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2 13:59
- 나오지 얼마 안 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호러 영화입니다. 런닝타임은 85분. 스포일러는 없을 거에요.
('아무도 살아서 나갈 수 없다'. 깔끔한 번역 제목 아닙니까. 번역하기 쉬운 원제 덕도 있지만 그래도 맘에 들어요.)
- 영화가 시작되면 가짜 기록 필름 같은 게 보입니다. 별 내용은 없지만 더 간단히 요약하면 백인들이 밀림에서 뭔 유적 같은 걸 발굴해요. 끝.
장면이 바뀌면 낡아빠진 공동 주택에 사는 젊은 여성이 가족과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통화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고, 이상한 그림자가 보이고, 수상한 상자 같은 게 나타난 후에, 죽거든요.
다시 장면이 바뀌면 진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역시 젊은 여성이고 멕시코에서 온 분인데, 한국식으로 말하면 '불법 체류' 중인 노동자에요. 오랫동안 아파서 병원에서 고생하다 떠난 엄마에 얽힌 사연이 좀 있는데. 암튼 사정이 꼬여서 본의 아니게 불법 체류 중입니다. 매우 안 좋은 환경의 의류 공장에서 일하고있고 정식 미쿡 신분증은 받을 길이 요원하구요. 암튼 이러쿵저러쿵해서 당장 지낼 곳을 찾아야 하는데, 여성전용에다가 매우 합리적인 가격의 월세 광고를 보고 룰루랄라 찾아가죠. 갔더니 거긴 무슨 '호러 영화 촬영지' 같은 팻말이 붙어 있을 것 같은... 아까 그 젊은 여성이 죽은 곳입니다. 당연하겠죠.
(맘 편히 밝게 웃는 장면이 거의 한 번도 안 나왔던 듯한 짠내 가득 주인공님...)
- 보면서 한국 영화 '도어락'이 떠올랐습니다. 내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공통점이 조금 있어요. 간단히 말하면 '혼자 사는 처지 불안정한 젊은 여성의 일상 밀착형 공포'를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네요. 그러니까 그냥 단순하게 주인공이 여성인 공포 영화가 아니라, 여성의 공포를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안 따위는 바랄 수도 없는 낡아빠진 집에 세들어 사는데, 낡은 집이라 그런 건지 실제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소리가 밤마다 들려오고, 또 그 집의 상주 관리인은 아주 수상하게 생긴 덩치 큰 남자인데 자꾸만 수상한 상황에서 수상쩍게 어슬렁거리고...
하지만 '도어락'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흑막(?)의 정체죠.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현실의 인간이 벌이는 현실 범죄물이었던 '도어락'과 달리 이 영화엔 진짜 괴물이 나옵니다. 그래서 스릴러가 아닌 본격 호러 영화가 되는 거구요.
(이렇게 생긴 집에 귀신이 안 나오면 더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 또 뭐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에게 하나의 핸디를 더 부여합니다. 불법 체류 노동자라는 거요. 이 설정은 주인공에게 더더욱 갑갑하고 암울한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 '귀신 들린 집' 스타일(진짜로 집이 귀신에 들린 건 아니거든요) 이야기에 알리바이를 제공해요. 주인공을 이 집에서 도망칠 수 없게 하고, 또 경찰 등 공권력을 개입시킬 수 없게 하는 거죠. 이 부분에서 예전에 본 넷플릭스 수작 호러였던 '그 남자의 집'이 떠올랐습니다.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이야기에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방식이 같아서요. 거기 주인공도 집에서 귀신이 출몰함에도 불구하고 영주권 때문에 떠나질 못하죠.
암튼 뭐랄까. 각본이 되게 알차게 짜여져 있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설정 하나도 허투로 대충 처리하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서 이야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써먹는 거죠.
(애초에 그냥 일상이 호러.)
