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축구판을 예로 들면, 어지간한 팀에는 진짜 감독이 있고 락커룸의 감독이 따로 있곤 해요. 이무기가 너무 오래 묵으면 용이 되듯이 한 팀에서 너무 오래 자리를 잡은 스타 플레이어는 감독과도 비슷한 존재로 진화(?)하는 거죠. 레알 마드리드의 라울을 예로 들 수 있겠죠.


 그렇게 락커룸의 제왕이 된 고인물들은 분위기를 주도하는 분위기메이커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좋은 고인물은 별로 없어요. 대개는 락커룸에서 또아리를 틀고 감독과 각을 세우며 자기 패거리들이 실세 노릇을 하려 드는 경우가 많죠. 



 2.이건 어쩔 수 없어요. 필연적인 현상이니까요. 어떤 조직이나 작은 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 사람(들)은 존재감을 지니게 돼요. 직함과는 무관하게 말이죠. 그리고 그걸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요. 결국 그렇게 고인물들이 많아져 버린 팀에는 어지간히 이름난 감독이 부임하지 않는 이상, 락커룸의 실세들과의 대결을 치러야만 하죠. 


 한데 문제는 이거예요. 아주 독하게 마음먹고 아예 출전을 안 시키던가 이적을 시켜버리던가 해야 하는데 그 고인물들이 아직 전성기라면? 아직 2~3시즌 정도는 최고의 폼을 계속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러면 감독이 그만둬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3.첼시에 부임했던 비야스 보야스도 그런 경우였죠. 그는 유능한 감독이었지만 한 팀에서 오래 굴러먹은 이무기들이 락커룸에 도사리고 있었어요. 존 테리나 프랭크 램파드 같은 놈들 말이죠. 걔네들은 굴러들어온 젊은 감독의 지시를 따르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그냥 1시즌 조진 다음에 감독을 내쫓는 쪽이 구미가 당겼겠죠.


 그리고 '아직은 축구를 잘하는' A급 선수들과 감독이 파워싸움을 벌이면 감독이 질 수밖에 없어요. 2~3년은 더 써먹을 수 있는 A급 선수들을 잘라버리고 감독에게 무한신뢰를 주는 구단주는 없을 테니까요. 새로 부임한 감독이 고인물과의 파워게임에서 이기려면, 구단주가 팀을 리빌딩하기로 작정을 한 시기와 맞물려야만 하죠.



 4.휴



 5.결국 팀을 위해 가장 좋은 건 감독 자신이 고인물인 경우예요. 이 경우에는 고인물이 나쁜 게 아니죠. 감독이란 존재는 아무리 잘 했어도 1시즌 성적이 박살나면 끌려내려오게 되니까요. 그러나 퍼거슨처럼 한 팀에서 20년 넘게 고인물 감독을 하는 사람은 다시 나오기 힘드니까 논외. 


 그렇다면 두번째로는 스타 플레이어였던 선수가 감독으로 부임하는 경우겠죠. 지단 같은 경우요. 나는 지단이 비야스 보야스보다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문제는 이거죠. 지단이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선수들은 오른쪽으로 가거든요. 지단이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군소리없이 왼쪽으로 갈 거고요. 왜냐면 선수들이 지단을 존경하니까요. 세계적인 선수들을 다룰 때는 선수들이 따르도록 만들 수 있는 장악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전술가로서의 역량보다 중요한거죠. 



 6.뭐 이준석의 수법이 이해는 가요. 당내에서 누군가가 이준석을 공격하면 곧바로 바깥 채널에 대고 징징거리는 거 말이죠. 이준석이 카리스마가 있었다면 굳이 바깥에다 대고 '쟤가 저랬어요!'라고 할 필요 없이 그냥 그들을 제압했겠죠.


 어떤 사람들은 이준석의 행태가 너무 어린아이같다고 하고...뭐 사실이긴 하지만 이준석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내부의 문제를 바깥에 고자질하는 것만이 그가 해볼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니까요. 


 원래 내부 갈등이라는 게 그렇거든요. 외부에 유출되면 누가 봐도 이상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일 여지가 많아요.



