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시간 16분이니 조금 긴 편이네요. '바바둑'의 제니퍼 켄트 감독이 만든 2018년작이고 장르는... 스릴러의 탈을 쓴 진지한 사회 드라마입니다. 스포일러 없게 적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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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크로우' 여성판쯤 되어 보이는 포스터네요. ㅋㅋ)



 - 때는 1800년대 초반, 장소는 호주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미모를 제외하곤 오만가지 안 좋은 스펙들만 골라서 고루 갖춘 여성 '클레어'입니다. 아일랜드인이고 고아에다가 도둑질로 생계를 해결하던 끝에 영국인들에게 재판 받고 범죄자 딱지가 붙어서 여기로 강제로 끌려왔어요. 말하자면 노역형 비스무레한 기간은 이미 끝나서 진작에 통행증 받고 일반 시민이 되어야 하는데 지역의 담당 장교가 클레어를 자기 성노리개로 써먹느라 시간을 질질 끌고 있죠. 심지어 그동안 남편도 만들고 아기도 만들었는데도 놓아 주질 않네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클레어와 그 장교의 상황을 눈치 채고 술김에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버리는 사건이 생기고, 후환이 두려워 도망쳐 숨어버리려 하지만 복수하러 온 장교가 한 발 빨랐죠. 남편과 아기를 살해한 후 승진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린 나쁜 장교놈. 모든 걸 잃었다는 분노에 사로잡힌 클레어는 뒷일 생각 않고 그 장교를 쫓아가 죽여버리려는데... 친하게 지냈던 다른 죄수가 '너 혼자 가면 장교 만나기도 전에 죽어'라며 호주 원주민 '빌리'를 길잡이로 억지로 붙여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클레어는 몹시 그 시대 사람답게 원주민에 대한 강렬한 편견과 차별 의식이 있고, 원주민은 원주민대로 백인들에 대한 원한이 깊죠. 과연 이 콤비는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복수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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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복수다 이 거지 깽깽이들아!!!)



 -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격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입니다.


 첫째로, 저엉말 보는 사람 불편하게 만드는 폭력 장면이 자꾸 나와요. 자꾸 나오고 또 나오고 계속 나오죠. 성폭행 장면만도 세 번에서 네 번은 나왔던 것 같고 (한 영화에서 이만큼이라니 개인적으론 최고 기록인 듯?;) 아기, 애,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참 골고루도 사람 죽어 나가구요. 이걸 오락으로 소화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쓸 데 없는 고어 같은 건 안 나오고 성폭행 장면도 자극적으로 묘사되진 않습니다만, 대신 정말 불편하게 묘사가 되죠.


 둘째로, 척 봐도 복수극인 척 하는 이야기이고 복수도 하긴 하지만 복수극이 아닙니다. 아... 아니 복수극은 맞는 것 같은데 (뭔 소리냐;) 영화를 처음 보면서 예상하는 그런 복수극은 아니에요. 초반에 클레어가 당하는 장면들을 늘어놓아 관객들의 복수에 대한 열망을 엄청나게 부추겨 놓고선 영화 중반쯤부터 그걸 의도적으로 샥샥 피해가며 다른 얘기를 해요. 물론 다 보고 나면 왜 그런 식으로 시작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두 납득이 가도록 이야기를 짜 놓긴 했지만, 이렇다는 사실을 모르고 영화를 본 관객들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고 그 중 다수는 실망하는 게 당연하겠죠.


 그러니까 혹시 이 영화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두 가지는 확실히 감안을 하시고 보는 게 좋습니다.

 보는 사람들을 일부러 불편하게 만드는 궁서체로 진지한 사회물이며 장르적 재미 같은 건 아예 관심이 없다는 거.



