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을 보고 (스포없음)

2021.09.12 10:52

Sonny 조회 수:378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58e6b59e744961d1e5cfcb4aedc92bc9ce35bda0





지금까지도 우울과 공허와 피로를 구분하기 어려운 까닭은 어린 시절의 잘못된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늦어도 6교시, 어렴풋이 세시나 네시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자유로워지고 말았다. 학원도 가야하고 숙제도 해야했지만 학창시절을 통틀어 단 한번도 책임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것들은 누군가 시키는 일이었지 내 스스로 해치워야했던 과업은 아니었다. 제도권 안에서 막 길들여지려했던 인간이 야생에 풀려나는 그 찰나의 시간은 늘 막막했다.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압박에서 풀려나는 순간 나는 해방감 대신 방황을 배웠다. 무엇을 해야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복을 입어야 하는 곳의 압력과 교복을 벗어야 하는 곳의 압력 사이의 그 틈을 나는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마음만 컸지 무력했다. 이후 야간자율학습이라는 더 없이 강력한 질서가 자리잡힌 고등학교에 가서야 그 방황은 치유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각을 엄청 자주했다.


그 시간대에는 늘 노을이 지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이른 시각이고 해가 쨍할 때도 많았겠지만 어쩐지 내 기억은 노을이라는 현상에 점령당한 채로 남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해가 떠있으니 학교가 끝나면 해도 떨어진다는 단순한 공식 때문일까.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던 그 짧은 순간들이 가라앉는 노을에 젖어 누리끼리하다. 학교에서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집에 혼자 가는 길은 유독 소음 속에서 소외되어있었다. 나를 빼놓고 차들이 어딜 가거나 교복입은 애들이 뭘 떠들면서 나를 스쳐갔다. 자각하지 못해도 감각은 나를 건드렸다. 그럴 때마다 아마 내 눈에 걸리던 건 노을일지도 몰랐다. 해가 슬슬 내려앉을 때 나는 아마 짓눌렸으리라. 무력했던 그날 하루와 별 수 없는 내일 사이에서 절망이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을테니. 청소년기에는 에너지가 폭주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 해석에 반대한다. 방황으로 터지지 못한 열정은 딱딱히 굳어 오후 언저리마다 사람을 깔아뭉갠다. 해보자! 라고 도전을 할 만한 아무 것도 못찾은 채로 나는 매번 끝이라는 실감만을 했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노을을 등에 지고, 혹은 머리에 이고 가는 그 무거운 길은 늘 철도길이었다. 우리 집은 기찻길 근처에 있었다. 걸어서 15분 20분 남짓한 거리에서 나는 늘 기차에 추월당하거나 맞닥트렸다. 그 쇳덩어리들은 나 따위를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멀리서부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괜히 긴장하곤 했다. 가끔은 반항한답시고 기차가 지나갈 때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무 말이나 떠들곤했다. 기차가 자신의 길을 휩쓸고 가면 나는 미약한 존재감을 느꼈다. 피어오르는 먼지와 다시 시작되는 작은 소음들 속에서 나는 느리고 조그마했다. 수직의 지긋한 압력과 수평의 지독한 속력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그리 저항하고 싶었을까. 집에 오면 그나마 안심했다. 맞벌이 부모가 없는 집은 잠깐동안 무한의 권력을 안겨줬다. 그러면 나는 베란다에서 또 저물어가는 해를 보았다. 그 타오르던 해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내던 해가 이제 다시 멸망했다. 빛도 소리도 나를 뒤흔들지 않는 안식이 찾아오리라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나는 세상 속에서 조금 더 당당해지고 싶었을까.


최선을 다해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잘 지나가겠지 하며 마음만 놓았다. 강이의 그 멍한 눈이, 어쩔 줄 모르고 굴욕적인 친절을 베푸는 그의 손이, 씩씩대며 소리를 지르고 바들대던 그의 몸이 나의 기억을 찌른다. 어쩌면 나도 그처럼 삐끗했을지도 모른다. 스크린 속 그의 삶들이 조각조각 나의 기억과 겹친다. 너무 외로워져버린 그에게 괜히 묻고 싶다. 이제는 그래도 괜찮냐고. 통곡을 배운 것도 성장일까. 조금 더 무뎌지고 무던해졌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어떤 기억은 상처로 남고 나는 내가 다친것 같아 괜히 움찔한다. 나는 왜 강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90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95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2358
117318 엄마의 눈으로, 아이 자랑 [8] Kaffesaurus 2021.10.03 630
117317 장 루이 바로와 빈대떡 궁합 [10] 어디로갈까 2021.10.03 598
117316 로리타 (1962) [6] catgotmy 2021.10.03 435
117315 오늘도 윤석열(내가 왕이다?) [8] 왜냐하면 2021.10.03 935
117314 넷플릭스, 최근 본 것. [4] thoma 2021.10.03 580
117313 디아블로2 레저렉션 : 당신의 게임은 무엇입니까? [4] skelington 2021.10.03 367
117312 [넷플릭스바낭] 신나는 어린이 모험 활극 '나이트북: 밤의 이야기꾼'을 봤습니다 [7] 로이배티 2021.10.02 605
117311 구티,"바르샤 감독 왜 안 됨?" [2] daviddain 2021.10.02 277
117310 오타쿠 꼰대 [19] Sonny 2021.10.02 1140
117309 [넷플릭스바낭] 예쁜 괴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강력 추천 : '아무도 살아서 나갈 수 없다'를 봤습니다 [6] 로이배티 2021.10.02 1042
117308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1961) [4] catgotmy 2021.10.02 406
117307 초바낭)글자 쓰다 [4] 그날은달 2021.10.02 370
117306 죄많은 소녀를 봤어요. [3] 왜냐하면 2021.10.02 530
117305 간만에 이런저런 잡담 [2] 메피스토 2021.10.02 401
117304 [KBS1 독립영화관] 조지아, 바람 어디서 부는지, 파출부 [2] underground 2021.10.02 333
117303 바낭 - 부산국제영화제 예매 결과...(구합니다) [1] 예상수 2021.10.01 386
117302 오징어 게임을 보고 생각난 극한의 데스 게임물 '붉은 밀실 : 금단의 임금님게임' [3] ND 2021.10.01 723
117301 바낭) 디아2 레저렉션 시작했습니다! [2] 적당히살자 2021.10.01 308
117300 슈퍼밴드2 결선1차전 [1] 영화처럼 2021.10.01 450
117299 오징어 게임 한국배우들을 무슨 애니메이션 캐릭터 취급하는 IMDb (영어 더빙배우들을 크레딧) [7] tom_of 2021.10.01 108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