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3 01:01
날이 풀리다 다시 한 풀 꺾여 기온이 내려갔지만, 확실히 봄은 오고 있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개나리와 함께, 목련, 그리고 결국 벚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빨간 몽우리가 살짝 핀 꽃과 함께 모여, 각각의 나무들 간 개화한 차이가 마치 각기 다른 별 빛들이 모인 밤 하늘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핀 지 얼마 안 되어 비가 오고 바람이 그렇게 불어도 꽃 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더군요. 이미 목련은 그 커다란 잎을 많이 떨어트렸고, 이번 비에 마치 젖었다 마른 종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때되면 이렇게 분자기계들이 자기 할 일들을 한다는게, 자연이 무심하다고 말할 만 하다 싶습니다.
매 주말마다 규칙적으로 빨래를 널고, 도서관에 갑니다. 이번 주도 일요일에는 하늘이 개어 빨래를 널었는데요. 바람이 너무 쎄서 빨래집게를 일일히 집어야 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갑작스레, 남는 집게가 없어서 다른 빨래를 다 걷고 하나 남겨놓았던 양말 한 짝을 걷으러 옥상에 올라갔다 왔네요. 아마 이슬 한 번 맞았겠지만, 오늘 날도 좋았기에 말끔한 햇볕 냄새가 납니다.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후에는, 도무지 일광건조를 부득이 하지 않으면 시키게 됩니다. 장마철 한 번은 동전 세탁소에서 빨래를 말렸는데 기이한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가까운 곳에 무인 도서관 부스가 생겨서 요새는 무려, 2주에 8권이나 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읽을 시간은 더욱 줄어들어 반납 때까지 1권이나 읽을까 말까 하네요. 지난 주에도 몇 페이지 펼쳐 보는둥 마는둥 하고, [프랑스어 첫걸음],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수수께끼]를 반납했습니다. 특히 수수께끼는 제가 신청해서 들여온 도서인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림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더 늘려주기만 하여 골탕먹는 느낌이었습니다. ( 심지어는 그림을 잘 해석한 모종의 책과 다큐멘타리를 인용하는데 한국에는 아직 없는듯 했습니다. )
무인 도서관 부스는 밤 12시가 마감인지라 그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어 넘깁니다. 어제도 11시 반 쯤 들어가 [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 외 2권을 반납하고, [출신], [나는 내 나이가 좋다], [어느 날 갑자기, 책방을]을 빌려 들고 나왔습니다. 혹시나 마감 시간이 지나면 문이 잠겨 자정에 도서관에 갖힌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정신 없이 아무 책이나 빌리는 맛이 있습니다. [출신]은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유추할 수 있는 국가가 낯설어서, [나는 내 나이가 좋다]는 아무래도 나이 든 분의 글일테니 몇 챕터라도 읽어볼 겸 빌렸습니다. 참고, 스리랑카는 의외로 꽤 종교적인 국가에 타밀인과 싱할라인 간의 분쟁이 심한 소규모 분쟁 국가였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엔가, "듀나와 함께하는 미스테리 북클럽"에 느지막히 들어가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달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루고 있었고, 그런 김에 지금까지 연재되오던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을 틈틈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매 주 수요일마다 거의 한 주도 빠짐없이 2016년부터 250여개의 글을 써 왔더군요. 저는 미스테리 류의 소설은 거의 읽지 않기 때문에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읽어 나가다 마음에 드는 책들은 따로 기억해 두기도 하고. 꾸준히 읽으며 궁금했던, 왜 청소년 SF 도서를 읽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 기뻐 남겨 봅니다.
최근 들어 어린이/청소년 SF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직업상 이 장르에 속한 소설들의 최신 유행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이게 귀찮은 의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에게 SF의 시작점은 청소년 문학이었고 지금도 장르의 기준점을 그 언저리에 놓는다. SF란 어른들이 민망해서 하지 않는 일을 거리낌없이 하는 장르이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소재를 다루어도 늘 어른이 아닌 부분이 남아있다.
머리 속이 명쾌하게 정리가 되질 않고, 주변을 이루는 이슈들도 어수선합니다. 전의 글에 소개했던 [바깥은 불타는 늪 / 정신병원에 갇힘]의 정서가 밀레니엄 세대의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김사과 작가의 다른 책들도 살펴 트위터에서 십여년 전 인기였던 [미나]를 읽고 있는데, 학창시절 어둑하고 우울한 문제를 주제로 다뤄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쯔음 최고은 작가와 관련된 예술과 삶에 대한 논쟁들에 한 글 얹은 [무엇을 할 것인가]란 글을 읽게 되었구요. 올 해가 10년이 되었는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싶기도 하더군요.
