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몽클레어와 시바스 리갈

2012.01.24 18:58

LH 조회 수:4302

 


대통령의 외손녀가 입은 명품 패딩이 설날의 사이버 세상을 뜨겁게 달궜네요.

유명한 사람이 가진 명품, 특히 외제로서 큰 이슈로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대표적인 것이라면야 장영자 씨의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있겠고, 린다 김의 선글라스가 있겠으며... 또 어떤 대통령이 마지막 자리에서 마셨던 위스키 시바스 리갈, 또 70년대 즈음의 딜럭스 수입차 쯤이 있겠습니다.


명품이라는 것 자체가 가격이 비싸고 희소해서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가질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가진 사람으로서 돈 쓰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게도 하지요.

자랑하는 게 딱히 나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 너구리 라면에서 다시마가 두 개 나와도 자랑하고 싶어지는데 비싼 돈 주고 사면 오죽했겠어요. 피천득의 은전 한 닢에서 나오는 늙은 거지가 여섯 달 동안 고생하고 또 고생해서 다양(大洋) 은전 하나를 갖고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하는 것 처럼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은전 한 닢이 있기 마련이죠.
그게 누군가에겐 술일 수도 있고, 명품 백일 수도 있고, 멋진 자동차일 수도 있으며, 스마트 폰이나, 프랑스 정식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 교통사고를 당해 출혈로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에도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가 아까워서 "재봉선 따라 곱게 잘라주세요!" 애원할 수는 있는 거죠.
남들이 보기엔 웃기고 한심할 지라도, 그렇게 웃는 사람에게도 비밀의 화원이 하나나 둘이나 세 개 쯤 있을 겁니다. 저 자신도 당장 다음 달 방값이 간당간당할 때 반지의 제왕 양장본을 냅다 지른 적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취미생활을 두고 뭐라 할 수 없더군요. 무엇보다, 사람이 자기 돈 가지고 뭘 하든 본인 자유입니다.
분수에 넘친 소비를 하다가 모파상의 목걸이 주인공 같은 꼴을 당하더라도 그건 본인의 책임이죠.

 

그러니까 문제의 패딩이 300만원이든 65만원이든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애 할아버지, 아빠의 직업으로 보관대 인터넷 이리저리 뒤져가며 해외직구를 통해 이러지리 깎고 살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샀다면 참 디테일하게 꼼꼼한 것이고, 그냥 백화점 가서 샀다면 외국 외에도 중간유통업자들과, 백화점 직원들에게 이익을 안겨준 것이니 그 나름으로도 좋은 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돈 한 푼 안들이고 전 한국에 자신의 브랜드를 광고한 몽클레어 사장님은 정월 대보름달 같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기도 하겠고요.

 

그렇긴 해도 외제 때문에 스타일 구기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여기에서 위스키 - 시바스 리갈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이 술은 1979년 10월, 궁정도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직전 마시고 있었던 위스키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계원과 한 병 반 씩인가를 거하게 마셔댔는데, 당시로선 구하기 힘든 술이었죠 당연히. 아까 말했듯이 외국 술 마시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사람이 각별히 좋아하는 것일 수 있죠. 막걸리 좋아하는 사람 있는가 하면 소주 땡기는 사람 있고, 특별한 날 기분 좋게 비싼 와인 한 병 뜯을 수 있는 거죠. 위스키도 그렇고.

문제가 있다면, 박정희는 내내 외제품을 축출하고 국산을 쓰자고 나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사람이라는 데 있지요. 이전에 쓰기도 했지만 외화를 아끼자는 이유로 커피의 수입을 금지하고, 그거 말고도 세상 대부분의 것들의 수입을 금지해서 일반 시민들은 물론, 물감과 악기를 구할 수 없어 화가와 음악가들이 곤란을 겪을 정도로요. 그럴 만큼 엄격하게 수입을 금지했었는데, 정작 본인은 외제 술을 마시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건가요.

사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은 그가 딸 보다 어린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들곤 하는데, 전 그보다는 시바스 리갈이 더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그 날 술자리가 하하호호 했던 게 아니라 엄청 꿀꿀했던 것도 있고) 그는 일평생 "막걸리를 즐겨 마시며 국민 여론을 경청하는 대통령"이라는 컨셉 이미지를 잡았습니다. 자주 시골 농촌을 순시하면서 농부들과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국수를 먹고 그랬었지요. 그래서 나중엔 고양시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박통 막걸리도 출시되긴 했습니다만. 이제 사람들은 시바스 리갈을 알아도 막걸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살아 생전 내내 노력한 것보다 잘 죽어야 해요. 폼생폼사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죠, 그렇게 평생 쌓아왔어도 한 번으로 훅 가니 말입니다...

 

이번 몽클레어 패딩의 가장 큰 문제는 하필이면 재래시장 시찰 갈 때 입었다는 거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황제의 위엄과 권위를 천하에 보이고 복종시키기 위해 곳곳을 순수한 것 마냥, 시찰에는 원래 목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재래시장에 갔다는 것은 '서민의 바쁘고 고된 생활을 돌아보고 위로하기 위한' 장이지요. 만약 그 옷을 입고 박물관이나 극장에 갔다면 상관없겠지요. 헌데 거긴 그 코트 가격의 100분의 1 가격의 옷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데란 말이죠. 게다가 전 국민과 언론의 시선이 모이는 대통령인걸요.
굳이 비유하자면 장례식장에 파티 드레스를 입고 간 것이요, 데이트 하러 가면서 몸빼바지 입고 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명품 패딩 한 벌로 그건 시찰이 아니라 동물원 구경이 되고 말았습니다."자, 보렴. 세상엔 이렇게 헐벗고 불쌍하게 사는 사람이 있단다~ 너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공부 하고 유학가렴."이라는. (이건 제 지인의 표현입니다)

물론 그렇게 머리에 총 맞은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드레스 코드로는 그런 오해를 만들 가능성 및 위험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제대로 된 사전 코디를 못해서 민족의 대명절이자 정초부터터 수 많은 국민들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는 시덥잖은 논란이 벌어지게 한 보좌진을 족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 옷이 얼마든, 외제이건 국산이던 이미 논란이 된 시점에서 대통령의 시찰은 물 건너간 것이고 마이너스이지요. 현 대통령의 보좌진 중에 진정한 안티가 있다는 음모론에 숟가락 하나 살쯔기 꽂고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모두 좋은 밤 되세요.

p.s : 사실 저는 하얀 패딩 보다도 다른 분이 입은 코트가 취향이었습니다. 이게 훨 비싸 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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