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 1 이야기...

2021.05.26 00:48

Sonny 조회 수:625



제가 유일하게 시청하는 스포츠가 스타크래프트 1 입니다. (E-sports라구요...!!) 이 해묵은지 오래인 게임이 저를 왜 그렇게 사로잡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의 열광에 아직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겠고 제가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임을 저는 상상도 못하는 경지로 플레이하는 것에 감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게임방송국도 문을 닫고 이제는 LOL과 배그 같은 게임들이 대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스타크래프는 프로게이머 판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인터넷 방송국에서 계속 저같은 시청자들을 붙들어놓으면서 계속 게임의 전술전략을 개발하고 진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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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게임이 정말 무규칙에 가깝다는 겁니다. 이 게임에는 심판도 있고 반칙의 개념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게임은 게임 상에서 구현만 된다면 그게 버그든 비겁한 짓이든 그 무슨 짓이든 해도 됩니다. 이를테면 거의 모든 격투기 대회에서 눈찌르기, 낭심차기, 깨물기를 반칙으로 정해놓습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에는 그런 게 없어서 온갖 필사적인 몸부림과 치사한 짓거리가 하나의 테크닉이 됩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릴 게 없기 때문에 이 시시해보이는 게임은 진검승부의 미학을 띄고 있습니다. 까딱하면 죽고, 어이없는 실수에 죽고, 사소한 공격에 죽고, 모르면 죽습니다. 이 게임은 정말 전쟁통에서 서로 악착같이 뒹구는 진흙탕 싸움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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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스타크래프트는 일꾼이 자원을 채취해서 일정량의 자원이 모이면 건물을 건설하고 그 건물에서 병기를 생산해내는 일종의 자본주의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건물을 먼저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상대편의 일꾼이 건물을 지으려 할 때마다 그 지을 자리에 자기 일꾼을 갖다놓거나 다른 건물을 미리 지어버려서 건물 건설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알박기를 하는 셈입니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싸움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비겁한 짓이지만 그렇게 해도 됩니다. 상대방의 건물건설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없으니까요. 규칙이 없으면 모든 움직임이 전술전략이 됩니다. 


규칙이 없는 진검승부의 세계에서 고수가 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초심자가 믿고 의지할만한 규칙이 없어서 승부 자체의 전형성은 없어지는데 패배할 가능성은 훨씬 높으니까요. 그런데 이 게임에 미친 민족은 개발사 블리자드를 질겁하게 만들 정도로 이 게임에 파고들며 이 무규칙의 전쟁을 체계화시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제일 합리적인 선택지인지 경우의 수를 다 따져나가며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퍼즐조립의 순서를 만들어냈습니다. 언제 일꾼을 뽑고, 어느 타이밍에 어느 장소에 어떤 건물을 올려서 어떤 병력을 뽑아야할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 모든 걸 아예 수학공식처럼 고정시켜놓았습니다. 무규칙의 전쟁터를 수천번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에서 이득의 극대화와 손실의 극소화가 하나의 규칙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안그러면 패배할 정도로 불리해지니까요.


이렇게 정해진 공식이 있다면 게임은 수학시험처럼 하나의 정답을 도출해내는 일률적인 경쟁의 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스타크래프트는 이 공식들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구현됩니다. 숫자상으로 다른 건 없습니다. 몇분 몇초에, 어떤 건물을 올리고, 어떤 병력을 생산해서, 적의 어떤 지점을 공략해야 하는 건 공통적인 사실입니다. 숫자의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숫자의 진실이 다루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공학적 계산과 정밀한 수행능력의 대결이 사람 대 사람의 대결로 변합니다. 어떤 선수는 공격적이고 어떤 선수는 수비적이고 어떤 선수는 장기전을 좋아하고 어떤 선수는 초반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안정적인 승부를 지향하고 누군가는 위험천만한 도박수를 던집니다. 그 때문에 이 숫자의 진실이 갑자기 어그러지고 한 인간 앞에서 진리가 파괴됩니다. 99%의 유불리가 한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따라 뒤집혀버리죠. 아무리 절대적인 계산을 해도 그걸 실현하는 건 결국 사람이니까요. 인간의 불완전함이라는 이 숙명을 두고 게이머들은 초월적으로 강해지거나 순리를 그대로 구현합니다. 


