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생님에 대한 기억.

2010.10.18 01:12

01410 조회 수:3080

최근 어째 머릿속에 자물통이라도 삭아떨어진 듯 계속 옛날 얘기만 꺼내게 됩니다.

옛날 얘기래봤자 제 나이가 별로 많지도 않으니 (진짜에요, 이번에 오프에서 보신 분 중에
저보고 40대후반인줄 알았다는 망-_-언을 하신 분이 계신데 대단히 황망(?)했습니다) 
거슬러올라가 봐야 기껏 88올림픽 전후부터 10여년 전 IMF 때 즈음밖에 안 되긴 하지만,
정신과 과목에 관심있는 지인 한놈에 따르면 "정신이 살푼 맛이 가는 놈의 초기증상 하나로
방어기제를 퇴행으로 쓰는 놈이 있고 그 새끼가 커서 된게 바로 너다!" 라는 망언을 하던데,

요즘 옛날얘기 많이 쓰는 거 보니까 그게 진짜로 맞는 소리 같아서 저으기 무섭기는 합니다....
....마는, 이왕 생각난 김에 써 봅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하 평어체, 양해의 말씀을 삼가 구하옵.


______________________


올해도 어김없이 갑자기 쌀쌀해지는 때가 왔다. 
기상청 홈페이지에 표시된 디지털 수은주는 14.3도를 가리키고 있다.
옴마야 얼어죽겠네, 하고 한 벌 있는 검은색 가을 반코트를 꺼내어 보니 꼬깃꼬깃한 게 자알 우그러져 있다. 
다림질할 생각까지는 없고 그냥 툭툭 털고 있자니 이맘때의 기억이 옷주름마냥 꾸깃꾸깃 되살아난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하, 입시의 계절이 왔다.'

기억은 1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5년 1월 어느 날 조선일보 사설란 중단의 제목이 "혹한 입시 피하려면"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혹독한 글쓰기 연습에 시달리면서 스크랩했던 것들이라 잘 지워지지 않는 문구다.
혹한 입시, 라는 그 제목은 보라색의 200자 원고지 뭉치와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 볼펜 뚜껍과 함께 
머리 속에 시각화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몇 년 후 나는 그것들을 무기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길을 거쳐서 똑같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옆에 있는 놈 대가리를 찍어누르며 
세상은 전쟁이라는 것을 생애 맨 처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 첫 전투에서 패배했다. 내 밑에 깔린 
시신도 많았고 나 또한 주검이었다. 내 위를 밟고 올라선 자들도 많았다. 그 수직선의 어디선가쯤에
내가 있었고 나는 현실을 무력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응시한 대학마다 면접에서 깽판을 놓았다.) 
몸도 마음도 춥기만 한 계절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이다. 날은 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햇살은 구름 속에 스러지지만 여전히 대기는 살을 에는 듯 추울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늦게 온 사춘기의 대가를 톡톡히 치루던 그 시절을 떠올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생각이 난다.
나는 내 회색 뇌세포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옛 은사의 얼굴을 고이 펴낸다. 
그 사람으로부터 얻은 게 많다. 첫 쓴맛에 비뚤어지기 전, 그가 장난처럼 던져놓은 화두를 
대학생이 되어 하나하나 곱씹으며 재발견하고 내 정신세계 재구축에 큰 일익을 맡았던 그를. 기억한다.


송ㅇㅇ 선생님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명물 국어교사로 이름났었다. 이름 자체도 도 모 유명 배우와 같았지만. 
그는 쉬는 시간에 항상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했고, 우리는 그를 약간 기인 취급하면서도 흔쾌히 깍두기로 끼워 넣었다.
 30대 중후반답지 않게 그는 상당히 드리블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지금 입시생들도 저 이름을 대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교 독서평설'이라는 
꽤 유명한 수험생용 언어영역 잡지 비스무레한 곳에 매달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에게 [송뽀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 뽀대라는 것은 비까뻔쩍하다는 뜻이 아니라
'뻥'이 중부경남 사투리로 변한 것이다. 아마도 95년 쯤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저 양반이 뽀대쟁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결코 수업시간에 진도를 빼지 않았다. 
어차피 공부는 사교육, 그 양반 표현을 빌리자면 애비 에미 고혈을 학원 계좌에 다 처넣으며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집에 열두시 반에 기어들어가면서 다 하는 거니까 - 그 시간에 그는 공교육이 가르쳐야 할 가이드라인(진도)만
준수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지식의 퍼포먼스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마치 양주동 같은 옛 교수들마냥.

