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3 10:53
듀게에 오랜만에 영화 얘기 꽃 피워서 좋네요.
넷플릭스나 다른 ott서비스로 보는 것도 간편하지만 역시 영화는 스크린이지!
생각하게 만든 영화가 노매드랜드였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는 바닷가에 바로 면한 극장이 있는데요.
상영관은 2개밖에 없고
다 낡은 빨간 의자가 빼곡하고
그 앞에는 1미터 높이의 무대가 실제로 있는 그런 방도 있어요.
옛날 필름 영사기도 복도에 놓여 있고요.
광고 시간에는 극장주이기도 한 로칼가수가 같이 코비드를 이겨내자는 노래 We are in this together 를 부르는 클립이 상영되기도 해요.
(넉달동안 극장이 닫혀 있을때 만든 노래라고...)
물론 아주 비싼 동네이기 때문에 제 동네극장은 아니구요.
이 영화보러 멀리 멀리 바닷가 극장을 찾아왔죠. 제가 사는 동네에는 블록버스터 영화만 상영해서요.
지난번에 이 극장에서 본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극장을 채우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시니어 여성분들이었어요.
어딜가도 그걸 느낍니다. 영화 예술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들이나 좀 찾아서 보는 분들은
젊은이들이 아닙니다, 여기는.
노매드랜드 영화 경험은.. 음
눈호강 70 생각많아짐 30이라고나 할까요.
프랜시스 맥도먼드씨가 너무 착하게 나와서 좀 적응이 오래 걸렸어요.
이 분의, 책상에 발 척 올리면서 경찰을 위협하고
총을 자동차에 싣고 어딘가 떠나고 하는 모습에 훨씬 익숙해져 있었나봐요.
자기 일 잘한다고 써달라고 하고 아마존 가서 포장 일하고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그릴 닦으시는게
적응이 안되더라구요.
집에 Sisters on the fly라는 책이 있는데
카라반 생활을 정기적으로 같이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사진을 담은 책이예요.
이 책의 볼만한 점은 캠핑생활이 낭만화 되어 있어서
트레일러 안도 아주 경쟁적으로 예쁘게 꾸며 놓았고
사람들 카우보이 패션도 멋있고 가끔 노력봉사 하는 남편이나 남친들도 귀엽고 그래요.
그런데 노매드랜드는 음... 약간 매드맥스 같았어요.
포스트 경제위기의 미래풍경이라고나 할까요.
미니말리즘의 끝판왕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영화 속에서는 미국 개척시대의 파이오니어에 노매드들을 빗대는 대사가 나오죠.
다시 그 시대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게 미국의 쳇바퀴역사일까요.
분배에 소홀한 자본주의가 불러올 수밖에 없는 파국일까요.
근데 풍광과 음악은 정말 볼 만했어요.
저런 노매드는 적어도 미국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렇게 이동이 자유롭고 도로가 잘 닦여 있으면서도
치안은 아주 나쁘지는 않고
캐주얼 일도 시즌에 따라 구할 수 있고
가는 곳마다 다른 풍경이 있는 커다란 대륙
노매드가 가능한 조건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은
.. 슬픔이 아닌가 하네요.
깊은 슬픔과 절망이 없는 사람이 없어보였고
그들의 공동체같았고
저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앉은자리에서 죽고 싶은 사람은
흉내를 못낼 삶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어떤 영화를 만들어갈까 궁금하고..
이 극장에서 본 영화는 둘 다 여성영화, 둘 다 풍광이 좋은 영화, 둘 다 도전적인 영화였다고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영화관을 나서자마자 바다가 반겨주는 경험도 여전히 좋았고요.
노매드랜드는 정말 큰 극장 가서 홀짝홀짝 차나 커피 마시면서 보세요.
넷플릭스로 랩톱이나 폰으로는 절대 볼 영화가 아닙니다.
아마 십중팔구 자게 될 거예요.
또 보신 분들은 없으신가요?
See you down the road.
2021.05.03 11:15
2021.05.03 12:44
꼭 기억했다가 보고 싶습니다만... 영화관이 아니면 그 정취를 반도 못 느낄 것 같아요. 심저어 로데오라니!
