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2 20:49
- 2019년에 나온 미국 영화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아니구요, 런닝타임은 100분이 안 되네요. 스포일러는 없게 적겠습니다.
- 제시 아이젠버그의 캐릭터... 라고 하면 보통 두 가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까불까불 얄밉게 재수 없는 놈 아니면 예민 섬세하면서 찌질찌질 궁상맞은 놈. 이 둘이 배합되는 경우도 많은데 암튼 이 영화에선 매우 심플하게 후자입니다. 소심하고 나약하고 사회성 떨어지는 찌질 회사원이죠. 보면 함께 사는 가족은 없고 직장 안에서든 밖에서든 친구도 하나 없이 집에서 키우는 닥스훈트님 한 분에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붓구요. 사람들, 특히 다른 남자들에게 늘 개무시당해도 혼자 정신승리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런 캐릭터에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밤중에 개사료가 떨어진 걸 알고 동네 마트에 걸어가서 그걸 사오다가... 헬멧을 쓴 오토바이 무리들에게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지갑을 털리는 아주 시리어스한 봉변을 당합니다. 그 후론 집 밖에 나가는 것부터가 무서워져서 결국 총포상에 가서 권총도 하나 구입하고. 그래도 무서워서 덜덜 떨다가 동네 합기도 학원을 발견하죠. 에라 모르겠다 하고 용기를 내서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우리 제시군은 어설프고 허접하게나마 본인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연습을 하고. 거기에 점차 빠져들면서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러니까 그쪽이 제 차에 문콕을 시전하는 걸 분명히 보았으나 또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러지 않으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 별 문제는 없...)
- 장르가 코미디라는 얘길 안 듣고 보면 공포스런 분위기의 스릴러 무비로 보게된다... 는 면에서 '복수는 나의 것' 생각이 나는 영화였습니다. 아니 사실 '복수는 나의 것'은 그런 얘길 듣고 봐도 코미디로 보기 어려운 영화이긴 하죠. ㅋㅋㅋ 반면에 이 영화는 모르고 봐도 결국 코미디구나... 라고 눈치를 챌 정도는 됩니다.
암튼 그만큼 이 영화가 어둡고 삭막하며 느릿느릿한 영화라는 얘기입니다. 코미디가 아닌 건 아닌데, "음? 지금 이건 분명히 웃으라는 장면인데 분위기상 웃기가 좀 그렇군?" 이라는 느낌 정도.
근데 정말로 이게 취향에 안 맞아서 '전혀 안 웃겨!!!'라고 생각하며 보게되는 분들이라면 아마 뒤로 갈 수록 더 힘들어질 거에요. 처음엔 그래도 상당히 현실적인 톤으로 흘러가던 이야기가 막판으로 가면 거의 환타지급의 세상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이게 장르가 코미디라고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만 한데 그냥 진지한 다큐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게 되면 굉장히 난감해지거든요.
그러니까 기대치 조정이 필요합니다.
굉장히 어둡고, 난폭하고, 암담한 분위기의 영화에요. 까불이 제시 아이젠버그가 호신술 배우면서 벌이는 유쾌한 소동! 같은 건 절대, 네이버입니다.
(마이 네임 이즈 센세이(!!?))
- 꼭 '베스트 키드'에 오마주를 바치는 듯한 도입부가 붙어 있긴 한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전혀 아니구요.
블랙 코미디(본인들 말로는 '다크' 코미디지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이 역시 현실의 어떤 문제에 대해 풍자하고 비판하는 게 주목적인 진지한 영화죠.
그 풍자 대상은 아주 선명합니다.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 위주의 폭력(적) 문화가 타겟이고 런닝타임 내내 그걸 비꼬고 조롱하다 쌍욕을 퍼붇는 영화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인공이 발을 들여 놓은 합기도장은 그런 폭력 문화의 집합체구요. 타고난 스펙상 본의가 아니게 그런 문화의 외부인으로 살아왔던 주인공이 강도 사건을 계기로 삼아 그 문화에 발을 들여 놓고, 심지어 그 안에서 인사이더가 되면서 겪는 변화를 보여주고. 거기에 심취했다가 자기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릴 위기에 처하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 그런데 여기서 또 호불호가 갈릴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악의 집합체인 합기도장과 관장을 묘사하는 방식이 좀 과격한데요.