전장에서 16세 전후의 소년병이 무서운 것은, 그래서 국제협약으로 이를 강력히 제한하는 것은
그들이 너무 순수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말인즉슨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성 가치관을 보수적으로 섭취하고 맹목적으로 변하여 그 결과 제일 잔인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는 그런 우리들의 속성을 간파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 '지식의 향연' 시간에 그는 가끔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 발언을 자주 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왜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생각하냐?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라고 생각하면 네놈들은 헛배운 거다.]
[이상이 천재라고 생각하냐? 임화의 "비내리는 요꼬하마의 부두"를 낭송해 보면 생각이 바뀔 걸?]
[컵라면을 먹어도 반드시 그릇에 부어서 먹도록. 그것이 인텔리겐치아가 지켜야 할 습속이다.]
같인 요상한 얘기들.

(그의 어록 중 생각나는 말들이 저것 밖에 없어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나의 기억 속 편린들에만 의존하여 뒤지다 보니 그를 얼핏 고루한 학자타입 샌님처럼 만들어놓지만, 
그는 오히려 내가 묘사한 이미지의 대학강단의 교수라기보다는, 흡사 도올 선생같은 카리스마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같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함께 풍겼다. 오해가 없도록 덧붙여 둔다.)

사실 그 때 고등학교 동창들은 연대 사태를 일으킨 한총련은 전부 정신병자들인 줄 알았던 게 사실이다. 
KBS의 카메라는 항상 신촌로터리의 철시한 상인이 매상 떨어진다고 징징대는 소리만 찍어 보여주었다. 
대학교 앞, 최루탄이 바로 발밑에 떨어진 중학교 동창은 다음 날 얼굴이 퉁퉁 부어 등교했다. 그리고
그 몰골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도관 관장님은 다음 날 대학생 시위대 지나가는 머리 위에다 
걸레 빤 양동이를 부어버렸다. 6월항쟁 때 시위대한테 빵하고 우유를 던져주던 양반이 김영삼이 당선되고
영변위기가 터지자 마자 분위기가 그리 변했다.

그런 환경에서 송 선생님은 책에도 방송에도 안 나오던, 아무도 안 하던 이야기를 꾸준히 재미있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소위 좌익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의식화된 리버럴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진보주의자들은 PC통신의 플라자와 대학 울타리 밖으로 나와 본 적이 없었다.
아도르노와 마르크스는 대학 와서 봤다. 학생에게 헤겔은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누군지도 몰랐다.
학생들은 소위 문,사,철의 지식이란 게 순전히 논술입시용으로만 맞춰진 중등교육 현장을 살아 왔던 것이다.

좌우간 우리는 그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 조는 놈이 한 놈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항상 쉬는 시간이 돌아오면 
수업시간의 백일몽에서 깨고,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 그의 설법을
그저 허풍, 즉 [뽀대]라고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송뽀대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였다.

대학 와서 세간의 존경과 명성을 손에 쥔 내노라하는 석학들이, 그가 말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발언들을 하는 바람에 때늦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던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의 어록 중 한 가지가 더 생각난다. 수학능력시험을 1주일 앞두고 다들 정석 책 두권
(베고 자기 딱 알맞은 높이. 아는 사람은 알리라)에 쓸린 볼을 얼얼하게 붙잡고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쉬는 시간은 끝나 국어시간이 되었고, 최후의 수업을 시작한 송선생은 여전히 그 날도 
축 처진 게슴츠러운 눈에 약간 맹한 목소리, 괴짜 인텔리스러운 특이하고 담담한 화법으로 
우리의 상식에 약간 궤가 틀어지는 소리를 남겼다.


"프랑스의 대학 입시는 [바깔로레아]라고 하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으로 결정된다. 
그들은 (실제로 이런 화법을 썼다) 바깔로레아에 응시하여야만 하며, 이 시험은 
너희들이 겪는 입시처럼 상당히 어려운 게 사실이다. (경상도식 성조가 계이름을 친다. 레미미레.)
그리고 그 치들은 여기에 합격 못 하면 대학은커녕 졸업도 못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찍기식 오지선다와는 달리 전부 [논술형]이다. 
시험은 이틀에 걸쳐 치루어지기 때문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기도 한다꼬. 
오픈 케이스로 치기 때문에 노트를 참고할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

"에-이"

"어이어이, 사기라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 양반들은 채점의 기준이 우리처럼
무언가 팩트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이해했나가 아니라, 그 팩트를 기준으로 
어떤 오피니언을 내는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다.(여전히 계이름. 레라미레도미레)

하여간, 근데 갸들은, '나 바깔로레아 보러 간다' 카면 우리처럼 무슨 소 도살장에 집어넣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험 전날 자신이 국민학교, 꼴레쥐(중학교다이), 리쎄(이거는 고등학교), 이 과정 동안
배운 모든 것을 마음껏 뽐낼 수 있다고 '기뻐하며' (말하다가 잠깐 숨 쉬고) 집으로 돌아간다. 
느그의 상식에는 상당히 어긋나는 소리겠지만, 사실이다.

