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비오고요

2021.08.31 13:37

어디로갈까 조회 수:543

비내리는 하늘을 비껴 보며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 따뜻함이 오전의 업무가 가져다준 쓸쓸한 흥분을 달래줄 것 같다는 기대를 갖습니다. 기대는 항상 간단히 충족되는 법이죠. 창밖에서 흰 깃털과 검은 깃털이 엉터리로 디자인된 새들이 낮게 날고 있는 모습이 보여요. 비의 비릿한 냄새를 맡은 저 최종 진화물은 지구의 기류를 느끼는 중인 것이겠죠. 생각이 아니라 느낌을 걸어 개체가 세계와 접속하여 만든 '연합환경'에 처해 있는 것일 테고요.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며 또 맥주 한잔을 기울입니다. 

내리는 비를 떳떳하게 맞고 있는 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인데, 인간은 새의 감각을 알 수 없습니다.  타인의 감각도 알 수 없는데, 이종의 최종 진화물의 감각을 구할 수가 있겠나요.  비행기는 인간에게 성가신 대체물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탈 때마다 하곤 해요.
저는 아직까지 새의 감각을 날카롭게 묘파하기 위해 촉을 세운 언어를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런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이 불가능한 감각에 얹혀 있는 세들의 환경적 선율은 인간인 저로서는 내내 부러울 뿐입니다. 
각성한다는 것은 결국 새의 감각에 가닿는 것일 텐데. 고작해야 휘파람을 불거나 까마귀에게 주술을 걸거나 참새들에게 사랑을 뿌리는 정도입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죠.

인간의 의식, 이것은 우주의 초의식으로 점프하기 위해 준비된 전능한 작인의 옵션이라는 것이 아서 클라크의 주장이었습니다. 생명은 '연합환경' 속에서 새의 감각으로 저 하늘을 하늘답게 풀어놓는 것이 지구의 논리지만, 우주의 논리는 그 불완전한 인간에게 의식이라는 성가신 부대현상이 마치 양자도약처럼 치명적인 이동을 위한 플랫폼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전두엽도 공격하고 뇌량도 절단해왔던 인간의 해부학 교실은 저질적이었지만, 어쨌든 의식이란 것이 왜 포스트휴먼에서도, 아니 포스트휴먼에 이르러서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며 장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그 소리를 흐뭇하게 듣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21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348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876
117256 오징어 게임 6편을 보고 사팍 2021.09.27 407
117255 넷플릭스 '어둠속의 미사' 감상 - 노스포 [10] Diotima 2021.09.27 1438
117254 화천대유는 누구것인가?(니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뭐야?) [8] 왜냐하면 2021.09.27 822
117253 [아마존바낭] 니콜 키드먼과 쟁쟁한 친구들의 '아홉명의 완벽한 타인들'을 다 봤습니다 [12] 로이배티 2021.09.27 643
117252 리차드 도스킨의 우생학, 주디스 버틀러의 불법이지 않은 근친상간 [10] 사팍 2021.09.27 839
117251 후배들에게 일장 연설한 후 [5] 어디로갈까 2021.09.27 622
117250 넷플릭스, 두 편의 복수극 [4] thoma 2021.09.27 549
117249 <축구> 오늘은 이 사람 생일입니다 [4] daviddain 2021.09.27 259
117248 오징어 게임 5편을 보고 사팍 2021.09.27 296
117247 Eiichi Yamamoto 1940-2021 R.I.P. [1] 조성용 2021.09.27 400
117246 왜 조용한가? [23] 사팍 2021.09.27 973
117245 디아블로2 레저렉션을 잠깐 해보고 [4] catgotmy 2021.09.27 304
117244 게시판에 넘쳐나던 머저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3] 도야지 2021.09.27 1041
117243 소월을 감상함 [6] 어디로갈까 2021.09.27 432
117242 오징어 게임 4회를 보고... 사팍 2021.09.26 630
117241 오징어게임 다 보고 많이 울었어요. 안녕이젠 2021.09.26 754
117240 축구 중계 - 다가오는 더비 [6] daviddain 2021.09.26 232
117239 진중권의 정의 [3] 사팍 2021.09.26 654
117238 오징어 게임 3화를 보고 사팍 2021.09.26 379
117237 베팅 사회(세팅 사회?) [9] thoma 2021.09.26 43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