과거 스타크래프트 1을 해설했던 엄재경이 내내 강조했던 말이 있습니다. 이건 결국 인간이 하는 게임이고 인간을 이기는 게임이라고. 그러니까 결국 이 게임을 하는 인간의 완성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이 자기만의 특성과 성정으로 다른 사람을 쓰러트리는 캐릭터들간의 대결입니다. 공격을 좋아하는 선수가 공격만 하다 지기도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역공으로 승부를 뒤집기도 하고, 시종일관 맹공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기도 하고, 준비된 수비에 완벽히 막히기도 합니다. 어떻게 자신을 관철시키면서도 자신을 다스릴 것인가. 그게 이 스타크래프트 최대의 난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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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새 제일 좋아하는 선수는 변현제라는 선수입니다. 이 선수는 유례없을 정도로 상대를 도발하는데 집착하는 변칙형 플레이어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자신이 100의 자원과 병력을 투자해서 얻을 수 있는 효율이 70밖에 안된다 해도 주저하지 않고 상대를 흔드는 도발적 플레이를 합니다. 이게 말이 안되는 게 이 게임은 경제적 득실이 아주 중요한 게임이라서 100을 투자하면 최소한 100의 득은 봐야합니다. 그런데 변현제는 자기가 -30의 손실을 본다는 건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상대가 자신의 견제에 흔들리면서 제 플레이를 못하는 것, 상대가 짜증이 나고 초조해지는 것, 순간 삐끗하면 -30의 손실을 자기가 만회할만큼 득을 볼 수 있다는 것 등의 마인드로 게임에 임합니다. 이 게임은 인터페이스가 단순해서 생산, 움직임, 공격, 특수기술등의 모든 명령을 게이머가 일일이 해줘야할 정도로 바쁜 게임입니다. 그 와중에 변현제는 저런 짓을 합니다. 어떤 선수도 이 정도로 악랄하게 상대를 괴롭히면서 수렁에 빠트리는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내가 -10만큼 제 플레이를 못해도 상대가 -20, -30만큼 제 플레이를 못하면 장땡이라는 극악의 트릭스터 플레이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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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선수는 툭하면 올인성 전략을 질러버립니다. 한판 한판이 소중하고 자신의 초반이 매우 중요한 이 게임에서 안들키면 무조건 먹히지만 들키면 그 대로 막혀서 게임을 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전략을 자주 합니다. 대담함이 아니라 광기로 보일 수준의 올인 전략을 툭하면 쓰기 때문에 이 선수의 비공식전 게임에서는 다른 선수들이 쌍욕을 하는 장면들이 자주 연출됩니다. 변현제 또 미친 짓 한다고. 스타크래프트 역사상 이런 선수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선수랑 맞붙은 선수들은 하나같이 초중반을 못넘기고, 자기 플레이를 전혀 못하고, 변현제의 견제와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농락당한 채로 게임이 끝납니다. 변현제의 별명은 "변태"입니다...


변현제를 보면서 요즘 생각합니다. 타인과 승부를 한다는 건 아주 과격하고 지독한 방식의 소통을 하는 일이죠. 그 둘만의 소통을 함녀서 단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만을 저렇게 밀어붙일 수 있다는 건 일종의 구도행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하고 자신의 공격을 무효로 되돌려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상대에게 계속 강요한다는 것에는 일종의 예술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제일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방법은 타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너가 이럴 줄 알고 나는 이걸 했고, 그 다음에는 너가 이렇게 할 줄 알아서 난 이렇게 위험한 짓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요. 변현제는 정말로 무슨 짓을 할 줄 모르고, 아주 날카로우며, 대단히 위험한 캐릭터입니다. 장르가 무엇이 됐든 자기 캐릭터를 이렇게 선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상한 감동을 느낍니다. 광인과 장인은 결국 한끝 차이의 단어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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