 Lunargazer님 말씀에 굉장히 공감이 되구요.
예전에 무슨 웹툰이 있었어요. 전 웹툰 잘 안 보는데 당시에 워낙 유명하기도 했고 듀게에도 추천 뉘앙스의 글인지 댓글인지가 보이길래 냅다 읽었는데... 그러니까 이게 학교 폭력과 가정 폭력을 격한 가난 속에서 겪는 팔자 기구한 소녀 이야기였거든요. 처음엔 정말 서늘 살벌하게 이야기 잘 풀어나가네... 했는데 대략 중반부터 완전 말도 안 되는 환타지로 막 달리는 거에요. 갑자기 소녀는 아무 노력도 없이 타고난 능력을 깨닫고, 그걸로 돈도 벌고 적들(?) 다 무찌르고. 이래도 저래도 처리할 길 없던 인생 빌런은 그냥 우연한 사고로 홀연히 사라지고. 마지막엔 로맨틱 코미디 에필로그 삘의 저엉말 말도 안 되는 환타지 해피 엔딩을 맞아요.
전 당연히 중반 이후로 욕에 욕을 해가며 봤죠. 그리고 마지막 화를 끝내고선 '도대체 이딴 게 좋다는 양반들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라는 호기심에 수천 개가 달려 있는 댓글을 클릭해 봤는데요. 거기엔 "내가 주인공 나이 때 이 웹툰을 보기 시작했는데, 매일매일 죽고 싶어 미치겠는 걸 작가님 만화를 보며 견뎌 이제 성인이 되었다"라는 눈물 없이 읽기 힘든 장문의 댓글들이 우루루루 달려 있었죠. 그리고 전 어디 가서 이 웹툰을 욕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더라구요. 현실 더러운 건 누구나 다 알고 분홍빛 해피엔딩이나 시원한 복수 같은 건 거의 픽션 속에만 존재한다는 거, 우리 다 알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엄하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픽션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지 않습니다만. '전 별로...' 라는 얘기였습니다. 전 그냥 '리벤지' 열 번 볼래요. ㅠㅜ
2022.01.07 19:55
아... 전 로이배티님이 "이 훌륭한 영화를 그렇게 재미없다고 하다니!" 라고 한 건 결코 아니구요. 제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로도 다가왔다는 이야기입니다 ㅋ 나중에 쓰면 뭔가 님 글은 이게 틀림! 이라고 공격하는 식이 되어버리니 난감하군요...
저도 저 영화를 그렇게 재미있게 보진 않았습니다 아마 로이배티님 감상이랑 거의 비슷할 거에요...
2022.01.06 18:13
캐시의 마지막 계획은 강간범 한 명에 대한 복수가 아니고 시스템이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알려 준 정보로 판단하건대 이 인물이 후반에 가진 정서적 상태에선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행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는 은유도 없고 재미를 주려는 목표도 없고 첫 장면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의 생각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강간당한 여성이 있고 사회가 그녀를 묻었고 조롱했고 세상 밖으로 잊혀졌다는 것. 다함께 파묻고 묵음 처리한 후 잊고 사는 그 일에 빛을 비추고 소리를 내야한다는 생각만이 이 영화의 목표인 것 같습니다. 사회가 합심해서 모두 다 잊는 게 옳다고 말하고 있을 때 그렇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습니다. 영화의 끝부분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저는 이 영화에선 이런 방식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고 여러 번 보기 어려운 영화지만 수많은 영화들 사이에 한 번은 볼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022.01.07 00:38
심지어 피해자 어머니까지 잊자고 하니까요 ㅠㅠ 저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엔딩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감독의 이런 용단을 지지합니다. 극장에서 한 번, VOD로 한 번 봤는데 더 이상은 힘드네요. 막판 클라이막스에서 상황역전되는 장면이 너무 보기 괴로워서....
2022.01.07 19:58
분명한 뜻이 있죠... 그런데 저도 그 클라이맥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믿기가 싫더군요. 마지막에 죽은 줄 알았지 쨔잔 하면서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했었는데...
2022.01.07 19:57
주변인물들, 2차 가해자들을 다 시스템으로 본다면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게, 캐시가 시스템을 부수고 싶어한 것은 맞으나 사람들을 하나하나 건드려가면서 본인이 점점 회의에 빠져가는 것 같더군요. 이렇게 해서 누굴 묻은들 무엇하며 누구에게 뭘 따져물어본들 무엇하나... 하는 그런 인상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마지막 남은 복수심만큼은 그 주동자들에게 확실히 풀어놓자는 최후의 분노같기도 했습니다.
저도 캐시가 미필적고의를 가지고 자살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캐시 나름의 연대의식이었을거예요. 그애가 그렇게 살지못해 가버린 세상에서 프라미싱한 영 우먼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는 없었겠죠. 자신을 소모하며 세상의 부조리에 항의를 하면서 천천히 자살을 하다가 말씀대로 "장렬한 전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죠. 저는 또한 캐시가 "피해자성"을 얻고 싶어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캐시의 절망과 자기파멸의 욕구는 주변사람에게 납득되지 못해요. 심지어 그 친구의 어머니에게도 캐시에 대한 연민과 함께 "니가 당한 것도 아니면서"가 느껴졌다면 제가 과민한 것일까요. 이 남자들의 세상은 여자들의 이런 절규에 아주 엄밀한 당사자성을 확인하고 싶어하잖아요. 그렇다면 마지막의 자폭도 논리적으로 말이 됩니다. 캐시는 복수를 위해서 당사자성을 획득해야 했으니까요. 잠시의 기만적 행복이 산산히 부서진 뒤, 결국 이 곳이 바뀐 것 하나없는 프라미싱 영 맨만의 세상임을 깨달은 캐시는 자폭보다 더 치열한 저항을 생각할 수 없었을겁니다. 그래요, 말이 됩니다...그래도 그런 자폭이 전 보기 싫어요. 제물이건 살풀이건 보기싫어요. 지금 당장 아무 포털에가서 사회면을 훑으면 죽어나가는 여자들 이야기가 널려있잖아요. 영화에서까지 무력하게 살해당하고 쓰레기처럼 소각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댓글을 달려고 다시 상기하는 것 마저도 괴로운, 아주 뒷맛이 좋지않은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