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22:24
- 2016년작에 런닝 타임은 1시간 58분. 장르는... 아트하우스 호러/스릴러라고 해둘까요. ㅋㅋ 스포일러는 없을 겁니다.
(이 포스터 이미지에 꽂히셨다면, 영화를 보셔도 좋습니다. 아... 사실 그렇진 않은데.)
- 첫 장면은 뭔가 되게 인공적인 세트 느낌의 럭셔리 소파 위에 정말 곱게 차려 입고 목을 베인 엘 패닝이 피를 철철 흘리며 굳은 듯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메이크업과 조명빨로 사람이 아니라 마네킨 느낌이 드는 가운데... 왠 남자가 그걸 열심히 찍고 있어요. 컷이 넘어가면 멀쩡한 엘 패닝이 분장실에서 가짜 피를 벅벅 닦고 있고. 그걸 지켜보다 닦는 걸 도와주는 상냥한 분장사 지나 말론과 통성명을 하네요.
이곳은 LA일 겁니다. 엘 패닝은 갓 상경한 시골 처녀이구요. 사고(?)로 부모님을 다 잃고 살다가 공부도 자기 갈 길이 아닌 것 같고. 기럭지 좋고 얼굴 예쁘니 모델 꿈이나 이뤄보겠다고 가능한 돈 박박 긁어 모아 LA로 와서 싸구려 모텔에 묵으며 모델 에이전시를 돌며 구직 활동 중이에요. 그리고...
뭐 당연히 금방 기회를 잡고 승승장구 하겠죠. 그러면서 패션계의 음험한 변태들과 인연을 맺고 또 비교적 순수한 LA 총각에게 도움도 받고 갈등도 겪고 그러면서... 뭐 그런 얘깁니다.
(그러니까 이게 첫 장면인데, 포스터 이미지랑 중복이라는 걸 올리면서야 깨달아서 후회하며 그냥 올립니다. ㅋㅋ)
- 굉장히 고전적이고 흔한 스토리라인이지만 비교적 요즘(?) 영화들 중에 퍼득 떠오르는 건 '쇼걸'입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대도시로 진출한 시골 처녀! 알고 보니 타고난 재능 뿜뿜!! 위험한 도시인들의 유혹!!! 과연 주인공은 타락할 것인가 승리할 것인가, 아님 뭐 어떻게든 될 것인가!!!?
근데 이렇게 스토리는 대단히 비슷하다 쳐도 영화의 톤은 전혀 다릅니다. 일단 '쇼걸'처럼 볼거리를 막 던져주지 않아요. 뭔가 막 화려한 패션쇼가 자꾸 나오고 멋진 모델들이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워킹을 선보이고 이런 게 막 나오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잖아요? 안 나옵니다. 제작비가 정말 얼마 안 들었다고도 하지만 애초에 감독이 그런 거 찍고 싶어했을 것 같지도 않구요.
(Strike a Pose!!)
또 쇼걸처럼 그렇게 흥겹거나 자극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말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단 1분 1초도 흥겹거나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으시다면 이걸 보시면 됩니다. 스토리상 분명 주인공이 행복해하고 있어야할 전개가 없는 건 아닌데, 그걸 그렇게 안 보여줘요. 시종일관 어둠, 칙칙, 가라앉음.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뭣보다도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이야기에 무슨 디테일이란 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에 말 했듯이 굉장히 원형적인 이야기잖아요. 그렇담 이런 뼈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당연히 자신만의 디테일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부족하다'가 맞는 표현이겠지만 그래도 '없다' 쪽이 좀 더 적절한 설명 같아요. 그나마 존재하는 디테일들이 죄다 의미가 없거든요.
