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걱정은 누가 해줘?

2014.06.26 17:19

Koudelka 조회 수:4410

  뒤죽박죽 두서없는, 빵가루 같이 부스러진 제 멘탈로 쓰는 오랜만의 근황입니다. 욕설은 아니지만 다소 불편한 이야기나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밤운동 끝나고 집에 가는 골목이 유독 어두워졌습니다. 처음엔 잘 모르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집 앞의 카페와 레스토랑이 원래보다 한 시간 앞당겨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고양이와 함께 한 이후 운동 가는 시간이 자꾸 늦어져 언제부턴가 저녁 9시 다 되거나 넘어서 부랴부랴 갔다가 운동만 하고 헬스장 문 닫는 시간, 직원들 생각해서 샤워도 못하고 오는 날들이 많아졌지요. 그런데 그 1시간의 차이가 제 운동 후 귀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 늦게 안 거죠. 한동안은 정말 온 고샅에 귀기가 서려있는 듯 해서 덜덜 떨면서 집에 온 적도 있습니다. 사실 이 증상의 시작은 벌써 두 달 반이 넘어가도록 수색 작업도 종결 안 되고 있는, 세월호 사고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 그 와중에 이미 한참 지난 유영철 사건의 다큐를 우연찮게 다시 보면서 절정에 달하게 되지요. 유영철 사건 당시에 비할 바 아닌 충격과 공포를 뒤늦게야 체험하고 밤새 불을 켜놓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날들이 두 달 되어가네요. 꼭 그것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는 제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 고질적인 습벽들, 사소해 보이지만 곧 전체를 갉아먹을 것 같은 잠재적 복병들 같은 게, 정말 타인에 비해 병적일 만큼 수면과다임에도 스스로는 늘 만성수면부족인 저를 더욱 깊은 잠 못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기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아니면 기가 허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기 센 사람이라기 보다는 강한 사람으로 드센 사람이기 보다는 당당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이 한끗을 늘 인식하고 살던 저는 요즘 너무 많은 무섬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심지어는 15년 넘게 끊었던 교회를 다시 나가볼까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어요.


  사실 이 모든 약함의 정점에는, 뒷북처럼 말하게 되는 영화 '한공주' 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저는 한공주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영화관람을 후회하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이색경험을 했습니다. 원래 피 튀기는 고어물은 잘 못보는 편이지만, 이보다 더 끔찍하고 노골적인 영화들 볼 만큼 봤다고 생각하는데(강간, 성폭력, 살인이 하도 난무해서 어느 순간 감흥도 없어져 버리는) 왜 하필 이 영화를 보고나서 저는 그렇게 괴로웠는지, 그 유명한 실화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라서 그런가 자꾸 생각해 봐도 저는 이 영화를 통해 하나의 지독한 트라우마를 얻게 되었어요.


  그냥 즉물적으로 말하면... 남성중심 상위체위로 일관하는 피스톤 운동에 대한 혐오 같은 거, 그 섹스에 동반되는 남자의 신음소리 또는 뭐라 낮게 지껄이거나 독백하는 듯한 말도 음성도 아닌 짐승의 소리.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단지 남성위주의 성체위가 아닌데 뭐라 더 점잖게 표현할 길이 없군요. 이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반으로 하면 관능적인 게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소재고 뭐고 다 떠나서 저는 눈앞이 하얘지면서 토할 것 같았어요. 이 영화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세간의 시선이 어떻고 저떻고 의식이나 불편한 감정 같은 걸 말하는 것도 저에겐 사치일 만큼,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면서, 정말 죄송하게도 저는 극장 안에 있는 모든 남자분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잔혹한 소년들의 시기를 비슷하게 지났거나 아직도 잠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으니까요. 그 소년들 지금 다 자라서 대학다니고 취직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한 사람 있을 텐데, 세월호 사고로 온 나라가 침통한 때 어딘가 조문을 다녀올 정도의 양식을 가진 남자어른으로 자랐을 수도 있는 건데, 본인들 스스로는 그 악마 같은 경험을 다 잊을 수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건 사람 새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차가운 물속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 소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가도 어스름한 저녁 귀가길에 대여섯 명의 교복입은 남학생들이 다가오는 것만 봐도 숨이 턱 막히는 이 모순적인 감정은 어디 가서 말도 못했죠.       


