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키우던 개가 죽었어요

2011.07.28 20:10

레사 조회 수:4282

듀게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세상일이 멀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자주 들르던 듀게도 안오게 되더군요.

부모님이 십년을 키우셨던 개였어요.
저는 그 마지막 삼년을 같이 살았구요.

원래는 빚 삼십만원에 팔려왔더랬죠.
집에 왔을 때 나이가 네살이었어요.

제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땐 이미
육개월 간격의 대수술 두번으로 쇠약해진대다
나이도 많아 참 조용하고 주변을 귀찮아 하던 녀석이었습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매우 똑똑했고
(냄비가 타거나 욕실물이 넘치거나 그러면 와서 알려주곤 했대요)
애교는 없었지만 자기거 좋아하고 자기표현 잘하던 녀석이었다는데
(산책용 목줄을 사다줬을 때나 집이 망가져서 임시로
박스로 집을 만들어주니 그리 좋아하더랍니다)
제가 본 녀석은 항상 조용하고 혼자 있는 걸 좋아했거든요.
사실 탈골되었었는데 수술해주겠다는 병원이 없어
결국은 사년을 걷지못했어요.
조용하고 혼자있기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요.

녀석과는 별로 안 친했습니다.
아마도 녀석에겐 전 절대로 맛있는 거 그러니까 사람 음식 안주고
별로 놀아주지도 않지만 화장실을 꼬박꼬박 데려가주는
불친절한 아랫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느날 아무것도 안 먹더라구요.
배탈이 나면 종종 한 두끼 거르긴 했지만
물까지 안 마시진 않아 이상하다 싶어
병원에 갔더니 이미 너무 노쇠해 져서 가망이 없다고 하더군요.
당일을 넘기기 힘들거라고....

정이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눈물 밖에 안났습니다.
병원을 몇 군데를 돌면서 살려달라고 했지만
영양제 링거도 못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바늘 넣다가 잘못될 수도 있다고...
그냥 집에 데려가서 마지막을 함께 해주라구요.

정신줄을 놓고 있다
같이살다 작년에 타지에 나간 동생에게 연락했어요.
동생 바로 휴가내고 달려왔습니다.
직장에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도 다 오셨어요.
그렇게 녀석에게 얼굴들을 보여주니
녀석이 힘이 나는지 이것저것 먹어 보려고 하더라구요.
저희들은 괜찮아 진 줄 알았어요.
몇 시간 같이 있다 다들 다시 일터로 돌아갔는데
그러고 삼십분 쯤 있다 녀석이 죽었습니다.

그 조그만 몸이 고통에 떨다 서서히 숨쉬는 것을
멈추는데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어
그냥 울기만 했었네요.
사후경련인지 몸이 조금씩 움직였는데
막연히 다시 살아나는 건가...
기다렸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그 이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버지 요양하실 때 같이지내던 시골집 마당에 묻어주고 왔습니다.

몇주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녀석이 곁에 있는 거 같아요.
시간맞춰 화장실 데려가고 밥주고
녀석은 귀찮아했지만 놀아줘야 할 거 같아요.
녀석이 있던 작은 방에 여전히 조용히 누워 있을 것 같아요.
3초만 지나면 아니란 걸 알지만 이 느낌은 여전히 찾아오네요.

그 녀석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 중 제일 덜 보고싶어했을
사람인 저만 곁에 있었다는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녀석이 혼자서 걷지못해도 매주 산책나가서
잡아주면 걷는 기분은 냈었는데
마지막주 제가 바쁘다는 이유로 산책 못 나간 것도
마음에 남아요.

제게는 붙임성없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같이한 삼년, 부모님과 함께한 십년은
녀석이 있어 더 행복했던 거 같아요.
가족간에 냉랭한 공기가 흘러도 녀석의 무심한 행동 하나에
웃음보가 터지곤 했었는데...
참 고마워요.

지난주에는 절에가서 초를 하나 밝혀두고 왔습니다.

종교는 없지만, 그래도 저 세상이라는 곳이 있다면
녀석이 튼튼한 네다리도 뛰어다니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저희 가족도 먹먹한 그리움이 옅어질 날이 오겠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9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3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66
115577 [불판] 브라질 월드컵 대한민국 vs 알제리 - 아 망했어요 [86] 아마데우스 2014.06.23 4282
115576 이상호 기자 논란에 관해 [5] 치이즈 2014.04.27 4282
115575 스타크래프트의 아버지 크리스 메첸의 일러스트 [3] 흐흐흐 2013.10.25 4282
115574 [자랑] 헌혈 50번 금장 탔습니다^^ [26] 라곱순 2013.04.29 4282
115573 우리집 고양이 이야기 + 고양이의 행복 [11] kct100 2013.06.12 4282
115572 [기사] 홈쇼핑 조연출 모델 대타( 진짜 재밌어요) [7] 꽃띠여자 2012.12.07 4282
115571 [바낭] 라스 무지 재밌는데요? [6] 샤워실의 바보 2013.09.05 4282
115570 사후피임약 일반의약품으로 변경 _ 어떻게 할 것인가? [63] 고인돌 2012.04.03 4282
115569 먹고사니즘에 쫒기며 먹고 살 생각만 하다가 거장이 된 예술가가 있을까요? [32] nishi 2012.02.16 4282
115568 나는 이런거 하지만 내 여자는 이런거 안했으면 좋겠다 [25] Rcmdr 2012.02.02 4282
» 오래 키우던 개가 죽었어요 [24] 레사 2011.07.28 4282
115566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엔젤이 레니 크라비츠 딸이었군요.; [4] 빠삐용 2011.06.07 4282
115565 특별히 좋아하는 도시 있으세요? [45] 불별 2011.05.09 4282
115564 ▒▒▒▒ 007 제임스본드 비밀의 세계 들여다 보기 ▒▒▒▒ [7] 무비스타 2010.11.25 4282
115563 소셜 네트워크를 보다가 생각난 냅스터와 이후 이야기들 (스포) [3] mezq 2010.11.21 4282
115562 듀나인] 카페인에 관하여- 녹차티백을 여러번 우리면?&카페인 없는 차 [4] 토토랑 2011.05.27 4282
115561 낳았다고 다 부모라고 해야하는가. [18] 장외인간 2010.07.16 4282
115560 이재명이 실언을 했네요... [17] 젊은익명의슬픔 2016.01.23 4281
115559 만약 TV도쿄같은 방송국이 한국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6] 모르나가 2014.04.18 4281
115558 큰일났어요. 태국...태국...이시국에 태국이라니! [5] 보들보들 2013.05.12 428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