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8 11:13
Dead Ringers, 1988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데드링거'.
보신 분들 많을 것 같은데 저는 최근에야 봤습니다. 오래된 영화라 내용 다 드러내며 쓰겠습니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엘리엇, 베벌리 쌍둥이 형제 연기를 합니다. 둘은 산부인과 의사라는 같은 직업을 갖고 같은 병원 근무를 하며 한 집에 삽니다. 어릴 때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쭉 떨어지지 않고 함께 생활했어요. 그 둘은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참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엘리엇이 외향적이고 약빠른 면이 있어서 대외적인 일을 주로 맡고 베벌리는 그 반대 기질이 강합니다. 내성적이고 약하고 부드러워요. 그 둘 사이에 배우가 직업인 클레어가 등장해서 베벌리의 마음을 앗아가게 되고,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유하던 이 둘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둘의 관계에 위기가 온다는 것은 각자의 사회적 역할 수행이나 직업에까지 문제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서로 역할을 나누었긴 해도 워낙 모든 것을 공유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이인분의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거든요. 그리고 어디를 어떻게 구분하여 나눌 것인가, 라는 문제는 대외적인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 각자의 정신도, 영혼이 있다면 영혼도 혼란에 처합니다. 극심한 분리불안과 처음 당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횡포에 베벌리는 약에 의지하게 되고 더욱 상황은 악화됩니다.
엘리엇이 조금 더 똑똑할까요? 아니 엘리엇이 '베이비 브라더'라고 시종 부르는 베벌리를 조금 더 사랑하는 걸까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더 깊은 것 같이 보입니다. 엘리엇이 타인을 사랑하지 않았고 자신들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기질이라 그런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베벌리를 위해 수술대 위에 눕는 것은 엘리엇입니다. 하지만 베벌리는 엘리엇과 결별하지 못합니다.
1. 도입부에 자막과 함께 수술도구와 여성의 복부 내부구조가 그림으로 나옵니다. 음악은 매우 로맨틱한데 중세 분위기의 그림체로 태아와 자궁 그림이 나와요. 역겨울 정도는 아닙니다. 저는 특이하고 좋았습니다. 본 영화에는 여성들에게 더 위협적이고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장면이 있는 영화입니다. 산부인과라는 장소 자체부터 그러하니까요. 엘리엇과 베벌리는 어릴 때부터 여성의 신체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이 둘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세계는 이해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곳이고 둘이 함께 안전하고 완벽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2. 깊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예전에는 일란성 쌍둥이라면 남들이 자신의 고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혼동하고 심지어 이상하게 보는 것이 참 불편, 불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이가 또 있다면... 지금은 이 영화를 보며 생각한 것인데 '괜찮겠는데...'입니다. 설명 안 해도 서로 이해되는 편이고 편하며 덜 외로울 테니까요. 이제 남들 앞에서 고유성을 내세우거나 남들 눈이 중요할 시기가 아니라서일까요.
3. 엘리엇과 베벌리는 한 인물의 양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엇이 사랑의 혼란에 고통스러워 눈물, 콧물 흘리는 베벌리에게 '사랑일 리 없다. 이렇게 힘든 게 사랑일 리가 없잖아'라고 달랩니다. 하지만 그가 틀렸...겠죠? 엘리엇은 사랑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4. 실화가 있다고 합니다. 쌍둥이 부인과 의사, 약물 중독과 죽음. 이런 것이 실화일 수 있다니. '데드링거'는 꼭 닮은 사람을 뜻하는데, '트윈스' 라는 제목을 누가 이미 써버려서.
5. 제레미 아이언스의 익숙한 두 가지 모습이 완성체로 표현됩니다. 말쑥하고 냉정미 철철흐르는 모습과 찌질하고 결정장애의 불안한 모습. 팬이라면 보시면 좋을 듯.
6. 제레미 아이언스의 1인 2역은 예상된 호연이지만 클레어 역의 배우도 연기가 넘 좋았어요. 주느비에브 뷔졸드, 이분 어디서 봤더라 찾아보니 '천일의 앤' 주연 배우더군요.
2021.10.18 12:03
2021.10.18 13:22
그 도구들은 실용성 보다 장식성이 더 돋보였습니다. 장인의 솜씨더라고요.
