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잃어버린 영화 - <피닉스>

2021.07.30 00:02

Sonny 조회 수:575

6cef55e4fe5f332d666c5f59f0182245.jpg


자기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피닉스>라는 영화를 그렇게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몇년 전 영자원에서 <피닉스>를 틀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할 확률이 극히 적고 이번 영자원 상영이 마지막일 수 있으니 꼭 보라고 누군가 추천을 해서 보러 갔었죠. 듀나님이 이 영화를 참으로 바람직한 복수의 사례로 뽑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도 기억이 나고 해서 보러갔었습니다. 그런데 영자원 가는 길에 너무 뛰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전날 잠을 못자서 그랬는지 영화를 보다가 한 이십분만에 잠들어버렸습니다. 영화가 아주 동적이고 사건이 터지는 영화도 아니어서 그랬겠습니다만.


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넬리와 조니가 딱 만나게 되는 지점에서 잠들었습니다. 이제 막 사건이 진행될려는 찰나에 잠이 든거죠. 순간순간 눈을 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와있었습니다. 조니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넬리는 서성이면서 노래를 부를 준비를 하고 있더군요.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게 무슨 장면인지 아실 겁니다. 정말이지 영화의 도우 한복판과 토핑들은 싹 흘리고 빵조가리 도우끄트머리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말 장면만 보게 되었습니다. 비밀에 도달하기 위한 미로를 뛰어넘어서 출입구에 도달해버렸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어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니 감흥을 느끼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보면서 하염없이 아 그때 이렇게 했었구나, 사실은 이렇게 된거였구나, 하고 흘린 영화조각들을 주워먹는 기분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놀라고 소름돋아야할 그 장면에서 너무나 평온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저는 그 결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이제 바로 그 장면이야, 그 둘이 마침내 진실을 밝히는 시간... 저 자신에게 스포일러를 당하면서 참으로 속이 상했습니다. 제가 영자원 GV에서 어느 평론가님한테 잘난 척 하듯이 떠들었던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딱 한번, 아직 보지 않은 채 처음으로 그 영화를 마주하게 되는 그 시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첫대면을 망치면 두번 세번 봐도 감동이란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이 걸작을 그렇게 흘리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그래도 그 흘렸던 부분들을 기가 막혀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쓸 거리는 많이 있는 영화니까요.


이제 공부하듯이 뜯어볼 것밖에 남지 않았어도, 교훈을 삼아서 다른 영화들은 놓치지 않으려 해야죠. 세상에는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고 내가 네 애비이고 절름발이가 어쩌구 저쩌구라는 걸 알아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 나면 끝나버리는 비밀과 달린 <피닉스>에는 여전히 감미로운 음성이 떠돌고 있습니다. 

Speak low, when you speak lov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73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7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454
116664 K-사회생활, K-사회화. [8] 적당히살자 2021.08.04 721
116663 듀나in - 수학을 다시 배워보고 싶습니다 [6] 예상수 2021.08.04 532
116662 더위를 날려버릴 오싹한 사진 [13] bubble 2021.08.04 958
116661 jrpg에 대해 [5] catgotmy 2021.08.04 469
116660 아주 볼만한 사진들 가끔영화 2021.08.04 2531
116659 점심시간에 본 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이야기 [12] 부기우기 2021.08.04 469
116658 [뉴스링크] '피해자답지 않다' 무고 몰아가는 검찰 [9] 나보코프 2021.08.04 622
116657 감사 노트(가지가지합니다) [3] thoma 2021.08.04 338
116656 대체육. 콩고기 상품 추천해주실만한게 있을까요? [6] 한동안익명 2021.08.04 394
116655 [바낭] 여자 배구 보시는 분은 없겠죠 ㅋㅋ [109] 로이배티 2021.08.04 937
116654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4] 조성용 2021.08.04 569
116653 이런저런 잡담...(여행) [1] 여은성 2021.08.04 282
116652 윤석열 캠프측에서 페미발언에 대해 빠른 해명을 하셨네요. [16] Lunagazer 2021.08.03 1087
116651 심심한 외모 바낭 [2] thoma 2021.08.03 480
116650 직장 동료 남자분과 얘기하다가 외 얘기 1가지 [6] 채찬 2021.08.03 676
116649 [국회방송 명화극장] 세 가지 색 - 화이트 [5] underground 2021.08.03 485
116648 [넷플릭스바낭] 패기 넘치는 제목의 이탈리안 호러, '클래식 호러 스토리'를 봤습니다 [8] 로이배티 2021.08.03 556
116647 요즘 최고의 블랙 코미디 [3] 가끔영화 2021.08.03 634
116646 블랙 위도우를 보고 생각난 배우 드립 [1] 남산교장 2021.08.03 372
116645 [게임바낭] 근래에 한 게임 셋 소감입니다 [6] 로이배티 2021.08.03 40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