아... 그러니까 그냥 대놓고 비현실적입니다. 현실에 저런 도장과 운영자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거의 무슨 환상특급 에피소드에나 나올 법한 '지옥에서 올라온 합기도장'이라고나 할까요. 거기에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보다보면 '관장은 그렇다치고 니들은 대체 왜 이러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죠.
나름 이유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이 영화의 주제, '폭력적 남성 문화에 쩔어서 돌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한 방에 몰아서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과 사람들이고, 그러다보니 뭘 하든 되게 극단적으로 가는 거고, 그래서 아예 영화 자체를 문자 그대로 '우화'로 만들어 놓았거든요. 우리가 '혹부리 영감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이 캐릭터 왜 이렇게 비현실적이야?'라고 비난하지는 않잖아요. 이 영화의 비현실성도 대략 그런 맥락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비현실성 덕분에 얻게 되는 효과가 있겠죠. 맘 편히 작정하고 아주 독한 조롱과 야유를 아낌 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방식이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습니다. 다만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그렇게 크게 이끌어내긴 어려운 방식이기도 하고... 역시 실제 결과물이 좀 그렇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학원 수강생들.)
- 좋았던 부분을 말하자면 뭐,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좋습니다. 특히 제시 아이젠버그는 뭐. 대략 10여년쯤 전에 한국 영화판의 류승범 같은 느낌이에요. 둘이 닮았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양아치 캐릭터면 류승범!!' 이었듯이 지금 미국에선 '예민한 아싸 찌질이는 아이젠버그!!' 인 느낌이라는 거.
그리고 분위기 묘사가 좋아요. 정말 꿈도 희망도 없이 갑갑하고 위험하며 폭력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그럴싸해서 그 도장의 납득 안 되는 풍경들이 대충 싸잡혀서 받아들여지고, 이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마무리가 될지 끝을 봐야겠다는 맘으로 화면을 노려보게 됩니다.
(여자도 나오긴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트 직원 한 명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대사 있는 여자 사람이었던 듯. 역할은 큽니다.)
- 단점으로 말하자면...
결말이 맘에 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ㅋㅋ 앞서 말했듯이 '이건 우화다!' 라고 생각하고 보면 뭐 그러려니 하겠는데. 초반 분위기는 상당히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이 막나가는 결말이 좀 매끄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구요. 결말이 가리키는 방향이 맘에 안 들든, 그 비현실성에 당황하든 좀 난감해요. 특히 그 직전에 현실적인 해결책이 분명히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리고 그렇게 여러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재미를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무 어둡고, 너무 느리고, 너무 과격해요. 솔직히 괴작들 좋아하는 저는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만, 이거 보고서 세상에 하나도 재미 없었다고 마구 욕하는 사람이 있어도 딱히 쉴드 쳐 줄 생각은 없어요. ㅋㅋㅋ
마지막으로... 상당히 미국적입니다. 뭐 '폭력적 남성 문화의 폐해' 같은 얘기야 이 나라에서도 자주 튀어나오는 화두이고 저도 상당히 공감합니다만,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 이야기는 미국 이야기라는 느낌이에요. 주제 의식은 알겠고 그걸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확 와닿지는 않더군요.
- 정리하자면 대충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어둠의 다크니스 속을 밍기적 밍기적 느긋하게 헤매며 느릿한 어조로 아주 독한 농담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그 독한 농담에 담긴 메시지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 분들, 혹은 그냥 그런 농담 자체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재밌게 보실 수 있겠습니다만.
완성도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그 농담의 스타일이 그렇게 대중 친화적이지가 않아요.
또 결말 부분은 이것보다 좀 더 쉽게 납득할만한 다른 해결책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잘 봤지만 좀 아쉬웠고,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괜찮게 보기는 했고. 뭐 그렇습니다 전. ㅋㅋㅋ
+ 저 '센세' 역의 배우는 에밀리 모티머의 남편이더군요. 잘 모르는 분인데 연기는 괜찮았구요.