변태같은 내용인데 실화 기반이라 해서 놀랐어요. 물론 실제 사건보다 훨씬 더 나아간 지점은 있지만요.
2021.10.18 14:39
아시겠지만 그 실화는 정말 그냥 적혀 있는 그대로, 쌍둥이 산부의과 의사 형제가 함께 죽은 채로 발견됐다. 그냥 그 정도이고 나머지는 다 순수한 창작인 걸로 알아요.
스무살 때 교내 상영회에서 처음 봤는데 그 땐 워낙 괴이하고 괴상한 이미지에 눌려 버려서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해선 거의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근래에 다시 보니 이제사 이야기가 좀 보이는데, 참 슬픈 이야기다 싶더라구요. 그 괴상 흉측함에도 불구하고 슬픈 드라마라니, 역시 변태왕 크로넨버그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ㅋㅋ
말씀대로 제레미 아이언스 팬들에겐 필수 영화구요. 양극단 대표 캐릭터를 2 in 1으로 구경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그 슈트빨이라니...
2021.10.18 15:06
근래 다시 보셨다고 해서 리뷰가 있나 찾아 보니 역시 있었네요! 그것도 제가 얼마전에 슴슴한 맛이었다 했던 데드존과 같이 올리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게시판 검색은 안 해 보고 그냥 막 써서... 검색을 습관화해서 이불킥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2021.10.18 17:15
2021.10.18 18:51
ㅎㅎ 로이배티님 댓글 때문이 아니라, 평소 기반 지식 없는 제가 영화 보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거든요.
개인적인 감상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정보는 올리면 안 될 것 같고, 또 암만 개인적인 감상이라도 균형도 없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과장하는 것도 제 끄적거린 글에서 보여서요. 어쨋든 일기장에 쓰는 것과 달리 부끄러움과 더불어 배우는 점도 있습니다.
2021.10.18 20:09
헉 저도 리뷰 썼는데... 근데 검색해보니 검색이 안되네요 앞으로 괄호표는 안써야겠습니다 -_-
2021.10.18 20:47
댓글 보고 지금 찾아 보니 있어요. 그냥 검색만 하지 마시고 옆에 계속검색을 또 누르니 나오네요. 긴 글 여러 편이라 천천히 읽어 볼게요.
2021.10.18 20:10
오 이 형제가 한 여자를 탐닉하는 게 어쩌면 자궁으로 귀향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일 수도 있겠어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이 영화는 보면서 제가 뭔지모를 아픔을 느꼈던 영화에요 심지어 이 글을 읽자마자 또 그 때의 정신적인 통증이 떠오르면서 뭔가를 또 쓰고 싶어집니다
2021.10.18 20:50
뭔가 또 쓰시면 되죠 ㅎㅎ 전에 쓰신 글이 몇 개인 거 보니 이 영화가 상당히 인상적이셨던 것 같습니다. 깊게 파신 것 같습니다.
2021.10.18 20:53
로리타라든가 마담 버터플라이라든가 데미지라든가 제레미 아이언스는 뭐랄까 사회 비주류? 권유하지않는 성관계 영화에 많이 출연하는 것 같아요.
제레미 아이언스와 크로넨버그 관계는
팀 버튼과 조니뎁의 관계같은 걸까요
비도덕적 관계를 소재로 영화를 찍은 몇몇 감독이 성범죄를 저지른걸로 아는데 크로넨버그는 아직까지 조용한거보면 그저 영화를 찍은 거겠죠.
2021.10.18 21:05
일견 냉정하게 보이는 외모에 불안한 내면을 숨기고 있는 연기를 잘 하기 때문일까요. 신경질과 냉혹함과 한없는 나약함을 동시에 보여 주는 얼굴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와 마담 버터플라이 두 편만 같이 했을 걸요?
중간에 등장하는 맞춤형 수술 도구를 보면서 "이건 전시해도 될만큼 희안한 물건이군"하고 생각했더니 진짜 갤러리 전시에 나와서 뜨아했어요. 이런 변태같은 내용을 이렇게 그럴듯한 영화로 만들다니 전성기 크로넨버그가 참 대단하긴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