꼼꼼히 따져보면 의외로 시간을 내어 무언가 할 수 있는 덩어리진 간격은 얼마 없습니다. 올 해가 벌써 5분의 1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간격들을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대충 먹을 때 가장 맛있지만요. ) 다들 무심히도 새로 도래하는 봄을 잘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2021.03.23 01:24
2021.03.23 11:22
헉, 로이배티님 사시는 곳은 아직 꽃이 안 피었군요. 제 쪽도 벚꽃은 하루 이틀 사이에 서서히 피기 시작했지만, 개나리는 핀지 꽤 되었거든요. 간과했네요.
주말에는 애인과 시간을 보내니 평일 월화수목 저녁만 남는데, 어쩌다 보면 일주일이 가버립니다. 그나마 있는 시간에도 자기계발을 해야 되지 않나 싶은 죄책감이 들 때도 있어요. 말씀하셨듯 성실하게 노는 것도 노력이 필요한데, 정말 유야무야 사라질 때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분합니다. 그렇다고 만족할 때까지 놀면, 다음 날 수면부족, 집에 와서 쉬는둥 마는둥, 또다시 분노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역시 힘내서 회사에서 몰래 노는게 답인듯 합니다. (음?)
올 해가 어영부영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죄책감에 일조하는데, 만족하는 연습도 해야 되지 않나 싶네요. 하하.
2021.03.23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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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3 11:33
일단 중고서점에 가셨는데 빈 손으로 나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집에 여우 같은 책과, 토끼 같은 책들이 있어요.'하면서 불매 구걸을 해야 될것만 같죠. 저도 침대 옆 협탁에 책들이 꽤 탑을 이루고 있어서 어차피 총량이 불지 않는 도서관을 애용 중입니다. 사실 이 주에는 읽지 않은 책을 반납하느라 도서관에 별로 가고 싶진 않았는데, 생각을 바꿔서 교환 자체로 기분 전환한다고 생각하고 가니 한결 기분이 좋더군요. ( 부스 아닌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빌리고는 완전히 기분 좋아졌다는건 비밀입니다. 듀나님이 꽤 칭찬하신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이 신간 코너에 있어서 손에 넣었거든요. )
서울인권영화제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상을 보면 꼭 글로 볼 때 누락되었던 사실들을 알게 되더군요. 특히 자료가 얼마 없는 영역에서는 더욱 소중하죠.
2021.03.23 06:43
2021.03.23 09:34
2021.03.23 11:36
듀나와 함께하는 미스테리 북클럽은 사실 YouTube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아주 이시국스러운 모임이었어요. Bigcat님도 다시 열리는 도서관과 함께 출강 중이시군요. 저도 처음에 마스크 쓰고 자전거 탈 때는 너무 힘들었는데, 요새는 그럭저럭 괜찮은 걸 보면 정말 적응력이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2021.03.23 12:21
2021.03.23 17:38
서울은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항상 좀 더 춥더군요. 봄인가 싶으면 깜짝 놀랄만큼 추워질 떄도 있고.
요즘엔 정말 봄인가 싶으면 휙 지나가서 그 자락이 보일 때 더 꽉 쥐게 됩니다. 하루하루, 지금 봄에 있어 이렇게 곱씹으면서요.
치마를 입게 해줄 때가 봄, 에서 계절감을 확 느꼈네요. 그래도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코로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매일 주어지는 '해야할 일'을 다 하고 나면 잠들기 전까지 그냥 아무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할 시간은 늘 애매하게 남더라구요. 영화 한 편을 볼 두 시간이라든가, 게임에 손을 댄다면 그래도 입맛만 버리진 않았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한 시간 남짓이라든가...
그래서 그때 뭘 하려면 하루 종일 없었던 성실성이란 걸 끌어 올려서 당장 시작해야 하는데, 나름 꽤 오랫동안 습관화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잠시 방심하면 결국 애매한 시간만 남아서 잉여질을 하다 아쉬운 맘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네요. 갑자기 불타오르는 게시판 구경하다가 방심해 버렸...;
저는 늘 3월달에 새로운 턴을 맞이하고 시작하는 직종에 있다 보니 매년 이맘 때마다 '올해'가 한 달이 아니라 1/4 가까이 가버렸다는 걸 알고 당황하곤 해요. 잔인한 오후님도 남을 올해 즐겁게 보내시고 봄맞이도 잘 하시길.
...근데 우리 동네는 올해따라 날이 좀 추운지 꽃이 잘 안 피네요. 직장이 봄마다 꽃 잔치인데 올해는 벚꽃은 커녕 아직 개나리도 안 피어서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