 7.하지만 문제는 이거예요. 왜 그동안 스타 플레이어들과 갈등을 빚은 감독들은, 아니면 당 내에서 파워게임을 벌인 당대표들은 그때그때 언론에 대고 '내가 감독인데!' '내가 당대표인데!'라고 일러바치지 않았을까? 왜냐면 그렇게 내부의 문제를 바깥에 전시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가는 본인 커리어가 끝장나기 때문이예요. 조직 내에서의 파워게임에서 졌다면 어쩔 수 없이 진 거니까요. 그걸 경험삼아 훗날을 도모하면 다시 잘 될 수도 있지만 내부의 문제를 바깥에 드러내는 방식을 반복하는 사람에게는 다음 기회가 주어지지 않죠.


 그야 나중에 자서전이나 인터뷰에서 썰을 풀 수는 있겠지만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외부에 중계하는 건 그 업계를 떠날 사람이나 가능한 거예요.



 8.나는 비야스 보야스가 첼시 감독을 하기에 모자란 사람이었다고 여기지 않아요. 애초에 모자란 사람이었으면 구단주가 큰 돈을 써가며 그를 데려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젊은 감독은 첼시 선수들과의 소통에 실패했어요. 그런데 이준석은 비야스 보야스보다도 훨씬 더 '끌어내리고 싶은'느낌이 드는 사람이란 말이예요. 당내의 고인물들이 보기에 말이죠. 


 스포츠 구단의 감독은 선수들에게 접어줄 수 없지만, 정치인의 경우는 읍소형 정치인으로 변신해서 당내 인물들과의 융화를 꾀하는 방법도 있을텐데 이준석은 맞불까지 놔버렸죠. 인간관계란 건 참 힘들어요. '내가 당대표인데' '내가 감독인데'라는 말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단 말이죠.


 

 9.전에 썼듯이 완장이라는 건 아주 엉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아니예요. 누군가가 보기에는 걸맞을 수도 있고 약간 모자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될 만한 사람이 되죠. 하지만 어쨌든 완장을 찬 본인은 생각해 봐야 해요. 이 완장이 100%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80%인지 50%인지 말이죠.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그리고 남들이 생각하기에-50%라면 50%만큼만 행사해야 하고요. 남은 50%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납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언행을 조심해야만 하죠.



 10.원래 이준석에 대해 써볼만한 건 최근에 한번 써서 쿨타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자칭 보수유튜버라는 놈들이 이준석을 저격하겠다고 예고하고 있더군요. 


 한데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어요. 이준석은 무슨 유튜버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 상대는 당 대표란 말이죠. 현직 당대표를 저런 하이에나들이 낄낄거리며 저격하는 게 있어도 되는 일인가? 그야 이준석이 당대표 자격이 없다고 쓰긴 했지만 그건 당내의 입지에 있어서 그렇게 말한거고 외부인이 현직 야당 당대표를 저런 식으로 저격하다니. 이준석이 아니라 상대가 김무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지. 야당 당대표를 건드린다는 건 곧 야당을 상대해 보겠다는 거랑 같은 소리인데. 국힘은 왠지 이준석을 방어해줄 것 같지 않다는 느낌만이 드네요.



 11.반년 전인가 듀게에 이준석에 대해 썼을 때 예정된 추락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라고 썼는데 이준석이 여기까지 몰릴 줄은 몰랐어요. 


 이준석의 장점은 그거거든요. 완장을 차고 있지 않았을 때 완장을 찬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점이요. 그런 당당함-또는 허세-은 분명 좋은 점이었어요. 한데 문제는 이거예요. 완장을 차고 있지 않을 때는 얼마든지 당당해도 되지만 실제로 완장을 차면 그때부터는 완장과 본인의 실체와의 괴리를 파악하고 처신해야 한다는 점이죠.


 이준석의 문제...이준석 자신의 문제라기보다, 이준석이 처한 상황의 문제가 그거예요. 이준석이 받아든 첫 완장이 너무 강한 완장이었다는 거죠. 시의원 정도의 완장만 차도 주화입마에 빠지는 사람이 많은데 당대표라는 자리는 까마득히 높은 자리잖아요. 최근에는 그에 대해 안좋게 쓰긴 했지만 모든 게 이준석 탓은 아니예요. 이준석이 처한 상황과 그가 놓여진 자리가 그를 망치기에 너무 좋은 자리였어요. 그의 퍼스널리티를 고려해 보면요.



 12.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당대표 완장만 찰 수 있다면 당대표 대접은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 거예요. 두 가지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요. 하지만 이준석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는 당대표의 자리를 원하면서 당대표 대접까지도 원하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이준석은 지단이 아니란 말이죠. 어느날 갑자기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해서 선수단을 한순간에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예요.


 과연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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