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의 엔딩에 대한 언급이 살짝 있어요. 글의 형태로 작성해서 말투가 이런 것이니 양해 부탁드려요.)
얼마 전 몬테 헬만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몬테 헬만이 만든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하며 그를 추모하고자 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를 보면서 문득 몬테 헬만의 걸작 <자유의 이차선>(원제: Two-Lane Blacktop)(1971)을 떠올렸다. <노매드랜드>가 빼어난 로드 무비라고 느꼈기 때문에 선배격에 해당하는 <자유의 이차선>이 떠올랐던 것 같다.
<자유의 이차선>은 서부극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로드 무비의 전통을 이어받아 극단으로 밀고 간 궁극의 로드 무비이다. 이 영화를 넘어설 수 있는 로드 무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왜? <자유의 이차선>은 로드 무비를 끝장내버렸기 때문이다.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가 가장 순수한 웨스턴에 근접해있다면 같은 의미로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은 가장 순수한 로드 무비에 근접해있다. 이 영화는 첫 쇼트부터 이미 길 위에 있고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길 위에 있는 것을 넘어서 영화 자체를 아예 날려버린다.(스포일러라서 표현을 자제한다.)
길은 목적지가 없는 이상 무방향성을 지향한다. 목적지가 없는 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 길은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다. '로드 무비'가 길 위의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목적지가 없이 길 위에서 시작해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은 채 길 위에서 끝나는 <자유의 이차선>만큼 로드 무비의 본질에 충실한 영화는 없다. 흔히 로드 무비는 목적지에 당도하거나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캐릭터들에게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길은 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 이차선>은 애초에 플롯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런 만큼 길은 수단화되지 않고 오롯이 길 자체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오로지 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순수한 운동과 질주의 굉음만이 있다. 인물들의 욕망은 불분명하며 실존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무를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짐 자무쉬의 <패터슨>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무를 지향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석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린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사의 가능성은 확장된다. GTO로 상징되는 워렌 오츠가 뉴욕으로 갈 마음을 먹고 히치하이커들에게 영웅담을 지어내는 것도 사실 이 영화가 무의미를 지향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인 세 명의 남성(제임스 테일러, 데니스 윌슨, 워렌 오츠)과 한 명의 여성(로리 버드) 사이에서 감지되는 성적 긴장감 또한 인물들의 행동의 동기가 모호하기 때문에 더욱 커질 수 있다. 한 여성을 향한 세 남성의 대립 양상이나 두 자동차의 대결 구도는 웨스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의미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리는 <자유의 이차선>은 단순히 로드 무비를 넘어서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위대한 로드 무비인 <자유의 이차선>을 만든 몬테 헬만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노매드랜드보다 이 영화를 먼저 봐야겠네요. 벌써 뭉클. 알려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