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계곡과 페미니즘

2021.04.16 13:28

MELM 조회 수:997

한때 맑시스트였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어려운지에 대해 '전환의 계곡'이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 이론의 몇 가지 전제는 1)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노동계급에게 이익이 된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기초해서 투표한다. 정도가 있습니다. 이 두 전제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명제는 독일에서 사민당의 약진에 감탄한 엥겔스 이후 많은 사민주의자들로부터 동의를 얻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국가 중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국가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는 허위의식을 다루는 이데올로기론이 발전했죠. 


반면 아담 쉐보르스키는 이 문제를 노동자의 허위의식이 아닌 '전환의 계곡'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노동계급의 이익은 사회주의로 전환됨에 따라 우상향 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 우상향 그래프가 선형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주의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필연적으로 그래프 상에 U자형 계곡이 생겨납니다. 전환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죠. 사회주의로의 전환은 노동계급에게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애초에 자원이 없는 노동계급에게는 저런 단기적 비용 조차 큰 부담이 됩니다. 게다가 비용은 눈 앞의 일이고, 이익은 언제 올지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일 입니다. 따라서 전환의 계곡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게 자원을 확충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정치조직이 노동계급에게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어서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민주주의 국가는 몇 년 마다 선거를 치뤄야 하고, 그 결과 어떤 정당도 단기적 비용을 감수하라고 노동계급에게 요구하지 못합니다. 그건 코 앞의 선거를 포기하라는 말이니까요.


자유주의자들이 청년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결국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을 꺼낼 때, 그리고 그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현실을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전환의 계곡이 떠오릅니다. 장기적으로 양성평등은 남성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청년 남성들에게 그건 공자님 소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코 앞에는 생존경쟁이 펼쳐져 있고, 여기서 실패하면 당장 삶이 날 모욕할 것이라고 믿는 청년들에게, 결국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은 너무나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그 뜬구름 잡는 소리보다는 여성정책이 가져오는 당장의 비용에 민감해집니다. 이 비용의 보상이 언제 돌아올지, 돌아오기는 할지 알 수 없으니까요. 그나마 언젠가 청년 남성.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주면 다행입니다. 다수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고, 설득하려고 나서지도 않으니까요.


결국 이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전환 비용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자원을 제공하는 한편, 단기적 비용을 지출하면 장기적으로 보상이 있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단기적 비용을 감당하라는 요구는 그들에게 존재에 대한 무시와 폭력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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