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는 심심한 이야기입니다. 큐 클럭스 클랜이 나와서 스티븐 연을 나무에 매달지 않습니다. 아이가 납치되거나, 토네이도로 집이 날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긴장감은 계속 거기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만큼 농촌의 풍경이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면 농촌지역 이민자의 일상은 작은 사건으로도 아프게 깨지거든요. 예를 들어서 물이 안나온다든가, 전기가 끊긴다든가, 누가 뱀에 물린다든가. 


한 한국인 부부가 1970년대에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옵니다. 10년 동안 부부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고 그 돈은 남자의 가족 (시댁)에 들어가서 시댁은 이제 잘 삽니다. 그동안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생겼고 이제는 아내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올 차례입니다. 남자는 병아리 똥구멍만 보면서 살 수 없다며 미국에서 토질이 좋다는 아칸서스에 땅을 얻어 이주합니다. 트레일러를 개조한 집에서 살면서 창문 없는 창고에서 병아리 감별을 하고, 낮에는 농사를 짓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온 친정 어머니는 태평하기만 한데 손자 데이빗은 할머니 미국에 왜 왔느냐고 합니다. 할머니 때문에 엄마 아빠가 싸운다면서요. 


제가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감정 이입을 한 존재는 한예리가 연기한 모니카입니다. 엄마 모니카는 아들 딸을 보호하고 친정 엄마를 먹여살려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10년동안 번 돈은 시댁으로 들어갔고 아이에게는 심장 문제가 있는데 남편은 50에이커에 농사를 지어서 한인마켓에 납품을 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네요. 장남인 남편은 자신의 가족이 어디부터 어디까진가 감을 잡지 못합니다. 건강 문제가 있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쓰레기를 태우지 않고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도시에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분들은 스티븐 연이 연기한 제이콥에 많이들 감정 이입을 하시더군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스티븐 연은 '워킹 데드'에서 서양 여자와 연인관계를 연기했습니다. 넷플릭스의 쇼 'Ugly Delicious'에서 데이빗 장 (모모후쿠 창업자)과 그 사람의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도 이야기하지만, 스티븐 연이 '워킹 데드'에서 상대방 배우 여자와 키스하던 날 한국계 가정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나온다 나온다 했다고 토로하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 말이예요. 스티븐 연은 이제 이 미국적인 이야기 - 개척자의 이야기- 에서, 좀 더 알기 쉽고 오래된 상징이 됩니다. 아담의 역할입니다. 아담이 받은 저주가 그런 거였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낮 동안에 삽질하고 밤에는 몸이 아파서 끙끙대던 아버지. 팔이 아파서 병아리 통을 떨어뜨리는 아버지. 아들에게 한 번 쯤 성공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 주류사회의 여자와 키스도 못하던 아시아계 배우들이, 이제 미국의 상징인 농부 (로라 잉걸스의 '초원의 집'을 생각해보세요)를 넘어, 부실하지만 부실한 대로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사람의 아들'을 스크린에서 보여줍니다. 제이콥은 어린 아들에게 말합니다. 수평아리는 버려진다. 쓸모없기 때문이야.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아시아계 아버지들이 보면서 감정 이입을 하겠지요.


유튜브 댓글을 읽어보니까, 놀랍게도 어린 아들 데이빗, 어린 딸 앤 역할에 감정 이입을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더군요. 나 역시 이민자의 자식으로 백인 커뮤니티에서 자라면서 너무나 외로웠다. 그러나 나에게는 데이빗처럼 의지할 할머니가 없었다. 이 영화에서 할머니는 애물단지고, 가족들의 소출을 부주의하게 태워버린 제사장이자, 병을 짊어지고 있어 (아마도 중풍이겠죠) 계속 가족들에게 금전적 부담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외로운 이민자의 자식에게는 그런 할머니도 마음을 의지할 존재이고, 있었으면 했던 상대였다는 거죠. 이민자 부모들이 돈 문제로 싸우던 밤들. 자식들이 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싸웠어도 아이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싸움 장면이 각별히 와닿는다는 댓글도 꽤 되더군요. 그런 사람들에게 미나리는 어린 데이빗의 이야기입니다. 이민자 2세 어린이와 할머니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죠. 


트위터에서 enhance님 (이영두 님)의 트윗을 보니까, 지금 70대-80대들에게 있어, 영화 '미나리'는 이민간 친구들의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를 들으며 떠났던 친구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 스스로는 영화화 하지 못했죠.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칠 영화적 언어가 없었고 심적 여유가 없었죠. 미국 이민간 친구들의 자식 세대가 어른이 되어 만든 부모세대에 관한 영화가 '미나리'인 거죠. 누군가에게 이건 윤여정의 이야기입니다. 70대 한국 여성분들에게 있어 윤여정 배우의 영화적 성공은, 윤여정 배우의 힘들었던 젊은 날에 대한 복수에 가깝게 느껴지는 모양이더군요. 


아이작 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가족 영화라고 하네요. 코멘트를 빌려옵니다. 


"'미나리'는 가족에 관한 영화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를 어떻게 말할 지 배워가는 가족입니다. 어떤 미국의 언어나 어떤 외국의 언어보다도 심층적인 언어지요. 그건 마음의 언어입니다.' 

“Minari is about a family. It’s a family trying to learn how to speak a language of its own,” he said. “It goes deeper than any American language and any foreign language; it’s a language of the heart.”


이렇게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를 명작이라고 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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