 - 그러니까 결국 영국에서 온 호주 개척(?)자들에 의해 자행된 원주민 학살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클레어가 겪는 하층민 여성의 수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애초에 감독이 본격 여성&육아 호러 '바바둑' 감독 아니겠습니까) 어디까지나 핵심은 호주 원주민 얘기죠. (감독이 호주 사람이기도 합니다)


 에... 뭐라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위에서도 말했듯 주인공이 당시 영국 사회 기준 완전 바닥 계급이고 정말 이루 말로 못할 끔찍한 일들을 겪는단 말이죠. 그걸 또 영화에서 아주 리얼하게 보여주고요. 근데 그러고 분기탱천해서 떠난 여정에서 본의가 아니게 목격하게 되는 당시 원주민들 상황은 자기 상황보다 거의 배로 더 끔찍하단 말이죠. 그래서 자꾸 쌩뚱맞은 쪽으로 멘탈이 무너지고, 그런 구경을 한참 하다 보니 자기가 하겠다는 복수란 것도 참 애매하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결정적으로 그동안 자기가 성폭행 강도 살인마라고 생각했던 원주민들의 '실체'를 보면서 오히려 동류 의식을 느끼게 되고...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갑니다. 

 호주의 21세기 페미니스트 여성 작가가 멸족 당한 19세기 호주 원주민들에게 보내는 사과의 영상 편지 같은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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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이랬던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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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어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 다 보고 나니 '늑대와 춤을'이 떠오르더군요. 거의 비슷한 소재를 비슷한 주제 의식으로 다룬 영화인데 그 차이는 1990년과 2018년, 거의 30년의 세월만큼 커요.


 말하자면 순결한 액션 히어로였던 던바 중위와 다르게 이 영화의 클레어는 애초에 전과자인 데다가 전투력은 0을 뚫고 마이너스로 갈 처지인데 의욕만 넘치는 민폐 캐릭터구요.

 고로 클레어는 시작부터 끝까지 '활약' 같은 걸 할 기회는 전혀 얻지 못합니다. 딱히 액션이라고 할만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도 아니지만 그나마 뭐라도 하는 건 결국 다 빌리죠.


 또 뭐... 그렇습니다. '늑대와 춤을'은 미국 원주민을 소재로 다루며 우리의 주인공님을 통해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인정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도움까지 주면서 현대 미국인들의 죄책감 같은 걸 좀 덜어주는 느낌도 있었잖아요. 반면에 우리의 클레어찡은... 역시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깨닫는 거죠. 으앙 내가 그동안 x나게 잘못 생각했구나!! 

 하지만 그냥 그걸로 끝이에요. 완전 멋진 케빈 코스트너님처럼 간지나게 사악한 백인들을 처단하고 뭐... 그런 거 없음.


 뭣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힐링'의 순간 같은 게 전혀 없습니다. 찰나의 행복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구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세상은 시궁창, 클레어와 빌리는 시종일관 누구 상황이 더 시궁창인지 대결을 벌이는 라이벌이고 심지어 호주의 자연 풍광도 삭막하고 살벌하고 무시무시하게만 비춰집니다. 보는 데 체력과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는 영화에요.


 결말은 어찌보면 비슷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어차피 두 영화에 나오는 원주민 부족들 모두 오피셜로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이야기를 어떻게 맺든 결론은 같으니까요.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후 주인공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느낌이 확 달라집니다. '늑대와 춤을'의 던바씨는 이후로 어떻게든 잘 살았겠죠. 적어도 그런 느낌으로 영화가 끝이 났구요. 하지만 이 영화의 클레어는... 막판의 난장판을 생각해보면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며칠이나 더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부터 아주 회의적입니다. 그나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가장 형편이 나은 순간이 아니었을지. =ㅅ=


 그래서 둘을 굳이 비교하자면 '나이팅게일'은 '늑대와 춤을'의 무가당 농축 원액 버전 정도 되겠습니다. 영화가 아주 써요. 단맛이 1도 없어서 삼키기 어렵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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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기 전에 기대하게 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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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영화 속에서 보게 되는 장면)



 - 클레어를 통해 보여주는 감독의 페미니즘적 시각이 학살당한 원주민의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와 좀 아슬아슬하게 결합되어 있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외된 자들, 그리고 그들간의 연대. 뭐 아름답고 좋긴 한데 현실의 역사에서 그 원주민들은 그냥 철저하게 사라져버렸잖아요. 그 시절 아일랜드 여인들에겐 죄송한 얘기지만 좀... 분명한 차이가 있죠. '우리는 똑같이 소외되고 짓밟히는 처지이고 그래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관계!' 라기엔 저울의 균형이 좀 많이 안 맞는 느낌이랄까요.

