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있었던 일

2010.10.04 19:16

1706 조회 수:2231

오늘의 토픽은 이건가요. 킁


사실 공공장소에서 민폐를 부리는 건 애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청년이나 모두 피해갈 수 없는 문제라고 봐요.

이걸 싸잡아서 '버릇없는 노인들이 문제' 라고 단순화하는 것도 좀 안일한 생각인 것 같고.

정작 오늘의 문제꺼리가 된 동영상도 자리 양보 문제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던데요.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앉을 자리가 막판에 있던 걸로 봐서는.

게다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소리지르고 막말을 하는 사태를 두고 누구를 탓하는 건 너무 극단적인 사태를 염두에 둔 책임전가란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간접적으로 저지르는 민폐들, 예컨대 자기집 안방처럼 쩌렁쩌렁 전화를 받는다던가 자기 학교 동아리실처럼 깔깔댄다던가,

그런 게 좀 더 의견을 개진하고 의식을 고쳐서 바로잡아야 할 사건들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의식이 그런 영상의 할머니를 정상적인 노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된다고, 보거든요.

하긴 이렇게 극단적인 게 재밌으니까 잘 퍼지는 거겠죠. 누굴 탓하기도 쉽고.



여하튼 그건 그렇고, 영상을 보고 나니 예전에 겪었던 사건 몇가지가 떠올라서.

첫번째는 칼부림(?) 사건. 한 5년 전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 열시쯤 됐나, 약수역 무렵에서 겪었던 일인데,

사람도 몇 없고 (딱 앉을 자리만 꽉 찬 지하철) 전반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였어요. 저는 지하철 제일 끝 차량에 타고 있었고.

갑자기 옆 차량에서 젊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라구요. 근데 차림이... 입고 있는 티셔츠는 찢어져서 너덜거리고, 가방은 품에 안은 채로 뭔가에 쫓기는 듯한 품새.

그러면서 하는 말이 누가 자길 쫓아오는데 어디 숨을 데 없냐는 거에요.; 다들 어리둥절해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제 옆의 아주머니가 의자 옆에 숨으라고 해서

얼른 뛰어가서 의자 옆에 웅크리고 숨었더래지요. 묘하게도 바로 그 순간에 남자가 달려온 쪽에서 다른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어요.

그런데... 오른 손에는 커터칼을 들고 있고, 청바지에는 핏자국으로 보이는 붉은 흔적들이 보였더랬습니다. 그러면서 시비조로 하는 말, "여기 누구 온 놈 없어요?"

와 정말 일순간 정적이 흐르더군요. 다들 우물거리고 대답을 안하니까 이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와서 차량 안을 훑어보는데

마침 숨은 사람을 찾아내기 전에 어떤 아저씨가 시비를 걸더군요. 지금 공포분위기 조성하고 뭐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이 남자는 별 말도 안하고 아저씨를 가만히 노려보면서 바로 앞까지 걸어가는 거에요. "뭐라고?" 뭐 이정도만 대꾸했나? 암만 봐도 싸움나기 직전처럼 보이더군요.

그래도 다들 조용했는데 오직 제 옆에 있는 아주머니 (숨으라고 했던 분) 만이 계속 제 무릎을 쥐어뜯고; 발을 구르고;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중얼거리더군요. 아이고 저걸 어떡하나, 싸우지 마요. 저거 누가 말려야 되는데, 그렇잖아요 총각? 그러지 말아요. 아이고 어떡해.

아 정말 그 순간만큼 제가 초라해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겠고 저러지도 못하겠고. 아주머니는 그래도 젊은 남자가 옆에 있으니 어떻게 해 보라는 것 같은데;

여하튼 아주머니의 힘으로 객차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니까 부담이 됐는지 그 남자도 별 일은 벌이지 않고 다시 옆 차량으로 넘어가더라구요.

숨어 있던 남자는 사람들이 나오라고 해서 일어났고... 누구길래 저러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처음 보는 사람인데 다짜고짜 칼을 들이댔다고.;

남자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완전히 당황한 표정이더군요. 마침 다음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니까 쏜살같이 바깥으로 뛰어나갔어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두번째는 폭행(?) 사건. 이것도 한 3년 전에 충무로쯤에서 밤늦게 있었던 일인데

이번엔 사람이 좀 많았어요. 그런데 문 근처에서, 갑자기 왠 남자가 여자 따귀를 막 갈기기 시작하는 거에요.

처음엔 당연히 개인적인 싸움인가보다, 근데 좀 심하네. 싶었는데 이거 뭔지, 좀 정도가 지나치더군요.

여자는 거의 악 소리도 못 낼 정도로 쉴새 없이 맞고 있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아는 사람한테 당하는 것 같이 보이진 않더라구요.

사람들이 구경만 하고 있길래; 이번에는 좀 용기를 내서 남자 손을 잡고 문으로 밀쳤죠.

아, 그런데 이 남자 눈빛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아니나 다를까 여자분은 뒤쪽에서 멍한 목소리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 그러고... 남자는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같은 것도 없이 히죽대기나 하고;

여전히 모든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있는 통에 혼자서; 지하철 문에 밀어둔 채 다음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문이 열리고 역사에 엎어져서도 한참을 혼자 끙끙대고 있었죠. 이 남자 힘이 센 편은 절대 아닌데 자꾸 여기저기를 더듬고 만지려 들어서 멈춰두기가 쉽질 않았어요.

그러던 중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웬 아저씨... "학생 비켜!" 그러더니 정말 순식간에 제압; 을 해서 역사 구석으로 걷어차 버리고는 제 손을 붙들고 달려가더라구요.

정말 무림의 고수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겠구나 싶었어요. 직원한테 신고한 후에 역 바깥으로 나와서 캔커피를 하나 사주시던데

씁쓸한 교훈 하나를 주시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더래죠. 앞으로는 그런 자리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말라고.



제가 지하철에서... 아니 서울에서 겪었던 가장 기괴한 사건 두 가지가 전부 (당사자들의 증언으로는)

"모르는 사람" 에게 당한 일이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서울의 밤거리나 지하철을 적잖이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특히 저런 일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당할 수 있다는 게 가장 무서운 것 같아요. 정말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다 해도 당장은 모른척 할걸요.

또 제 자신이 그 심리를 모르는 바도 아니라서 좀 많이 씁쓸하긴 씁쓸합니다.

의외지만 저런 일이 벌어졌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건 "아주머니들의 중얼거림" 이더군요. 뭐랄까,

여론을 환기시키고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조성하는 능력 같은 게 남달라요. 젊은 학생이나 아저씨의 중얼거림이나 호통은 그냥 분위기만 더 험악하게 만들고 마는데.;



아무튼, 혹시 지하철에서 (이런 종류의) 이상한 일 겪으신 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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