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3 13:50
저는 김기영의 팬은 아닙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십여년 EBS에서 상영하는 복원 전 버전인 <하녀(1960)>를 보고 머리를 꽝 맞은 것처럼 놀라기 전에는 별 관심이 었었어요. 이후 2008년 부산 영화제에서 공개한 <하녀> 복원판의 고화질에 감탄해서 dvd를 소장하긴 했지만 다른 작품을 굳이 찾아볼 생각은 안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각종 영화제를 통해서 본 김기영의 다른 영화인 <반금련>이나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는 정말 그냥 그랬습니다. 낡아도 분위기 있어 보이던 흑백 <하녀>와 다르게 색깔이 날아간 컬러 영화들은 너무 오래되 보였고, 에피소드 형식인 <나비>는 재미라도 있지 <반금련>은 줄거리도 기억에 안 남을 정도로 별로 였거든요.
그런데 윤여정 아카데미 수상기념으로 데뷔작인 <화녀>를 재개봉하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선 <충녀>를 상영한다기에 보러 갔지요.
기대는 안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화녀>는 <하녀>와 같은 내용이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는 역시 <하녀>가 <화녀>보다 낫습니다. 맹하고 순진한 느낌의 젊은 윤여정은 매력이 있지만 귀기서린 괴물을 연기하는 이은심보다는 못합니다. 스릴러와 호러 효과가 강렬한 <하녀>와 달리 <화녀>가 더 수위가 높은 부분은 엉뚱한 서브플롯입니다.
<하녀>와 가장 다른 <화녀>의 점은 주인공이 식모 자리를 소개받은 직업소개소 원장이 고향에서 강간범을 짱돌로 막은 적 있는 명자의 과거를 들먹이며 돈이나 몸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서브 플롯 부분입니다. 이 악당이 한밤에 숨어들어 마구 들이대자 과거의 트라우마가 남아있던 명자는 마침 손에 잡히는 요강으로 때려서 죽여버립니다.
(이 부분에서 신세대 여러분은 궁금하실 겁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왠 요강? 하지만 1970년대 초반생인 저도 어렸을 때 집에 요강이 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실내 수세식 변기가 있었지만 집에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으면 요강을 방에서 사용하는 문화가 남아 있었거든요. 우리 집에 있던 건 <화녀>에 나온 것 같은 빨간 요강이 아니라 평범한 흰색 요강이었지만.)
요강과 함께 분뇨 세례를 받은 협박범은 욕조에 받아놓은 물에 빠져서 욕조물을 *물로 만들고 죽은데, 명자는 이 *물을 술이 취해 물을 찾는 남편에게 먹이고(!), 나중에 깨어나자 그가 술김에 강도를 죽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에게도 살인범은 남편이니 시체를 처리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양계장을 운영하던 아내는 편리한 단백질 분쇄기에 시체를 갈아서 닭에게 모이로 줍니다(!!). 나중에 이 닭들이 낳은 알과 닭을 먹는 간접 식인(!!!)이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요.
충녀는 하녀/화녀 시리즈와 다른 줄거리이긴 한데, 비슷한 부분도 있습니다. 오빠의 학업을 지원하러 술집에 나선 주인공인 술집 고객이자 불능인 남편을 치유해서 그 집에 첩으로 들어갑니다. 어린애를 원하는 첩을 무찌르려고 본처는 남편에게 약을 먹여 불임수술을 시켰는데(!), 첩과 남편이 살림을 차린 셋집 냉장고에서 어린 아이를 발견(!!) 업둥이를 키우지만, 배고프면 하수구의 쥐를 잡아 피를 빨아먹는(!!!) 이 아기는 어느 날 밤 역시 냉장고에 아기 시체/인형만 남기고 사라져 버립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어떻게 그게 말이되?라고 생각하시는게 당연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영화가 흘러갑니다;;;;;)
참, 이 영화 속 쥐는 다행히도 <하녀>나 <화녀>의 시꺼먼 시궁쥐가 아니라 이 집 딸이 쥐띠 해라고 선물로 받은 애완용 흰쥐입니다.(1972년은 쥐띠해가 맞습니다.) 이 악명높은 감독이 젊은 윤여정에게 쥐들을 부었다는 이야길듣고 시궁쥐를 상상하고 질색을 했지만, 흰 쥐하고 해도 그리 상황이 낫지는 않네요. 쥐를 잡아먹는 설정상 아기가 쥐를 손에 쥐는 장면이 나오는데 뉘 집 애기를 희생시켜 이런 장면을 찍었는지 좀 안되기는 했습니다.