내 생각에는 지구 반대편의 느그놈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성세대가 너희들에게 주입하는 귀에 딱지앉은 소리 
'인생이 결정되는 관문이다'라는 소리는 지금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라. 

너희들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너희들의 소리를 엿같은 어른들에게 카운터 펀치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우중충한 얼굴은 집어치워라. (여기서부터 다분히 연극조로)
여기 기회가 왔음에, 왜 네놈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이냐?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가라. 
그리고 대학 입시 포기한 놈은 백지내고 나와도 괜찮다. 
어쨌거나 절대 비굴해지지 마라. 벌써부터 시스템의 노예가 된 것처럼
인상 구기지 말고 그 얼굴 다리미로 칵 문떄버리기 전에 활짝 펴라. 
네놈들은 어차피 내일부터 자유 아니냐?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하나라도 더 작살내서 승자가 돼라. 

그게 싫다면 아예 이 길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느그는 이미 
인문계 고등학교 들어온 이상, 네놈들에겐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일단 내일의 기회는 소중하게 사용한 뒤에 그 이후의 내일을 결정하란 말이다. 
알았냐?"

"예-에"

"그럼 이만 수업 끝.
아 그리고 ㅇㅇ아, 느그 공고 아들하고 일욜날 축구 붙는다면서? 지면 쪽이다. 알았나?"

"샘요 글마들 그거는 조빱들이라서 괘안심니더"
"꼭 글카다가 나중에 연장전서 골묵고 질질 짜삿제"

(*생각해보니 장모군은 인문계가 아니라 자연계 반이었다. 그러므로 말한 대상이 걔일 리가 없는데... 
그럼 누구한테 말한 거였지? 축구 좋아하는 놈이면... 딩요었나? 털털이었나? 가물가물한다. 
하여튼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보내는 맨 마지막 말 마무리는 저 내용이었다.)


워낙 오래 된 기억이라 선명하진 않고 어쩌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가 그 수능 전날 했던 말은, 진학시스템에 몸담고 있는 전직 '노이에 링케 인텔리겐치아'의 현란한 궤변인지, 
아니면 교사로서 학생을 아끼는 진정한 마음 속의 우러남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송뽀대 선생의 저 말 한 마디는 이후 암울했던 1년 동안의 혹독한 나날 속에서도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마디처럼 숨쉬었다는 사실이다. 오 선장, 나의 선장님아.

그리고 난생 처음 옆 도시까지 넘어가서 수능시험을 봤다. 
마지막 제2외국어영역 때는 그 반의 응시생 전부가 이미 다 풀어버린 문제지 너머로 
시험 감독관과 61년생 늙수그레한 수험생 하나가 종료 벨이 울릴 때까지
세상 돌아가는 심원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내가 우리 딸내미하고 같이 시험을 치가지고... 부끄럽심더"
"멕지로 그래삿지 마이소. 배우는 데 때가 있습니꺼?"


수능이 끝난 이후. 학교생활은 축구와 비디오의 연속이었다. 

매직으로 Nice와 Reebook을 그려넣은 체육복이 넘쳐났다. 
마치 전문 거리예술가가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우 현상학적인 마이클 조던과 호나우두, 
히바우두, 호마리우(그때는 로마리오라고 했다) 등의 얼굴이 그려졌다.
선생들도 수능 이후에는 그러한 일탈에 웬만해서는 터치하지 않았다. 

급기야 무료해진 우리들은 멀쩡한 철제 사물함과 1인치 두께의 강력한 합판으로 된 책상을 
문자 그대로 "아작내기"시작했다. 특히 별명이 '무라다(일본 액션게임에 나오는 파계승. 
이미지상 노지심과 동의어)'인 놈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강제징용 십장처럼 생긴 외모답게 
수도 한 방으로 금을 가게 하고, 세 방으로 완전히 책상을 두 쪼가리 내어버렸다.
(그걸 보면서 팔에 힘을 준 것만으로 교복을 조끼로 만들어버리던 중3시절의 권모군이 생각났다. 
어딜 가나 수험 이후의 수험생놈들은 똑같은 짓을 하나보다).