- 그렇담 도대체 뭘 하고 싶은 영화인가... 는 저도 모르죠. 근데 그냥 제 느낌엔 이렇습니다. 이야기 디테일 같은 거 다 걷어 치우고 시각 이미지 만으로 뭔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보다보면 자꾸만 뭔가 중요한 일이 터져야할 것 같은 순간에 영문 모를 형이상학적 이미지들이 신나게 펼쳐지거든요. 또 뭐 별 중요하지 않은 장면들도 화면 구도나 색감, 소품 디테일 같은 데 되게 신경을 쓴 티를 팍팍 내구요.
근데 전 예쁘고 특이한 이미지를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면서도... 그걸 분석하고 의미 부여하고 이런 건 잘 하지도 못하고 사실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 그냥 '그림은 예쁜데 이야기는 극단적으로 앙상한 영화'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습니다. ㅋㅋ
솔직히 뭐 그리 대단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을 거란 생각도 안 들어요. 왜냐면 엔딩 부분에서 갑자기 되게 노골적인 풍자 & 은유가 팍 튀어나오거든요. 근데 그게 참 당혹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이어서, 이걸 보면 그동안 내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간 그 수많은 장면들도 사실 별 건 아니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형이상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뭔가가 막 느껴지십니까!!? 원본 없는 복제, 다다이즘, 아방가르드!! 전 사실 이게 뭔지 하나도 모릅니다!!)
- 더 길게 적으면서 제 무식을 바닥까지 드러내어 뽐내고 싶진 않아서 대충 마무리하겠습니다.
엘 패닝을 몹시 사랑하시고, 그래서 두 시간짜리 영상 화보라도 기꺼이 보겠다! 는 분들은 보세요.
그냥 독특하고 예쁜 그림을 잔뜩 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거의 없어도 상관 없다! 는 분들도 한 번 보실만 합니다.
그 외엔 뭐... 글쎄요. 개인적으론 괴작 매니아 분들에게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인데, 이 영화는 특별히 괴작이라기보단 그냥 예쁜 그림에만 집착한 허술한 영화라고 느꼈거든요. 충격적이라던 결말도 뭐 거의 '양반전'의 그 유명한 대사 있잖아요. "지금 나를 도둑놈을 만들 셈이요!!!" 딱 이 정도 수준의 풍자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네요. 그나마 양반전은 조선시대 소설이기라도 하지(...)
(근데 사실 그나마 엘 패닝이 이렇게 간지나게 나오는 장면도 별로 없습니...)
+ 키아누 리브즈가 나오죠. 그냥 나오기만 합니다. ㅋㅋㅋ '이 양반이 여기 왜, 어쩌다가 나오게 됐을까?'라는 망상이 영화보다 더 재밌었네요. 근데 뭐 키아누 아저씨는 워낙 쌩뚱 맞은 영화에 쌩뚱 맞은 역할로 뜬금 없이 잘 나오던 사람이라.
++ 극중 인물들, 특히 '거물' 역할 인물들의 대사로 계속해서 엘 패닝 캐릭터의 압도적인 스펙을 찬양하는 대사들이 나와서 좀 난감했습니다. 아니 엘 패닝 예쁘죠. 기럭지도 좋구요. 하지만 이 영화는 패션 모델 업계가 배경인 것인데요. 그쪽으로 그리 잘 맞는 비주얼은 아니지 않나 싶었네요.
+++ 마지막엔 꽤 불쾌하고 끔찍한 장면, 이미지들이 몇 번 나오긴 합니다. 근데 영화 비주얼과 분위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극단적일 정도로 인공적이어서 그게 그렇게 불편하게 와닿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두 번 정도 피식. 하고 웃었습니다(...)
++++ 이거랑 뭔가 비슷한 느낌으로 난해하고 독특한 이미지가 난무하는 영화 하나가 계속 생각나더라구요. 스칼렛 요한슨이 나온 '언더 더 스킨'이 살짝 비슷한 느낌이 있는 영화였는데. 그건 친절하게 설명을 안 해줘서 그렇지 멀쩡한 스토리가 있는 영화였고 그 괴이한 이미지들도 다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고 그랬죠. 심지어 그 쪽은 재미도 있었으니 비교는 하지 않는 걸로. ㅋㅋㅋ
+++++ 사실 원탑 주인공인 엘 패닝은 캐릭터가 넘나 얄팍해서 뭐 연기할 거리도 없었던 것 같구요.
