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리는 게임

2021.07.30 21:33

Sonny 조회 수:583

2002년 월드컵. 개최국인 대한민국은 16진출을 이뤄냈지만 8강진출을 앞두고 최악의 적인 이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딱히 승기가 보이지 않던 상황,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며 대한민국 국민들은 스스로 다독였죠. 뭔가 일어날지도 몰라. 그 소원은 너무나 빠른 기회로 찾아옵니다. 전반전 5분, 설기현이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여기서 1점을 넣으면 이탈리아라도 한국의 홈그라운드에서는 발목을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라운드의 테리우스,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날렸고 그가 쏘아올린 공은 이탈리아의 골키퍼 앞에 맥없이 막힙니다. 그리고 전반 18분, 비에리의 선제골이 터지면서 한국은 휘청거립니다. 에이 역시 되기는 뭐가 돼. 당시 학교 강당에서 이 경기를 보던 저희는 전부다 교실로 들어가 보라고 선생님들께 떠밀렸습니다. 저희들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궁상 떨고 초라해질려고 모인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말하면 입아프죠. 88분에 터진 설기현의 동점골, 그리고 연장전에서 터진 안정환의 역전헤딩골. 저는 그날 안정환이 헤딩골을 넣자마자 정말 친구랑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그렇게 벅차올랐나봅니다. 그건 승부의 개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기도가 이루어진 느낌에 더 가까웠죠.


제가 좋아하는 스타크래프트1 게임리그에서 정말 대단한 결승전 게임이 있습니다. 당시 내노라하는 강자들을 모두 꺾어버리고 정말로 세상을 자신의 판으로 만들어버린, 그래서 "본좌"라는 단어를 유행을 시켜버린 게이머가 있습니다. (지금 단발좌 꼬북좌 그러는 게 다 그 때의 본좌 유행의 파생어입니다) 그는 마재윤이란 게이머였는데 정말이지 단 한명도, 누구라면 그래도 모른다는 그 모든 도전자와 라이벌 내정자들을 싸그리 이겨버렸습니다. 그의 종족은 저그였는데, 저그란 종족은 원래 태생적으로 프로토스라는 종족에게 대단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안그래도 잘하는 저그 마재윤이 프로토스에게 진다? 말이 안되는 일이었죠. 그래서 신예 프로토스 김택용이 결승전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다들 김택용을 걱정했습니다. 


3:0 마재윤 승 - 당연한 결과... 

3:1 마재윤 승 - 와 김택용 장난 아니네? 한판을 이겼다고? 

3:2 마재윤 승 - 김택용은 프로토스의 본좌다 앞으로 그를 받들어모시자


예상 선택지가 딱 여기까지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 스코어는 아무도 생각을 안했습니다. 장난하지 말라고 했고, 기분나빠했습니다. 1+1=3이라는 걸 우기는 정도의 헛소리로 취급받았죠. 그리고 김택용은 마재윤 입장에서 0:3 패배, 셧아웃을 시켜버리면서 모든 사람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렸습니다. 오죽하면 그 게임을 보던 김동수는 두번째 경기를 그렇게 말했죠. 이건 김택용이 최절정의 기량을 갖추고 엄청난 연습을 하고 와도 두번 하라면 못할 게임이다, 이건 하늘이 내린 게임이다...


전 그 때의 게임을 그렇게 기억합니다. 그렇게 약소 종족으로 짓밟혀오던 프로토스란 종족의 한이 모여서 김택용으로 집대성이 된 거라고. 염원이 뭉치면 모든 데이터와 수학적 예상을 박살내버리는 그런 게임이 나오죠. 그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사후적으로, 그럴만했다면서 천천히 납득하게 되죠. 어저면 그 비논리적인 감성은 인간이 이해를 위해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인지도 모릅니다.


전 오늘밤 저를 제외한 9명의 사람들과 승부를 벌였습니다. 한명 한명, 차례차례 자신의 사다리를 탔죠. 누가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임의 승자는 우승상품에 그렇게 강한 애착과 욕망을 불태우던 분이었습니다. 사다리게임에 무슨 실력이 있고 논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다리를 타고 타고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들이 꽝이 나오고 그 분이 빨간색으로 색칠된 그 상품에 도착했을 때, 다들 그냥 박수를 쳤습니다. 이게 맞다. 이게 순리다. 어쩌면 그 분이 평상시 늘 이야기했던 그 특정 상품에 대한 일상적인 소망과 집착조차도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요. 하늘이 그를 골랐다고밖에는... 그처럼 그 상품에 성실하고 매일같이 탐닉하고 흐뭇해하던 사람은 또 없었으니까요. 


게임이란 건, 시합이라는 건 결국 자신과 하늘 사이의 종교적인 소통일지도 모르죠. 하늘이 내리는 게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다싶이, 말도 안되게 최후의 승자가 되며 다른 모든 이들을 박수치게 하는 그런 경합이 있습니다. 그 분이 차지한 영광을 되새기면서 다시 한번 인간의 겸허함을 숙고합니다. 진인사대천명... 자신감이나 배짱보다 더 앞서는 것은 그저 얼마나 원하고 원망하는지 그것만을 매일 되풀이하며 지치지 않는 것일뿐인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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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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