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5 18:04
Phantom Thread, 2017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작이죠.
개봉 때 보고 좋았기에 한 번 더 봤습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았는지 잘 기억이 안 나기도 해서요. 처음 볼 때는 허기질 때의 식사처럼 여유가 없고 허겁지겁 내용을 따라가기 바쁜데, 마음에 와 닿던 많은 영화가 그렇듯 다시 보니 더 좋네요. 이 영화를 짧게 평한다면 씨네21 장영엽 기자의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열 자 평이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자기 상표를 가진 드레스 디자이너 우드콕 역, 비키 크리엡스가 우연히 만나 그의 모델이 되고 연인으로 발전하는 알마 역, 레슬리 맨빌이 우드콕 의상실의 살림을 꾸려나가는 세련된 누님 역을 맡으셨습니다. 초반의 바닷가 동네 장면 외엔 거의 실내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거주와 동시에 작업과 판매까지 함께하는 우드콕의 건물이 주된 장소이고 시골집이 일부분 등장합니다.
저는 우드콕의 의상실 건물이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건물은 레이놀즈 우드콕이 자고 먹고 아침이면 문을 열어 외부 사람을 들여 일을 시키고 손님을 맞이하여 자기 작품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우드콕은 자기 체질에 맞추어 스케줄을 짜놓고 다른 누군가 방해할 수 없도록 연륜이나 경력이나 경제력의 힘으로 질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그중 최고의 힘은 카리수마 있는 아름다운 다니엘 데이 루이스 씨의 외모!에서 나온 것이겠지만요) 이 건물은 일종의 성이나 왕국 같습니다.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이므로 다른 무엇의 필요를 못 느낍니다. 못 느꼈습니다. 이곳에 없으면서 필요한 것들은 사소한 일회용 이상이 없었어요.
드레스를 만들며 만나는 아름다운 여자들, 모델들 중 개인적인 만남이 진행된 여자들도 자기 옷을 걸치면 어떻게 보일까 정도의 관심을 넘어서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자들도 자기 드레스를 완성시키는 소재 중 하나 정도였던 것이죠.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진행되어 별 탈이 없겠나요. 나는 부족함 없이 완전하니 상대는 내가 필요로 할 때 열어 둔 문으로 잠시만 들어왔다가 귀찮지 않은 정도에서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 식이라니. 그런 고인물 상태에서 완전함이 언제까지 유지될까요. 알마는 경력이나 경제력은 우드콕에 비교할 수 없는 처지이지만 드높은 자존감과 확고한 취향이 있어요. 아닌 건 아니고 쭈그러져 있지도 않고 함부로 휘둘리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알마라는 인생의 적수를 만나게 되어 쓰디 쓴 비용을 지불하며 관계에 들어 가는 것을 보여 주는 영화.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여자가 내 옷을 얼마나 소화할 것인가, 궁금할 뿐이었는데.
불꽃 튀는 아침 식사 자리.
1. 이번에 보면서 '알마'라는 이름이 영국이 아니고 동유럽 느낌이라는 것, 역을 맡은 배우는 룩셈부르크 출신이라는 것,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소가 해안가 호텔 레스토랑이라는 것 등에 생각이 닿았습니다. 우드콕의 잘 자리잡힌 런던 의상실의 체계가 유럽에서 온 세련되지 않았지만 만만치 않은 젊은 이주민 여성에 의해 구멍 숭숭 뚫리는 내용 아닌가, 노회하고 자기 확신에 차 있지만, 엄마의 유령(과거)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는 유아스런 우드콕이 알마의 다듬어지지 않은 아름다움과 집요함을 이겨내지 못 하는 것이 숨은 의미가 있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우드콕 씨가 아침에 일어나서 몸단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몸단장 마지막 과정에 구두 솔질하는 걸 보니 예전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배우 그만두고 구두 제작자가 되려고 이탈리아에선가 구두 만드는 일을 배웠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자기 구두는 만들어 신나 궁금했네요. 이 영화의 많은 소품들을 직접 준비했다고도 하고 당연히 바느질 포함 디자이너 일을 배웠다고 합니다. 근처에 있으면 피곤한 완벽주의자. 이분하고 크리스찬 베일은 역을 맡으면 그에 몰입해서 사는 걸로 유명한 일화들이 많더군요. 그리고 이 영화가 마지막 영화란 말을 했다는데, 사실입니꽈!! 안 됩니다!!
3. 비키 크리엡스가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섰을 때 키가 비슷해 찾아보니 175센티네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188센티. 아마 우드콕, 나이든 역이라 꾸부정한 자세가 많아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습니다. 이 배우는 '모스트 원티드 맨'과 '청년 마르크스'에서 봤었어요. 드라마틱한 미인형 얼굴은 아니지만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는 얼굴이었고 저 무서운 두 배우들 사이에서 기울지 않는 연기를 보였습니다.
4. 우드콕에게 끼치는 죽은 엄마의 영향이나 알마가 우드콕에게 쓰는 사랑의 처방(?), 엄마와 알마가 함께 등장하고 교체되듯 하는 장면 등은 더 파보면 좋았을 텐데 여러모로 영화의 풍요로움을 살리지 못한 납작하게 축약된 후기인 것 같습니다. 깊게 쓰기엔 역량 부족이네요. 직접 보시고 깊게 감상하시길.
2021.12.25 18:25
2021.12.25 18:33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기도 하는 상황이고요.
베킷은 보셨나요. 저는 안 봤는데 괜찮으셨는지요?
2021.12.25 18:54
그럭저럭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는 되는데 좀 싱겁네요. 추천까지는 못하겠습니다 ㅎ
2021.12.25 18:56
전에 레슬리 맨빌 영화 글 올렸다가 이 영화 추천을 받고 언제 보나... 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올라왔더라구요. 올레 티비로 안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죠. 그쪽은 화질도 음질도 구려서 그걸로 보고 나중에 넷플릭스에 올라오면 화나거든요. ㅋㅋㅋ 글 잘 읽었습니다. 올해 가기 전에 봐야 겠네요 이것도.
아 맞다. HBO 드라마들은 어쩔...;
2021.12.25 19:08
봐야 할 것에 쫓기니 일이 되는 느낌이라 저는 그냥 느긋해지려고요. (그래봤자 한 달에 극장 영화 한 편 값이고 교통비까지 치면 마이 싸잖아...주문 걸면서요. ㅎㅎㅎ)
2021.12.26 01:17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본 직후에 이걸 보면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지가 않아요. 물론 배역에 따라 항상 변신하는게 배우라지만 이건 좀 영혼을 갈아끼웠었나 이런 생각도 들고 ㅋㅋ
PTA 감독이 자기가 매우 아파서 종일 침대에 누워있던 날에 병간호를 해주면서 평소에 볼 수 없던 애정 넘치는 얼굴을 하던 아내(마야 루돌프)를 보고 구상해낸 영화라는 뒷이야기가 너무 웃겼어요.
비키 크리엡스는 올해 샤말란 감독의 올드, 넷플릭스 영화 베킷 등에 출연하면서 바쁘게 활동했네요. 국내 개봉은 안했지만 미야 한센-러브 감독의 버그만 아일랜드라는 작품에도 출연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