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랍스터>, 믿을 수 없는 나레이터

2021.05.06 00:53

Sonny 조회 수:636

정ㅅㅇ 평론가의 해설을 듣고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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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의 중후반부까지는 어떤 여자의 나레이션이 이어집니다. 이 나레이션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노리는 것은 보시는 분들이 다 아실 테지요. 데이빗의 자전적이어야 할 이야기는 이 나레이션 보이스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로 더 강하게 다가오면서 관객이 극에 몰입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건 이야기구나, 이건 지금 시간과 공간적으로 불가능한 해설이 들어가있는 픽션이구나... 설정만으로도 썰렁한 이야기가 더 썰렁해집니다. 중간중간 쓰잘데기없는 슬로우모션은 "연애를 안하면 동물로 변하고 마는"이 말같지도 않은 설정에 괜한 비장미를 더 보태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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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소격효과를 위한 것이라면 나레이션이 극 끝까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극 전체가 이 해설 때문에 붕 뜨게 되고 이 이야기 전체가 픽션이라는 걸 환기시킬 수 있겠죠. 이 나레이션은 레이첼 바이즈의 목소리로 나오기 때문에 극중의 근시여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해설은 중간중간 근시여자가 "나는"이라고 1인칭을 쓰고 있으며 "그가 나에게 말해주었다"같은 과거시제로 진행됩니다. 즉 이것은 근시여자가 전지적 시점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나레이션은 노트가 발각되면서 멈춥니다. 근시여자의 목소리가 메이드의 목소리로 옮겨가면서 여태 근시여자의 나레이션이 이 노트에 적힌 것이었다는 것을 관객은 알게 됩니다. 여태까지의 나레이션은 근시여자가 보고 들은 것을 메이드가 읽고 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액자의 액자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근시여자가 보고 들은 것을 적은 노트라면, 근시여자의 이 이야기는 결국 주인공인 데이빗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것입니다. 데이빗이 말하는 걸 근시여자가 다시 말하는 거죠. 그런데 이걸 메이드가 보고 읽고 있습니다. 데이빗의 이야기를 근시여자가 이야기하는 걸 메이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재구성한 이야기는 다시 액자 안에 갇히면서 관객은 이 이야기와 더 멀어집니다. 이 나레이션이 끝난 다음에 근시여자가 눈이 멀게 되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일종의 은유일지도 모릅니다. 여태 뭔가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게 다 눈먼 사람의 상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은 근시여자가 완전히 눈이 멀고 난 다음의 이야기부터만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이건 누군가 재구성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지적 시점에서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객은 처음으로 극 중 그 누구의 주관도 들어가지 않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관객이 이야기와 멀어질 때, 관객은 이야기의 진실성과 이야기의 화자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메이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진실일까요? 그는 딱히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호텔에서 자기한테 불리한 내용을 데이빗이 말했을 때 그가 이 부분을 건너뛰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극에서 메이드에 대한 묘사가 몇부분 나오는데, 이를테면 데이빗이 메이드의 전남편인 치과의사에 대한 불평을 듣는 부분입니다. 그가 정말로 전남편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는지 아니면 대장에 대한 험담을 했는데 그걸 뜨끔하면서 바꿔 읽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근시여자는 있는 그대로 다 옮겨적었을까요. 근시여자는 데이빗을 처음에 봤을 때부터 반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데이빗이 다른 여자를 칭찬하거나 이뻤다고 하는 부분, 혹은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부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왜곡하거나 생략했을지도 모릅니다. 근시여자는 그렇게 객관적인 나레이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데이빗은 객관적인 나레이터일까요. 관객은 이미 이 극에서 파트너를 만들기 위해 어떤 식으로 거짓전략을 짜는지 확인했습니다. 존은 코피를 일부러 터트렸고 데이빗은 비정한 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시여자가 데이빗에게 보고 들은 이야기 자체가 데이빗의 거짓을 포함한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데이빗의 이 이야기 전체가 지금 근시여자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남자를 또 연기하고 있는 결과일 수도 있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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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평론가님이 던진 질문을 상기해보게 됩니다. 근시여자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이 극중 화면은 누구의 상상일까요. 데이빗의 상상일까요? 근시여자의 상상일까요? 노트를 읽고 있는 메이드의 상상일까요? 아니면 그 낭독을 듣고 있는 외톨이파 대장의 상상일까요? 근시여자는 극중의 현실에서 이런 해설을 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건 지금 메이드의 목소리로 낭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이드가 읽고 있는 걸, '근시여자 너는 지금 이걸 이렇게 말했겠구나'라고 그의 목소리를 이입한 결과물입니다. 이 영화는 대체 누구의 이야기인걸까요? 액자의 액자의 액자에서 관객은 이야기와 완전히 멀어지게 됩니다.


진실되지 않은 나레이터의 문제는 나레이터가 없는 최후의 이야기를 질문합니다. 여태까지 누가 누구를 짝으로 찍어놨는데 그게 안되서 실패했고 연애하면 안되는데 연애를 했다는 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거나 억측으로 단정지어버리게 된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의심할 수 없고 가공되지 않은 하나의 진실이 펼쳐집니다. 근시여자는 눈이 멀었고, 데이빗은 자기 눈을 칼로 찔러야합니다. 이것만큼은 관객이 거리를 두거나 진위를 의심하며 멀어질 수 없는 최후의 진실입니다. 데이빗이 자기 눈을 찌를 것이냐 말 것이냐. 어떤 세계의 부조리를 증언하는 모든 이야기가 다 엄살이고 과장일 수 있지만 지금 데이빗이 자기 눈을 찔러야하는 이 부조리만큼은 진실입니다. 아무리 도피하고 이 전 세계의 모든 부조리를 의심해도 결국 종착하는 하나의 진실은 그가 눈을 찔러서 실명해야한다는 위기 자체입니다. 어쩌면 <더 랍스터>의 액자구조는 그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의미가 없다고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진실성과 무의미함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진실 앞에서 너무나 위태롭고 불안하다는 불변의 진리를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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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이런 이야기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근시여자의 나레이션은 정말 끝난 것일까요? 이 여자가 눈이 멀었는지 안멀었는지 그걸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하필이면 희한하게도 근시여자가 도시에 수술을 받으러 갔을 때는 여자 세명만 갔습니다. 눈이 멀었다고 하는 현장에 데이빗이 없었고 다른 증인도 없었습니다. 근시여자가 장님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메이드는 근시여자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아는 마지막 증인인 대장은 얼굴을 내민 채로 구덩이에 파묻혔습니다. 근시여자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의 진위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근시여자의 나레이션은 끝나지 않았고 이 나레이션을 들은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데이빗은 혹시 시험받고 있는 게 아닐까요? 비정한 여자가 데이빗의 비정함을 시험했듯이? (근시여자가 정말로 노트를 실수로 흘렸을까요? 걸리면 큰일이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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