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고.

2021.03.23 01:01

잔인한오후 조회 수:477

날이 풀리다 다시 한 풀 꺾여 기온이 내려갔지만, 확실히 봄은 오고 있습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개나리와 함께, 목련, 그리고 결국 벚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빨간 몽우리가 살짝 핀 꽃과 함께 모여, 각각의 나무들 간 개화한 차이가 마치 각기 다른 별 빛들이 모인 밤 하늘처럼 보이는 시기입니다. 핀 지 얼마 안 되어 비가 오고 바람이 그렇게 불어도 꽃 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더군요. 이미 목련은 그 커다란 잎을 많이 떨어트렸고, 이번 비에 마치 젖었다 마른 종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때되면 이렇게 분자기계들이 자기 할 일들을 한다는게, 자연이 무심하다고 말할 만 하다 싶습니다.


매 주말마다 규칙적으로 빨래를 널고, 도서관에 갑니다. 이번 주도 일요일에는 하늘이 개어 빨래를 널었는데요. 바람이 너무 쎄서 빨래집게를 일일히 집어야 했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갑작스레, 남는 집게가 없어서 다른 빨래를 다 걷고 하나 남겨놓았던 양말 한 짝을 걷으러 옥상에 올라갔다 왔네요. 아마 이슬 한 번 맞았겠지만, 오늘 날도 좋았기에 말끔한 햇볕 냄새가 납니다. 옥상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후에는, 도무지 일광건조를 부득이 하지 않으면 시키게 됩니다. 장마철 한 번은 동전 세탁소에서 빨래를 말렸는데 기이한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가까운 곳에 무인 도서관 부스가 생겨서 요새는 무려, 2주에 8권이나 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읽을 시간은 더욱 줄어들어 반납 때까지 1권이나 읽을까 말까 하네요. 지난 주에도 몇 페이지 펼쳐 보는둥 마는둥 하고, [프랑스어 첫걸음], [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수수께끼]를 반납했습니다. 특히 수수께끼는 제가 신청해서 들여온 도서인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림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수수께끼를 더 늘려주기만 하여 골탕먹는 느낌이었습니다. ( 심지어는 그림을 잘 해석한 모종의 책과 다큐멘타리를 인용하는데 한국에는 아직 없는듯 했습니다. ) 


무인 도서관 부스는 밤 12시가 마감인지라 그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어 넘깁니다. 어제도 11시 반 쯤 들어가 [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 외 2권을 반납하고, [출신], [나는 내 나이가 좋다], [어느 날 갑자기, 책방을]을 빌려 들고 나왔습니다. 혹시나 마감 시간이 지나면 문이 잠겨 자정에 도서관에 갖힌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정신 없이 아무 책이나 빌리는 맛이 있습니다. [출신]은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유추할 수 있는 국가가 낯설어서, [나는 내 나이가 좋다]는 아무래도 나이 든 분의 글일테니 몇 챕터라도 읽어볼 겸 빌렸습니다. 참고, 스리랑카는 의외로 꽤 종교적인 국가에 타밀인과 싱할라인 간의 분쟁이 심한 소규모 분쟁 국가였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엔가, "듀나와 함께하는 미스테리 북클럽"에 느지막히 들어가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달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다루고 있었고, 그런 김에 지금까지 연재되오던 [듀나의 장르소설 읽는 밤]을 틈틈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매 주 수요일마다 거의 한 주도 빠짐없이 2016년부터 250여개의 글을 써 왔더군요. 저는 미스테리 류의 소설은 거의 읽지 않기 때문에 새롭게 읽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읽어 나가다 마음에 드는 책들은 따로 기억해 두기도 하고. 꾸준히 읽으며 궁금했던, 왜 청소년 SF 도서를 읽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 기뻐 남겨 봅니다.


최근 들어 어린이/청소년 SF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직업상 이 장르에 속한 소설들의 최신 유행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이게 귀찮은 의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에게 SF의 시작점은 청소년 문학이었고 지금도 장르의 기준점을 그 언저리에 놓는다. SF란 어른들이 민망해서 하지 않는 일을 거리낌없이 하는 장르이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소재를 다루어도 늘 어른이 아닌 부분이 남아있다.


머리 속이 명쾌하게 정리가 되질 않고, 주변을 이루는 이슈들도 어수선합니다. 전의 글에 소개했던 [바깥은 불타는 늪 / 정신병원에 갇힘]의 정서가 밀레니엄 세대의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김사과 작가의 다른 책들도 살펴 트위터에서 십여년 전 인기였던 [미나]를 읽고 있는데, 학창시절 어둑하고 우울한 문제를 주제로 다뤄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쯔음 최고은 작가와 관련된 예술과 삶에 대한 논쟁들에 한 글 얹은 [무엇을 할 것인가]란 글을 읽게 되었구요. 올 해가 10년이 되었는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싶기도 하더군요.


꼼꼼히 따져보면 의외로 시간을 내어 무언가 할 수 있는 덩어리진 간격은 얼마 없습니다. 올 해가 벌써 5분의 1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간격들을 아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대충 먹을 때 가장 맛있지만요. ) 다들 무심히도 새로 도래하는 봄을 잘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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