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이후로 서울에서 유학생활(...)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그런지 1년에 한두 번 집에 내려갈 때마다

참 소소한 일상인데도 생각할 거리나 특이한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개중에 하나. 

(저의 이런 글들이 늘 그렇듯 또 평어체입니다. 이게 좀 더 표현하기 자유롭네요.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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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의 추석. 집 안에서 입고 편하게 돌아다닐 요랑으로 농구바지 하나를 들고 내려갔는데, 

그 반바지를 세탁기에 빨았더니 그만 허리에 꿰어 둔 허리끈이 허리춤 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무슨 소린지 아시죠)


"옴마, 문제가 한 가지 생깄소."



"믄데?"


"이기 이리 됐삣다꼬. 난감하네."


"뭐 그거, 고마 살살 끼아면(끼우면) 되지. 일로 주봐라."



- 철푸덕 -



"문디 손아! 일단 말리갖고 주야지!"


"엄마가 먼저 돌라캤음시로요!"



....어쨌든 일단 빨래대에 널었다가 뽀송뽀송하게 잘 말려서 갖다드렸더니, 반짇고리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낸다. 

뭔가 쇠로 된 뭉툭한 막대기 내지는 굵은 바늘같이 생겨서, 딱 보니까 바지에 허릿줄 끼우기에는 기똥차게 생겼다.

"이기(이게) 느그 외할매가 옛날에 육이오 때 들에서 주워온 기라 카데. 

뭐 옛날 총 안에 드가는 기라 카든가... 그 방아쇠 땡기는 공이치기인가 뭔가...."



"이거 꼬질대네. 에무왕(M1) 꼬질대"


"꼬질대가 머꼬? 느 할매는 그거 총 부속이라 카든데"


"그기 아이고요... 총 부속은 아니고. 와, 총 쏘고 나서 끄시른다 아입니꺼. 그거 나중에 전부 다 분해해갖고

지름칠 해가 딲아야 되는데 그 끄시름(그을음) 닦을 때 쓰는 지다랗게(길다랗게) 생긴 꼬챙이 있거덩. 

거 있는 구멍 고따가 메리야쓰 조각 같은거 낑가갖고 팍팍 쑤시가 닦는다 아잉교. 그거 끄트머리 부품 그거."


"긍가. 내사 몰긋다. 뭐 어쨌든 억시로 오래 되기는 됐지... 내 학교댕길 때부터 있었응께네"

....이 얘기를 나중에 밀리터리 오타쿠 형이 운영하는 게시판에 가서 써 놨더니 

그 형은 자기네 할매집 똥바가지 하이바 얘기를 덧글로 달아 주어 놓았다. 

(*하이바 = fiber. 철모 위에 덧대어 쓰는, 강화 섬유로 된 헬멧. 총탄은 못막아도 포탄 파편은 막음)

그 얘기 듣고 생각해보니 우리 외할매 집 똥바가지 뿐만 아니라 대암리 동네에서 

똥장군하고 같이 들고댕기는 바가지가 전신에 만신에 전부 미군 하이바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하기사, 내가 살던 함안군부터 창원시 진전면 일대까지 그 부분이 낙동강 최후방어선이었다. 

진동에서 진북 쪽으로 야트막한 고개 지나가다 보면 국군 전적비 하나가 서 있고, 거기가 제일 전투가 치열했다.

동네 사람들도 그 때 몰려온 인민군들한테 인민재판이다 뭐다 해서 많이 죽었다고 했다. 국민학교 안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처형대였다. 총알 맞은 옹이구멍 흔적도 있다는데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여튼 그렇게 내 어릴 적만 해도 한날 한시에 제사 지내는 집이 몇 군데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동네 밑에 신창리나 서촌리 일대는 북한이나 인민군 김일성 하면 이를 벅벅 가는 할배들이랑 

한 팔 한 다리가 없는 상이용사 할배들도 많다. (아직 살아계시나 모르겠다. 아마 지금은 북망산 가셨겠지.)


지금이야 중국 가서 북한 사람도 보고 (그들은 하나같이 '예'라는 말을 '여'에 가깝게 발음한다...) 조선족 동포도 보고

얘기도 나누고, 북한 냉면도 먹고 하는 세상이니 참 세월이 훌쩍 지나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구나 싶다.


내가 그 카빈 꼬질대 끄트머리를 봤을 때만 해도 전쟁의 세월이 이렇게 지났구나, 하며 

신탄리의 녹슨 철마를 떠올렸었다.이제 세월이 지나갔구나, 다른 세기가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초 천안함이 공격당하고 북괴군한테 내가 알던 사람이 어이없이 죽어버리니까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미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다시 옛날에 우리 윗세대가 겪었던

그 치열한 대립을 다시 계속해야 하는가. 과거로 돌리기엔 영속적이고, 예전처럼 대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혼란스럽다.



어쨌든그 M1 카빈 꼬질대 끄트머리는 이제 엉뚱하게도 여염집네 반짇고리에서 

반 세기가 넘도록, 탄약의 그을음 대신 내 팬티 고무줄을 꿰고 있는 중이다. 

그게 평화가 아닐까 싶은데, 우리 집은 몰라도 우리 나라는 아직 좀 요원한 얘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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