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를 보고. (내용있음)

2021.09.23 17:23

잔인한오후 조회 수:484

추선 특선으로 틀어주는걸 온 가족과 함께 봤네요. 그러다보니 초반 10분을 까먹었는데, 오프닝을 놓쳐 중요한 암시 몇몇을 놓치지 않았나 싶고요. ( 먼저 본 동생 말로는 그 곳으로 이사하는 걸로 시작하고 별 것 안 나온다는데, 음. ) 제가 보기 시작한 곳은, 어떤 연기가 나오는 굴뚝을 지긋이 바라보는 씬이었습니다. 숫컷은 맛도 없고, 알도 낳지 않으니 제거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였죠. 한 30초만 더 늦게 틀었더라도 이 대화를 놓쳤을텐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대화와 대비되는 대화는 당연히 미나리를 심을 곳을 고르는 장면이었습니다. 미나리는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먹을 수 있고, 어떻게 먹어도 맛있고, 어디서든 자란다고 하니까요. 안그래도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선별되는 병아리 묘사를 들은 저로서는, 채식과 육식의 대비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를 이루는 몇몇 대비들이 느린 템포를 타고 흐르면서 뭐라 말하기 힘든 분위기를 만드는데,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운 애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지 설명하기 힘들다는 점에서도 비슷했고, 투박하게 감자 캐내듯 대비되는 것들만을 집어내어봐야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보면서 가끔씩 울컥울컥했는데,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 아이를 안고 '천당 안 봐도 된다'고 말하며 가로막는 (재우는) 할머니 씬이었습니다. 어떤 오컬트적인 경로로 이 가족의 행복이 와해되는 듯한 과정에서 어떻게 그를 해석하고 결과로의 경로를 도출할 것이냐는 질문에, 천국과 지옥이 갈리고 선별되는 문화와, 이것 저것 무엇이든 상관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문화가 격돌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뒷부분에서 할머니가 쓰러져 놀랐는데, 그런 식으로 결말을 준비해나갈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여러가지 문제를 병렬적으로 제시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붕괴, 농장의 활로, 기갈 그리고 뛸 수 없는 아이. 각각의 문제가 엎치락뒤치락 하며 서로를 키웠다 줄였다 긴장을 이어나가다 마지막에 각자의 방향으로 맺어지는 결말을 설명하기 힘든 심경으로 목격했습니다. 누가 이기고 지는 식으로 끝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무엇이 어떻게 맞다 같은 소리를 할 수 없게 맺은 결말이기에 말이죠. 특히 '힘들어질 때는 갈라서자는 뜻인가 싶어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남편 상황을, 자신이 '힘들어진 남편(가족)에게서 갈라서버릴 수 없는' 아내로의 언행 불일치를 견딜 수 없게 이전하는 것이 감탄스러웠습니다.


가족과 보느라 딴청을 부리며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는데, 꽤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아버지는 개신교가 그려지는 폼이 못 마땅해서 계속 투덜거리시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저게 다 대본이야. 대본이니까 저렇게 따를 수 밖에 없어'하며 감당하기 힘든 재난을 메타 탈출하였고, 어머니는 거리를 두고 감정이입하면서 즐거웠다 안타까웠다 했네요. 나오는 이름들이 폴(바울)과 다윗에다 뱀도 나오고 이것저것 노골적으로 나오기도 하니 기독교적 해석도 이것저것 할 수 있겠지만 그리 끌리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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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봤던 미국 영화들 중 주역들에 백인 남성이 없을 경우, 주관적 관찰자들을 위해 이런 저런 사람들을 배치하는 걸 가끔 보는데, 내심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는 잡혀온 개그 캐릭터로 내려왔고 (역설적으로 보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변환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나리]에서는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는 폴이 있는데 어떤 관점으로 영화를 봤을지. ([그레이트 월]은 초대받은 자들의 느낌이 강할 것이고, 같이 두기 뭐하지만 [디워]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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