등장 인물들 중에 그나마 뭐라도 보여준 사람은 지나 말론이 유일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다른 영화에서 좀 더 멀쩡한 역으로 만났으면 하는 느낌. 이 영화 찍으면서는 좀 불필요하게 고생한 것 같아요. ㅋㅋ
2021.07.25 22:33
2021.07.25 22:50
특별 출연(근데 정말 딱 그만큼 나옵니다. 심지어 역할도 아무 의미 없는. ㅋㅋ)이라도 좋으시다면 한 번 보세요. 하하.
근데 블랙스완과 비교되었다니... 이 영화에 비하면 블랙스완은 매우 친절하고 장르적인 스릴러 무비 수준이에요. ㅠㅜ
2021.07.25 22:37
2021.07.25 22:50
충성도가 높은 팬이시군요!! 하하하. 사실 전 언니가 아기 때 그렇게 좋아하질 않아서...
2021.07.26 00:07
언더 더 스킨은 걸작이라 생각하고, 시각적으로도 매력 + 충격적인 면도 있는데, 본문의 영화는 그냥 껍데기만 있는 그런 류의 영화인지 별로 기억나는 게 없어요.
전 드라이브 인생 영화 중 하나여서, 저 감독의 후속작들을 많이 기대했었는데, 죄다 네온 데몬스럽더군요. 덴마크에서 만들었던 이전 영화들도 그렇고 그냥 드라이브가 갑툭튀한 영화였던 듯.
최근 TV 드라마 한 편도 만드셨는데, 이것도 시각적으로 탁월한데 뭔 소린지 모를 건조함으로 가득하고 결국 후속 시즌은 캔슬되었고요.
근데 감독이 난독증에 색약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는데, 그래서 저런 영화들이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2021.07.26 11:32
맞아요. 언더 더 스킨은 그냥 특이하단 얘기만 듣고 본 영화였는데 다 보고 되게 만족했거든요. 이 영화는 뭐 남는 게 없네요.
드라이브는 정말 괜찮았죠. 근데 퀄리티를 떠나서 느낌 자체가 워낙 달라서 같은 사람 영화 같지가 않아요. ㅋㅋ 알고보면 이 감독도 고용 감독으로 남이 갈궈줘야 제대로 능력이 발휘되는 타잎일지도요.
색약은 모르겠지만 난독이라... 글 읽는 게 힘들어서 스토리 없는 영화를 추구하는 걸까요.
2021.07.26 00:59
이 감독이 할리우드에도 유명세를 떨치게 된 드라이브는 그나마 본인의 개성과 적절한 이야기가 잘 어우러졌던 것 같은데 그게 뽀록이었는지 바로 라이언 고슬링이랑 같이했던 차기작 온리 갓 포기브스랑 이거까지 보고나니 이 감독 영화는 그냥 스킵해야겠다 이런 수준까지 왔습니다. 드라이브는 OST도 샀고 아직도 간혹 생각나면 보는 작품인데....
지나 말론이 연기한 캐릭터가 그나마 좀 낫다는 평에 동의합니다만 하필 이분이 제일 거시기한 씬에도 나오시는 바람에;;;
차라리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 중에 덴마크 영화 <더 모델>이라는 작품을 추천해드립니다. 어쩌다 우연히 봤는데 훨씬 나았어요. 시리즈온에서 1200원에 볼 수 있군요.
엘르 패닝은 작품을 많이 하기도 하지만 참 험한 배역에 많이 도전하는 것 같아요. 언니가 아역배우로 한창 각광받던 도중 청소년 정도로 크고나서 처음으로 베드씬이었나 성폭행 당하는 씬이 있는 영화를 찍고 화제가 됐던 기억이 나는데 동생은 또 그런 거 찍었구나... 이런 반응? ㅋ
2021.07.26 15:04
믿고 스킵이라니... 심각한 결정이지만 네온 데몬 느낌으론 존중하고 싶네요. ㅋㅋㅋ 정말 뭐 좋은 걸 못 찾겠어요.