  평범한 일상의 일례로, 얼마 전 운동 마치고 오는 길엔 이미 10시면 영업이 끝난 대형 중국식당의 큰 마당에서 누군가 제 앞에 기습적으로 뛰어나오더군요. 그걸 목격하는 순간 저는 야구모자 밑으로 드러난 연쇄살인범의 눈빛이 자동적으로 떠올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겠더군요. 그 남자는 정말 자기 용무 마치고 나온 레스토랑 직원이 아닐까 하는 일상적 출몰이 아닌, 어둠 속에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나온 계획적 출몰이라고 밖엔 저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거기,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가득했을 카페와 레스토랑들로 운치 있던 그 길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어두운 골목일 뿐 그 짧은 2~3분 사이에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호흡을 깊게 고르고 최대한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갈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걷는 남자의 보폭과 속도를 의식하면서, 그 남자가 뒤에 오는 나를 의식하다가 돌연 멈칫할 때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어디서 전화가 온 양 빈 전화기를 붙잡고 '여보세요?', 그게 얼마나 얕은 수인지 알면서도. 때마침 빨간 비상등을 깜빡이며 순찰을 도는 경찰차가 골목으로 들어와 저는, 무사했습니다. 남자는 원래 길 가던 사람처럼 골목을 빠져나가더군요.  그 시간 겨우 밤 10시 45분. 늘 오버 타임으로 퇴근해야 하는 고된 직장일을 마치고 집에 와 약간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고양이 수발을 들어 준 후 하루를 마무리 짓는 순서로 다녀온 밤운동의 귀가길, 이 소박한 일상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오는 그 시간이 그리 과한 시간인가요? 아니면 하필 제가 그때 운이 나빴거나, 아니면 운이 좋아 이렇게 듀게에 글줄이나 올리고 있는 것인지.  모르죠, 그 남자는 정말 아무 의도없는, 저와 일면식은 없지만 평범한 동네 아저씨 였을 뿐인지. "그래서 그 남자가 당신한테 아무짓도 안 했잖아?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피해망상에 젖어서 그 남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아?" 일부 질타의 목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듯도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제 직감은 범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지역적 특색과 이유로 이 동네의 철통 치안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지 않았고, 때로 저녁이나 술자리 약속이 있는 날은 그보다도 더 늦게도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시절이 불과 몇 달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저는 밤 10시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변해버리는 이 동네가 많이 무서워졌습니다.


  어쩌면 이런 얘기를 길게 두서없이 쓰는 건 불과 며칠 전에 들었고, 사실 수십 년 동안 들은 저에 대한 덕담과 관련된 것인데,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늘 차분하고 믿음직하고 든든한, 그래서 늘 의지가 되는' 이라는 수식이 난무하는 저에 대한 상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저에 대한 최고의 평가나 칭찬 쯤으로 듣게 되는 저 표현은 저에겐 사실, 개나 줘버리고 싶은 녹슨 훈장이고 결정적일 땐 나뭇가지에 걸려 사냥꾼의 총에 맞게 되는 사슴의 뿔 같은 겁니다. 맘껏 어리광 부리지 못한 유년시절부터 다져진 것인지 자존심상 우는 소리  쉽게 못하는 성정 때문에 늘 속깊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저는 어느 순간 아무도 제 걱정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고보니 저는 지금껏 제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모든 얘기를 단 한 사람에게도 맘놓고 털어놓아 본 적이 없군요. 물론 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뭉치로 골칫덩이로 살아본 적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런데 왜 저는 늘 주변에 미더운 사람이 되어 아무도 날 생각해 주지 않아도 안심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걸까요. 널 믿는다, 는 말 한 마디 얻기가 그렇게 천금이라는데 저는 왜 이렇게 버거운 걸까요.


  그러는 저는 정작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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