이런 설정 활용의 예를 하나 더 든다면 공간적 배경입니다. 클리브랜드인데요. 뭐 특별히 자세하게 제시하진 않지만 디트로이트 쌈싸먹는 황폐한곳, 그리고 겨울에 대단히 추운 곳이라는 지역 특성 두 가지를 이야기에 적절하게 잘 녹여 넣어요. 보다보면 영화의 거의 모든 호러 장면은 주인공 사는 공동 주택에서 벌어집니다만. 바로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지역 특성 + 주인공의 신분 때문에 집을 벗어난 일상 파트 역시 상당히 긴장감을 깔고 전개됩니다. 대충 편하게 넘어가는 장면이 별로 없어요. 소 한 마리 잡아서 살 발라 먹고 연골 뽑아 먹고 뼈까지 고아서 국물 내먹는 한국인들 스피릿을 닮은 영화랄까요(...)
(호러 장면을 실질적으로 거의 담당하시는 분. 그냥 근육질 덩치 큰 대머리 아저씨지만 굉장히 위협적으로 잘 표현됐습니다.)
- 호러 효과로 말하자면 뭐 그냥 특별히 튀는 것 없이 모범적.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두컴컴 칙칙 황폐한 귀신 나오는 집 영화들에 들어가야할 호러 아이디어들이 모두 모범적으로 펼쳐지구요. 리듬감이나 센스가 충분히 좋아서 볼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매우매우 훌륭한 크리쳐 디자인이 있습니다. 대애충 에일리언 짭, 대애충 갑각류, 대애충... 이런 식으로 때우는 경우가 99%는 되는 듯한 요즘 크리쳐물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훌륭한 디자인이에요. 제목에도 적어 놓았지만 신기하고 개성 넘치며 간지나게 생긴 괴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꼭 보셔야 합니다. ㅋㅋ 덧붙여서 '리추얼: 숲 속에 있다'도 꼭 보세요.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지만 같은 원작자의 작품으로 만든 거라는데, 그렇담 아마 원작자의 공이겠죠. 어쨌거나 정말 보기 드물게 잘뽑힌 비주얼의 괴물님이십니다. ㅋㅋㅋ
(괴물짤은 직접 보시라고 생략하고 대신 올리는 흔한 귀신님 사진.)
- 재밌지만 대체로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던 이야기에 막판에 방점을 찍어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자세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하나는 주인공이 계속해서 꾸는 엄마에 대한 꿈. 그리고 또 하나는 지하실 괴물의 식성이었어요. 둘 다 제가 예상하지 못 했던 방식으로 활용되면서 막판에 소소한 반전 같은 느낌을 심어주는데요. 그게 또 영화의 주제(?)와 적절하게 맞물리는 게 좋았네요. 위에서 했던 말의 반복이지만, 정말 얼핏 보면 별 거 없으면서 되게 알차게, 설정 하나하나를 아주 보람차게 써먹는 이야기였어요. 원작자님이 훌륭한 분이신 듯!!
- 그래서 결론은 뭐. 대충 간단합니다.
호러 영화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보세요. 취향 따라 느끼는 재미의 강도는 다르지만 최소한 재미 없고 별로였다고 느끼실 분은 많지 않을 듯 싶습니다.
여성 중심 스토리의 영화들을 즐겨 보시는 분들도 한 번 보실만 합니다. 심한 고어 장면처럼 크게 거부감 들 부분은 별로 없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괴물님의 자태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으신 분들은 나중에 '리추얼: 숲 속에 있다'도 한 번 챙겨보세요. 그 영화에도 전혀 다른 디자인이지만 비슷한 수준으로 멋진 크리쳐님이 나오십니다. ㅋㅋㅋ
그러합니다.
+ 비교적 인간적인 역할의 빌런 아저씨가 계속 눈에 익다 싶었는데. '오자크'의 그 멍청이 형제 중 한 명이었군요. ㅋㅋㅋㅋ 덩치 크고 살벌한 느낌이면서도 가만 보면 순둥순둥한 느낌이 진하게 묻어나는 분이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비슷한 캐릭터에요.
++ 삼촌... 의심해서 미안합니다. ㅠㅜ
+++ 그러니까 시세보다 너무 싼 매물은 의심을 해봐야하는 겁니다. 음. 정말 교훈적인 영화였네요.
2021.10.02 14:55
2021.10.02 15:45
요즘 이렇게 알찬 저예산 호러들이 적잖게 등장하는 것 같아 즐겁습니다. 넷플릭스 덕도 꽤 되는 것 같구요.