엘 패닝 출연작들 대충 보면 본인이 좀 마이너한 영화, 그리고 빡센(?) 역할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해마다 서너편씩 부지런히 계속 찍으려다 보니 그런 영화들도 자주 걸리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 정말 해마다 필모가 꽉꽉 차 있네요.
추천작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감사해요!
2021.07.27 23:00
엘 패닝은 다른 의미에서 보면 필모가 진짜 다채롭습니다. 디즈니 공주 이미지인데 절대 거기에 안갇혀있죠... 저는 <네온 데몬>을 그래서 좋아하는 것도 있어요 엘 패닝이 자기 한몸 불살라가며 찍어줘서 ㅋ 그리고 본인도 이미지에 고정되어있는 걸 깨고싶어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2021.07.26 01:53
2021.07.26 15:04
확실히 눈에 들어오는 장면들은 있었습니다. 그게 거의 다라는 느낌이어서 문제... ㅋㅋ
2021.07.26 09:30
2021.07.26 15:06
'잔뜩 화가 났습니다.' ㅋㅋㅋㅋ
근데 뭐 여성 혐오 같은 얘길 꺼내기도 난감할 정도로 이야기가 실체가 없어서요. 화는 안 나고 그냥 '음... 그랬구나. 이런 영화였구나' 이러고 말았습니다 전.
큰 화면으로 보면 건질만한 장면들은 있었던 것 같긴 해요. 다른 영화들에선 잘 안 쓰는 촬영 기법 같은 걸 즐겨 쓰는 것 같더라구요.
2021.07.26 12:14
2021.07.26 15:07
취향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ㅋㅋㅋ
그래도 보고 나서 화는 내지 않았으니 용서해주세요. 하하.
2021.07.26 15:26
드라이브는 좋았는데... 사실 그 영화도 뭔가 아슬아슬한 기괴함이 있었어요. 어느 정도 선에서 이야기와 잘 어우러지니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게 된 건 음악 영향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2021.07.26 16:51
맞아요. 사실 '드라이브' 보면서 이건 액션 영화인데 왜 이리 공포 영화 같지. 왜 이리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같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봤습니다. ㅋㅋㅋ 음악도 좋았죠. 나중에 비슷한 소재로 밝고 가볍게 나온 게 '베이비 드라이버' 아닌가 싶었네요.
2021.07.26 20:01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 / 음악 감독 콤비에요. 니콜라스 윈딩 레픈 & 클리프 마르티네즈... <온리 갓 포기브스>도 음악은 너무 좋았습니다 ㅠ
https://www.youtube.com/watch?v=4n6c339dsgs
클리프 마르티네즈가 작곡한 건 아니고 다른 사람 음악을 영화에 픽한 건데, 이 장면에 나오는 긴장감과 리듬감은 정말 끝내줍니다
2021.07.26 21:55
덕분에 잘 들었습니다. 이분의 영화에서는 음악 역할이 큰 것 같네요. 장면이 그려지는 느낌입니다.
2021.07.27 08:53
드라이브 정도되는 영화 만들었으면 된거죠 뭐 ㅋㅋ 아마존에서도 투 올드 투 다이 영이라는 빈딩레픈스러운 제목의 시리즈를 만들었는데...몇 에피 보다가 접었습니다. 시리즈도 아마 캔슬되었을 거예요.
2021.07.27 12:59
맞죠. 그 정도로 평도 좋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 하나 남겼으면 된 거긴 한데... 그 후로 내놓는 영화들이 다 똑같이 악평이라 좀. ㅋㅋ 세상 예술가들 중엔 누군가 옆에서 적당히 갈궈줘야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키아누 리브스가 특별 출연(?)한다니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