그 때, 때를 맞춰 - 우리 학교 선배라고 말로만 들었던 - 고 천상병 시인의 생애를 그린
'귀천'이라는 연극의 단체 관람이 우리 학교에도 (당연히?) 돌아오게 되었다. 
거기 프로그램 속지에 써 놓은 설명에 의하면 - 브레히트적인 기법에, 악곡적 기법을 가미하여 
동양 관객(즉 말초적 엔터테인먼트만 밝히는)들의 구미에 맞게 형상화한 연극이라고 했다.
이재상 연출가는 이를 '신극'이라는 이름으로 팸플릿에 소개했다. 
(물론 한 부에 2천원 하는 팸플릿을 우리는 "사기다 씁새들"이라며 아무도 사지 않았고, 
다만 로비에 있는 것을 슬쩍 훔쳐 와서 돌려서 본 후 지금도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막이 올라가기 전의 암전, 갑자기 한 줄기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오른쪽을 비추었다. 
악동들도 다들 조용해지고 목울대를 꿀꺽 울린 후 그 곳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 나타난 사람 그림자 둘을 자세히 보니 하나는 이재상 연출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송선생님이었다. 우리는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송 뽀 대! (헤이) 송 뽀 대! (짝)"

(그 때 제일 인기있던 아이돌이 HOT였는데, 걔들이 단체로 M여고에 왔어도
그 정도의 대 환호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장담할 수 있다.)

연출가의 간단한 얘기를 들은 후, 송선생은 마이크를 잡고 
예의 그 어눌하고 담담한 말로 우리에게 간단한(?) 지시사항을 말했다.

"에... 여러분들은 아마도 이러한 연극의 무대를 처음 접하리라 생각되는데, 촌놈들아! 
앞으로 여러분들도 대학에 진학하거나 하면 이런 예술의 무대를 접하게 될 것이다. 
지성인이 되면서 이런 기회는 늘어날 것이고, 가령 여자 꼬셔서 대학로에 에쿠우스 보러 갔는데
거기서 삐삐 핸드폰 매너없이 울려대면 가스나가 빠말쌔기 때리고 달아난다. 
그러니 공연은 즐겁게, 그러나 조용히 매너있게 즐기도록. 알았나?"

"예-에" (굵은 중저음. MBC공개홀에서 들으니 돌비 서라운드 칠점일 효과.)

"그리고, 이 이야기는 여러분들의 선배이자 한국이 낳은 천재 시인 중 하나인 
고 천상병 님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다. 너희들 선배 이야기니까 그 앞에서 
침을 택 뱉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알겠냐?"

"예-에"

좌석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이후 아무도 졸거나 떠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라기보다는, 그 연극이 워낙 잘 만들어진 공연이기도 해서, 전부 넋이 나가 있다가 
공연이 끝나고 이 촌동네 시꺼먼 고딩들은 난생 처음 받는 문화충격에 기립박수를 쳐댔다.
커튼 콜을 3회 연호할 정도였다. 어떤 놈은 로비에서 꽃다발을 사 와서 무대 위로 난입하더니
꽃다발을 마치 중세 기사가 공주에게 청혼하듯 여자 주연 배우에게 무릎꿇고 건네기도 했다. 
나 또한 그 이후에 여러 재미있고 가슴 울리는 연극을 많이 봤었지만, 그 연극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동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그리고 며칠 후 교무실에서 타자 치고 있을 때, 어떤 기품있는 중년의 부인이 교장실에 왔다 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바로 고 천상병님의 부인이신 (얼마 전에 타계한) 목순옥 여사였다. 담탱이였는지 R6선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좌우간 누군가를 통해 들은 그의 우리 학교 방문 목적은, 우리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흘 동안 이 소도시에서 남편을 추억하기 위한 공연에 힘을 쏟았습니다만 
귀교처럼 공연매너를 잘 지켜준 청소년 관중은 없었습니다. 남편이 하늘에서
후배들 보고 좋아할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랬다는데, 뭐 영독 이 선생이 허언은 안 하는 인물이니까 잘못 듣진 않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학교건 저 학교건 얄개들은 얄개들이고, 순전히 그건 '송뽀대' 선생님의 공이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는지 잘 모르겠지만
(천리안 아이디를 자신이 원하던 songs로 만들어주지 못했더니 화를 냈다)
나에게 그는 어떤 '세계' 로 건너가는 문을 열어 준 멘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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