영화 막판에 유리 어항에 담아 놓은 쥐들에 물을 부어 익사시키는 장면도 나오는데, 부디 헤엄 칠 줄 아는 쥐들을 누군가 건져 주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대로 된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두 영화 다 내가 뭘 봤지? 싶은 황당한 면들이 있어서 이런 두서없는 이야기 밖에 안나와서 죄송합니다~~~
2021.05.13 14:10
2021.05.13 14:47
요강. 아파트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엔 필수품이었습니다. 애들은 밤에 특히 겨울에는 마당 지나야 있는 화장실(변소) 쓰기 어려우니까요.
빨간 요강은 못 봤고 주로 흰 사기나 스텐을 썼는데 말이죠. 아마 듀게에도 기억에 남아 있는 분들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고 김기영 감독 영화는 정말 코엔 형제 뺨 때리는 걸요? 저는 아직 한 편도 못 봤는데 덕분에 관람 욕구가 솟습니다.
2021.05.13 16:41
저도 한 편도 못 봤는데 듀게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편은 봐야겠다는 결심이 포인트처럼 쌓이네요. 그런데 코엔이라...
2021.05.13 16:13
2021.05.13 17:51
강변에서 발견된 시체는 알아보기 쉬운 머리 부분만 보이기에 나머지 부분이 분쇄기에 들어갔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시체 일부가 강변 모래에 뭍여서 안보인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이때는 한강 개발 전이라 강변에 모래사장이 있거든요. 그렇더라도 여자 혼자 덩치 큰 남자의 시체를 강까지 가져가기보다는 단서를 흘리기 위해 일부만 버렸다는게 더 말이 된다고 보았고요. 이 영화에서 이런 논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2021.05.13 21:41
2021.05.13 23:16
혹시 1980년대 큰인기를 끓었던 V(브이)의 쥐먹는 장면이 화녀충녀를 벤치마킹한건 아니겠죠
2021.05.14 16:14
닭모이 이야기는 공갈입니다. 신경전이죠. 절대 자기 남편은 사람을 죽일 인물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범인은 명자라는 확신을 가지던 부인이, 그대로 경찰에 실토할 용기는 없는 상태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결국은 시체를 발견하라는 식으로 던져둔 것이었죠.
전 화녀를 더 좋아하는데, 하녀를 본지 오래되어, 하녀를 다시 확인해봐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겠어요.
2021.05.16 21:45
시체 처리에 대해서는 두 여자가 직접 말합니다.
'시체를 들키게 내버렸드군요.닭을 먹인 줄 알았드니.'
' 이상해서! 신원이 밝혀지라고 보이는 데 버렸지!'
시체가 애매하게 상반신만 보이긴 하더군요.
저도 <하녀>가 <화녀>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그게 김기영의 원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다 변주라고 생각하고요. <하녀>는 지금 봐도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스릴이 있는데 <화녀>는 신파가 훨씬 추가되어서 뭔가 인간적인 내용이 되어버렸죠.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찾는지는 개인마다 다를텐데 저는 감정은 최대한 생략하고 관계를 도식화해서 태엽바퀴들처럼 인간이 움직이는 <하녀>가 훨씬 더 압도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충녀>의 갓난아이 부분은 좀 사족이라고 생각하고 딱히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김기영이 개인적으로 인간적 연민을 다루는데 별로 능하지 않거나 흥미를 못느끼는 감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중성이나 흥행을 위한 타협적 장치로 넣은 신파가 그렇게 불균질해지고 불확실해지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