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쯤,

<Le Zirasi>에 실릴 기사를 쓰기 위해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30년 동안 세이초의 전담 편집자였던 후지이 관장과 미팅하기 전
시간이 남아서 슬슬 기념관을 돌아보다가

묘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기념관 한가운데 작가 세이초의 집을 복원해 놓았는데

집 한켠에 문예지 편집자들이

(세이초의 원고를 기다리며) 머무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방을 보자마자 당시의 풍경이랄까,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되더군요.  

 

...A 문예지 편집자가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한 시간쯤 후에 B 잡지 편집자가 들어온다.

서로 악수를 하며 안부를 물은 그들이 마주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가끔은 목소리를 낮춰, “세이초 선생님에게는 정말 질렸다니까,

이번에도 원고를 안 주시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라며 흥분한다...
 
저도 예전에 이 년쯤 잡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마감이 두 달에 한 번씩 돌아왔는데,
 
한꺼번에 여러 필자들의 원고를 챙기다 보니

마감일에 임박해서는 혼이 달아날 지경이었습니다.

필자들이 제각각 마감에 임하는 태도가 달랐거든요.

 

기억나는 대로 몇 가지 유형만 정리해 보자면―,
 

 

모범생형_마감을 칼같이 지키는, 많은 편집자들의 로망과 같은 필자들입니다.

              심지어 마감일 하루나 이틀 전에 원고를 주기도 하지요.

              이런 필자들은, 청탁한 원고가 35매면 대개 1매의 오차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겪은 필자 중에는 진중권 선생이 그런 타입이었는데,

              김훈 선생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김 선배는 또 마감시간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거리의 컬럼은 오전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고,

어떤 기사도 오후 3시를 넘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간신문의 1판 마감시간은 오후 4시~4시30분입니다.

김 선배는 식사자리에서 저희들에게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마감시간을 넘긴 기사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어버리고

그 지면은 광고로 메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기사를 일필휘지로 쓴 건 아닙니다.

그는 사석에서 “오후에 갑자기 취재지시를 받을 때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 내린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큰 산처럼 밀려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_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by 권태호
 

 
 

 

적반하장형_마감을 지키지 않은 필자가 도리어 화를 내며

                 담당 편집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타입입니다.

                 유명 필자와 미숙한 편집자 사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언젠가 이와 관련하여 끼적끼적 뭘 쓴 적이 있는데 생각난 김에 옮겨봅니다.

 
 <모 잡지사에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첫 직장이었고, 나는 경력이 전무한 편집자였다.

모든 일에 미숙하던 시절,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대목은 필자들의 원고를 받아내는 일이었다.

엄연히 마감 시한이 정해져 있건만

열에 두셋은 당연하다는 듯 시한을 넘기기 일쑤.

대개 유명한 필자들이라 나로서는 감히 독촉전화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부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상당히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체면을 좀 지켜드리자는 차원에서 이분의 이름은 생략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하는데,

글쎄 이러시는 거다. 홍민 씨. 홍민 씨는 왜 나한테 독촉 전화를 안 해?

나는 독촉 전화를 자꾸 받아야 글이 써지는데 당신이 가만히 있으니까 한 글자도 안 써지잖아.

앞으로는 나를 좀 못살게 굴어줘. 제발.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사고방식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_<시사in>, 2008년 송년호 by 김홍민
 
 

 

 

천리안형_편집자는 대개 마감일을 속입니다.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거죠.

             아마 많은 편집자들이 그런 식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하지만 이런 안전장치도 출판사나 잡지사의 생리를 아는 필자들에게는 소용없어요.

             이날까지 꼭 달라고 하면,

             에이 거기 마감이 언제인지 뻔히 아는데, 다음다음 날까지 줄게,

             하고 전화를 탕 끊어버리거든요.

             <푸른 묘점>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봅니다.

 
 <노리코는 잡지 마감 직전이라 일에 쫓겨 다녔다.

필자들을 찾아다니며 원고를 받아오거나,

아직 다 쓰지 못한 필자에게는 원고를 재촉했다.

바쁜 인물일수록 원고 완성이 늦어져서 애가 탔다.

사흘 후에는 인쇄소에서 출장 교정을 봐야 하는데

한 기고가는 수화기 저편에서 “아직 괜찮지?” 하고 여유롭게 나왔다.
“곤란해요, 선생님. 모레가 마감이에요. 내일까진 주셔야 해요.”
“자네 잡지사는 교정이 끝날 때까지 아직 사흘이나 남았을 텐데. 속일 생각하지 마.”
이렇게 닳고 닳은 작가들이 많았다. >

 
 _<푸른 묘점> 중에서
 

 

 

읍소형_마감일 전에는 별 얘기가 없다가

          마감이 지나 독촉전화를 하면 그제야 왜 원고를 못 썼는지 설명하는 타입입니다.

          그 내용이 너무 구구절절하여 나는 사연을 듣다가 울기도 했다....
          는 건 농담이고, 쇄도하는 강연과 원고청탁을 딱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 약한 필자들일 경우가 많죠.

          이런 필자들에게는 편집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합니다.

          마침 적당한 팁이 적힌 문구가 있어서 발췌해 봅니다.
 
<청탁한 다음 편집자가 할 일은

때로는 저자를 격려하고 때로는 질타하며

때로는 힘이 되어주고 칭찬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는가 하면

때로는 속이면서(!!) 어떻게든 원고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어떤 갖은 수단을 쓰든지 원고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원고가 나오는 과정은 편집자로서도 시간을 요하고 부단한 노고가 필요한 작업이다.> 
 
 _<편집이란 어떤 일인가> by 와시오 켄야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 같은 유명 짜한 필자들도

마감일이 없었다면 저 위대한 소설들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라 술회했다는 얘기와 함께

언젠가 그에 얽힌 '가슴 찡한' 일화들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마감’이란, 때로 무섭기도 하지만(영어로는 ‘데드라인’),

한편으로 작가-편집자 들에게 추억을 선사하는 단어인 듯합니다.
 
음, 듀게에도 '마감'의 굴레에 갇혀 있는 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재미있거나 가슴 아픈 에피소드 간직하신 분.

 

혹은 '마감에 임하는 필자들의 태도'에 관해

저 네 가지 유형 말고 더 추가하면 좋겠다 싶은 게 있다 싶으신 분.

 

제가 이 유형 및 사연을 모아서

<Le Zirasi> 4호에 수록해 보고 싶은데,

도움 한번 주시겠습니까.

 

저희 블로그에서도 하고 있긴 한데

좀 더 많은 분들에게 받았으면 싶어서요.

아래 댓글 달아주시면 크게 고맙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아, <Le Zirasi>는 제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서 만드는

자체 소식지입니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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