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장애인을 한꺼번에 모욕하기

2021.07.14 00:01

Sonny 조회 수:1101

옛날 유재석이 진행하던 엑스맨이란 프로그램에 '당연하지'란 게임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마주서서 대꾸하기 어려울 정도로 웃기거나 기막힌 말을 해서 '당연하지!'란 대꾸를 못하게 하는 게 이 게임의 기본적인 룰입니다. 이 게임은 서있는 두 사람이 치열하게 디스를 주고 받으면서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싸우는 것은 자기 앞에 선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의 패배를 인정해줄 심판, 유재석 혹은 관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하지 게임을 하면 유재석을 포함한 모든 관중은 두 사람이 서로 헐뜯고 공격하는 걸 편한 자리에서 여유롭게 즐기게 됩니다.


"여성과 장애인 중 누가 더 사회적 약자일까요?"


특정 집단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보상이나 지원이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합리함을 설득하기 위해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의 약자성을 소환해서 줄세우기를 한다는 것은 오로지 비당사자에게만 가능한 특별한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여성과 장애인 중 누가 "더" 사회적 약자인지를 왜 겨뤄야합니까? 그 어떤 사회적 약자도 자신보다 더 한 약자도 어떤 권리를 취한다면서 그에 대한 억울함을 설파하지 않습니다. 모두에게 보장되는 보편적 권리를 어떤 이유만으로 자신 혹은 몇몇 사람들만이 받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면서 "우리 자신의" 불합리한 약자성을 이야기하죠. 이 질문의 대답이 어느 쪽으로 나오든 여성과 장애인 모두에게 모욕이 됩니다. 여성과 장애인이 더 약한 사회적 존재의 자리를 두고 다퉈서, 그 자리를 여성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닌 비장애인 남성이라는 강자에게 인정받는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례하고 모욕적인 질문인지는 국가적 참사의 생존자들을 저 자리에 넣어보면 됩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이라면 단지 성별이 '여성'이란 이유로 장애인보다 여성을 더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여성이 아닌 나'로서의 박탈감이나 피해의식을 이야기했다면 차라리 그 안에 있는 울분이라도 이해할 건덕지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성도 장애인도 아닌 비당사자가, 오로지 여성이 받는 수혜를 깎아내리는 결과만이 존재하는 이 논증을 펼친다는 것에서 저는 화자에게 모종의 전능감마저 느낍니다. 여성과 장애인의 약자성은 서로 대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약자성과 장애인의 약자성이 충돌하는 경우 여성의 권리가 어떤 식으로 장애인의 권리보다 더 침해받을 때가 있는지 여성장애인과 남성비장애인, 남성장애인과 여성비장애인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적 사례들을 이야기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논의를 할 때조차도 그 논의의 목적이 "최약자여성"의 위치를 탈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상에서 아주 쉽게 약자의 위치로 전락해버리는 여성을 두고서도 시혜적인 시선 안에서 또 다른 약자에게 무시당하는 그 약자성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였죠.


저 논증에 따르면 일반적인 상식으로 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임을 인정할 때 여성의 "장애인보다는 덜한" 약자입니다. 장애인의 사회적 정체성은 여성의 사회적 정체성을 부정하기 위한 하나의 완벽한 수단이 됩니다. 그 논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장애인의 약자성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거의 제일 불쌍한 사람

"의 위치를 비장애인 남성에게 대여당한 뒤 장애인으로서 처해있는 그 어떤 사회적 불합리나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도 듣지 못합니다. 그 어떤 사회적 약자도 이 논증 안에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딱 하나 바꿀 수 있는 것은 비장애인 남성이 느끼는 불쾌감이 해소되느냐 마느냐입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약자성을 부정하기 위한 이 논증 안에서 여성의 약자성은 자본주의적이거나 사회적인 강자성을 뒤에 업고 장애인 혹은 남성이라는 사회적 존재에게 가상으로 압승을 거두며 불행배틀에서 또 한번 패배합니다.


누군가를 이해하지 않기 위해 강제로 이해당하는데 쓰이는 약자성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절대적 권력은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거리감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 누구도 이해할 필요 없이 어렴풋이 보이는 약자성을 줄세우기를 하며 쌓아올리는 객관성이라는 게 참 섬뜩하네요. 제가 괜히 모멸감을 느끼는 밤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그 어떤 약자도 다른 약자와 불행을 경쟁하며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로 불평등에 의한 부조리를 겪고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에게 심사위원자격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잘 모를 뿐이죠. 


@ 당연하다 생각되는 사회적 합의가 흔들릴 때마다 이렇게 방어적으로, 역공을 위해 글을 쓰는 것도 피곤합니다. 이 게시판의 노화가 더 가속화되었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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