저도 마지막 부분에서 음? 뭐지 이건 환상인가? 하다가 문득 깨닫고 무릎을 탁... 까진 아니어도 조금 감탄했습니다. ㅋㅋ 그걸 그렇게 뒤집을 줄이야.
크리쳐님 정말 짱 멋지시구요. 등장이 짧아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짧게 나왔으니 그 임팩트가 유지된 거겠죠.
오자크 마지막 시즌이 곧 나올 거라고 알고 있는데 얼른 나왔으면 좋겠어요. 사실 대단한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얼른 끝을 보고 싶네요. ㅋㅋㅋ
2021.10.02 16:14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저 여주가 활짝 웃는 장면이 하나 나오는데요, 친구에게 사기 당하는 장면. 저도 주인공처럼 이게 사기인지 모르고 너무 좋아서 이제 좀 숨통이 트이는구나 했는데, 감독님이 사람 마음 쥐락펴락:(
넵, 오작의 그 분. 전형적인 레드넥처럼 생겼는데, 어딘가 얼굴에서 연약한 심성이 보여 이상하게 맘이 안쓰러운 배우에요. 여기서도 그런 역할을 아주 잘해주셔서. 배우들의 질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 영화.
넵, 저도 그 클라이맥스 반전 부분, 저 괴물은 진짜 괴물이더군요.
'리츄얼' 제 호러 탑3 중 하나 입니다 :) 반갑습니다
2021.10.02 21:52
네 거기서 활짝 웃긴 했죠. 근데 전 반대로 '응. 사기 당하고 아예 그 집에 결박당하는구나' 싶어서 웃는 게 웃는 걸로 안 보이더라구요(...)
대체로 거의 본 적이 없는 배우들이었는데 영화 보고 나서 배우들 출연작 찾아보다가 그 엄마역 배우가 일본도 들고 날뛰고 기관포 난사하는 짤을 발견하고 혼자 웃었습니다. ㅋㅋㅋ 젊으셨을 때 액션 좀 찍으신 분인가 봐요. 이 영화에선 병상에서 다 죽어가는 모습만 나와서 괜히 웃겼네요.
괴물님 마지막에 멋지셨죠. 알고보니 괴물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그냥 남자들이 나쁜 거였던... 하하.
2021.10.02 23:21
제가 주말내내 할 일이 있어서 본다고 해도 다음 주에야 넷플릭스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직 못 보고 하긴 한데 검색해 본 결과같은 걸 볼 때 이게 셜리 잭슨의 <힐 하우스의 유령> 원작 소설 본령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스티븐 킹도 그 소설의 전통을 이은 거기도 하고요. 플래나간은 거기다가 스티븐 킹을 끼얹은 모양인데 저는 가족 이야기가 짜증나서 꼭 이렇게 밖에 생각 못 해내나 싶더라고요. 어쩃든 셜리 잭슨의 소설과 로버트 와이즈 각색영화 좋게 본 입장에서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저 스티븐 킹 밑에 쓰신 이유로 안 좋아합니다,읽은 거라고는 <샤이닝>,<캐리>밖에 없고요. Richard Matheson의 단편집이 더 좋아요.
2021.10.06 13:46
그러고보니 오프닝이 그랬었죠. 저는 왜 그 젊은 여성이 나오는 씬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했을까요. 바로 그저께 봤는데 ㅎㅎ 그냥 불법 체류자의 생활 밀착형 스토리로만 밀고 나갔어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귀신들린 집 소재에 완벽하게 조합시켜서 메타포적인 면으로도 그렇고 1시간 20여분에 정말 알차고 효과적으로 만든 것 같아요. 저예산 호러물로서 100점 만점을 줘도 오바스럽지 않다고나 할까
저는 저 반전을 처음에는 반전으로 이해를 못했어요. 그냥 초현실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이 뭔가를 극복해나가는 상징적인 장면인줄... 그러다가 영문 위키에서 플롯 읽다가 아 그게 그걸 뜻하는 거였어? 하고 뒤늦게 놀라버린;;;;
제목 참 잘 지었어요. 영화를 함축하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딱 맞아떨어지고 오자크 그 형제는 보자마자 반갑더군요. 대머리 아저씨도 강렬했는데 마지막 크리쳐가 진짜 디자인도 그렇고 움직임이나 희생자를 처리하는 방식까지 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