 

 근데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조율(?)의 시도 같은 게 종종 보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두리뭉실하게 말하자면, 어느샌가 클레어가 반발짝 정도 물러서서 빌리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특히 엔딩 씬은 그런 측면에서 잘 짜여진 장면 같았어요. 클레어가 영화의 거의 첫 장면과 같은 행동을 하는데, 그 의미가 전혀 달라지면서 영화의 주제도 살리고 제목의 의미도 알리고 그러면서 이 이야기 속 클레어의 존재 이유도 설명을 해주는 느낌.



  - 음... 역시 이런 진지한 메시지가 있고 논쟁점이 있는 류의 영화들은 제겐 버겁습니다. 글을 적으면서도 스스로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ㅋㅋ 그래서 이만 정리.

 '재밌는'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감상 자체가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속죄... 는 아니고 사죄 여행에 동참하는 느낌이랄까요.

 각본도, 연출도, 연기도 모두 고퀄이기에 잘 만든 영화를 감상하는 기본적인 보람은 느낄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류의 영화들은 보고 나서 관객이 뭘 얻고 뭘 깨닫는가... 도 중요한 평가 포인트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좀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얄팍하고 짧은 생각인 건 압니다만, 제가 왜 200년전 호주에서 영국인들에 의해 자행된 원주민 학살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껴야하는지 머리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지만 솔직히 크게 와닿지는 않... (쿨럭;;)

 영화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분석하고 평가하고, 그런 감상 활동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저보다 훨씬 알차게 보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그런 활동을 별로 즐기지 않는 분들이라면... 훌륭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네요. 저 지금 머리 아파요. ㅋㅋㅋㅋㅋ




 + 주인공의 얼굴을 보는 내내 '분명 어디서 봤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질리언 앤더슨 주연의 수사물 '더 폴'에서 연쇄 살인마와 엮여서 3시즌 내내 시청자 빡치게 하던 그 철 없는 10대를 맡았던 분이더군요. 맡은 캐릭터도 판이하게 다르거니와, 그 몇 년 동안 인상이 엄청 성숙해져서 못 알아 봤습니다. 연기는 좋았구요. 극중에서 아일랜드인으로 나오는데 '더 폴'의 배경도 아일랜드 벨파스트였고 실제로 배우 본인도 그곳 분이더군요. 그리고 영화 속 노래를 다 직접 부른 걸로 나오는데, '더 폴'에서도 노래하고 가수 되고 싶어 하는 캐릭터였죠. 원래 배우 개인기인가봐요.


 같은 맥락으로 영화에 나오는 비중 있는 원주민 캐릭터 두 명을 실제 호주 원주민의 후예들(부족은 다릅니다만)로 캐스팅 했다고 하고요. 그 분들 입장에선 참 의미가 큰 영화겠다는 생각도 들고, 감독이 이래저래 참 궁서체로 진지한 분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그랬습니다.


 

 ++ 아. 그리고 저 '늑대와 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ㅋㅋㅋ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재밌게 보기도 했고, 1990년에 헐리웃 미남 라이징 스타 배우가 직접 제작, 감독, 주연 맡아서 나온 영화가 그 정도면 30년이 지났을지라도 칭찬 받을만 하다고 보구요.



 +++ 요즘 트렌드와는 좀 다르게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꽤 단순해요. 백인 남성은 다 빌런이고 원주민은 선하며 백인 여성은 그 중간 정도... 라는 느낌?

 근데 그게 그리 거슬리거나 하진 않았어요. 역사적으로 지은 죄가 워낙 크고 또 그게 이제와서 씻을 수 없는 것이고 하니, 사죄를 하려면 화끈하게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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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쁘게 차려 입은 빌런들의 행복한 한 때.)



 ++++ 근데 정말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요. 제가 근래에 보고 있는 영화, 드라마 등등 중에 비교적 근작 컨텐츠들만 놓고 생각해보면 대부분이 여성 원탑 주인공이거나 창작자가 여성이거나... 그렇군요. 이렇게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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