2021.05.03 11:34
코로나 때문에 정부에서 특별히 갈구고 있는 직종에 종사해서 극장 가는 건 꿈도 못 꿉니다만. 이런 평들을 보니 정말 극장 가고 싶어지네요. ㅋㅋ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언젠가 (집에서) 보게 되면 모니터 말고 꼭 티비로라도 보는 걸로... ㅠㅜ
2021.05.03 12:44
벽을 채우는 크기의 티비를 꼭 마련하시기를..ㅋㅋㅋ
2021.05.03 11:49
아이맥스 버전도 있던데(국내 미수입), 큰 스크린으로 볼 수록 울림이 더 클 것 같았어요.
요즘은 출퇴근길에 OST를 들으며, 마음 속으로나마 그 길 끝에서 언젠가 다시 만날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I'll see you down the road."
2021.05.03 12:43
저도 언젠가는....
2021.05.03 16:16
2021.05.03 16:45
넷플만 기다렸는데 정말 혼란스럽네요. 저희 동네 극장은 국장 자리만 있는 거 같아서. 극장에서 보게 된다면 하우님에게 먼저 자랑할게요^^
2021.05.03 16:49
저 아래 관람 후기 짧게 올렸었어요. 영화가 좋아서요.
나이들수록 인생 뭐 있나 살고 싶은대로 살아야지 싶은 생각을 강화시키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원작 논픽션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도 합니다. 책도 함 읽어보려고요.
2021.05.03 19:17
2021.05.04 01:44
정신없이 전개되는 영화보다는 잔잔한 영화일수록 영화를 보고 나서 곱씹어보게 되는 내용들이 많은 거 같아요. 이동진 평론가의 노매드랜드에 대한 분석/평을 유투브로 봤는데 생각보다 잘 만들고 깊이있는 영화더라고요.
일단 이 작품은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원작을 읽고 영화화하기로 해서 영화를 만들 감독을 물색하다가 'The Rider'를 보고 이 감독이면 잘 할 수 있겠다싶어서 영화 감독으로 고용했다고 하죠. 원래는 프랜시스가 출연을 안 하고 원작에서처럼 영화 속에 나오는 린다 메이를 주연으로 하는 거의 다큐 같은 영화로 가려고 했다가 자오 감독이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펀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허구와 실제를 섞는 방식을 제안했고 원래 프랜시스가 나이 65세인가 넘으면 '펀(fern 고사리류의 풀)'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짓고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는데 영화 속에서 그렇게 해보도록 한 거죠. 그리고 그 결정은 다 아시다시피 탁월한 선택이 됐고요. 영화 속에서 직업 배우는 프랜시스와 David Strathair(성 발음이 헷갈려서) 정도이고(다른 조연 중에도 있겠지만) 나머지는 거의 다 실제 노매드들이 자기 자신을 연기했죠. 그리고 노매드들의 정신적 지주 격인 밥 웰스는 프랜시스가 영화 배우인지도 모르고 실제 노매드로 생각하고 나중에 프랜시스한테 죽은 남편에 대한 위로를 해줬고 이에 죄책감을 느낀 프랜시스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처럼 프랜시스는 영화 속 캐릭터처럼 실제로 영화 속 알바들을 했고 다른 노매드들은 그녀를 실제 노매드로 생각했다고 해요. 그 외에 영화 속에서 펀과 데이빗의 관계, 데이빗의 행동이나 역할이 주는 의미. 영화의 시작과 끝이 맞닿아있다는 것 등 여러가지 해석을 이동진 평론가가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흥미로운데 한번 찾아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암튼 그냥 한번 보고 나면 잔잔하고 애잔한 다큐 같은 영화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길래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받았을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 영화에서의 노매드들과 미국 역사 속에서의 다른 비슷한 경우들을 비교했는데요. 서부 개척사, 금광 러쉬, 대공황 이후 등은 일시적인 그러니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한 후 정착하는 과정을 겪었지만 이 영화 속의 노매들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계속해서 유랑한다는 차원에서 차이점이 있다고 설명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들은 '홈리스'가 아니라 단지 '하우스리스'일 뿐이고 이런 삶은 그들이 선택했다는 것과 왜 노매드들 중에는 흑인이 없냐는 질문에 흑인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슬픈 현실 즉 흑인들이 밴에 거주하면서 유랑하면 경찰의 단속에 바로 걸린다는 사실을 짚어주네요.
암튼 한번 더 감상해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작년에 입소문 돌 때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드디어 개봉해서 봤는데 바로 2회차도 찍었습니다. 너무 좋더군요. 엊그제 글도 올렸었는데 노매드랜드 바로 전에 만든 클로이 자오 감독의 두번째 장편 로데오 카우보이도 강력추천합니다. 이 작품을 보고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노매드랜드 감독으로 낙점했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