도장의 홍일점으로 나온 배우는 이 칙칙한 영화의 칙칙한 캐릭터 속에서도 꽤 매력적인데... 기억나는 다른 영화 속 모습이 없어요. 그래서 저 분이 나온 호러 영화 하나를 iptv에서 찾아서 보고 있습니다. 근데 거기에도 제시 아이젠버그가 나오네요. 이런. ㅋㅋㅋ
++ 어쩌다보니 정반대 성격의 영화를 연달아 보게 되어서 좀 재밌었습니다. '애비규환'이요. 주제는 어찌보면 비슷한 맥락에 있긴 합니다. 여성의 주체적 선택과 목소리를 주장하는 영화와 남성들의 폭력적 문화를 조롱하는 영화니까 뭐... 그런데 전자는 여성의 시선에서 정말 순둥순둥하고 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이쪽은 남성의 시선에서 정말 독하고 못돼먹은 어조로 이야기를 하니. ㅋㅋㅋ
+++ 끝까지 성별은 안 밝혀졌던 것 같지만 (이름은 불렸던 것 같은데 그게 기억이 안 나요;) 이 영화의 진짜 히로인은 이 분이십니다.
보신 분들은 다 공감하실 거에요. 정말로 이 분이 히로인이십니다. ㅋㅋㅋㅋ
2021.03.02 21:03
2021.03.02 22:02
음!? 하고 그 영화 출연 장면들을 찾아보니 이제사 기억이 살아나네요. 맞아요 거기서도 역할상 한계는 있었어도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벌써 10년 전 영화이니 역시 잘 안 풀리긴 한 모양이군요;
이 영화를 '파이트 클럽'이랑 엮어서 이야기하는 글들을 많이 봤어요. 말씀대로 닮은 점이 많고... 뭐 그렇다면 당연히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그쪽을 참고했겠죠. 음. 근데 보면서는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닮긴 했네요. 이야기하려는 바는 다르지만요.
2021.03.03 10:46
그래도 그동안 함께 일한 감독들이나 배우들의 면면이 만만하진 않더라고요. 출연작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 사람하고도 같이 일했다고?!?' 하게 됩니다.
다만 유명한 감독들(닐 마셜, 마이클 윈터바텀, 테렌스 맬릭,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안 유명한 작품에 나왔다든가, 꽤나 호평 받은 영화에 출연했더라도 함께 공연한 다른 주연 배우들이 훨씬 거물이고 연기도 잘 해서 상대적으로 묻힌다거나(예를 들어 최근작인 [The Father]는 바로 요 며칠 전 골든글로브에서도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을 정도로 명망 있는 작품인데, 하지만 함께 출연한 배우들이 올리비아 콜먼, 앤소니 홉킨스, 올리비아 윌리엄스, 마크 게이티스;; 라서ㅠㅠ), 확실하게 주연으로 출연한 좀 더 저렴한 영화들은 평이 어중간하거나 하는 식으로 매번 한두 끗발이 아쉬워요. 뭐, 그래도 할리우드에서 일 끊기지 않고 매년 꾸준히 서너 작품씩 주, 조연을 오가며 활동 중인 배우니까 안 풀렸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2021.03.03 11:45
그 말씀이 맞네요. 헐리웃에서 살아남아서 비중 있는 조연에 가끔 주연까지 맡으며 버티고 있으면 사실 되게 잘 나가고 있는 거죠. 제가 괜한 남 걱정을 했습니다. ㅋㅋㅋ
2021.03.03 14:05
2021.03.02 21:14
2021.03.02 22:04
ㅋㅋㅋ 맞아요. 으으으... 딱 그런 느낌이죠. ㅋㅋ
2021.03.02 21:22
2021.03.02 22:05
아... 안 됩니다. 그걸 생각하고 보시면 안 돼요. ㅋㅋ 아예 장르가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고 이야기의 지향점도 정반대 방향에 가깝습니다. 비슷한 점은 맨날 맞고 다니던 애가 사부 만나서 훈련 받는다는 것 뿐이거든요.
2021.03.02 22:39
2021.03.03 09:11
2021.03.03 00:33
아이젠보그~ 아이젠보그~ 이상 개드립이었습니다.
2021.03.03 11:47
ㅋㅋㅋ 뭔가 거창한 이름이긴 하죠. 그리고 그걸 또 탑골 드립으로 승화시키시는 듀게 탑골의 상징 수영님!
2021.03.04 13:37
이거 말씀하신 거였군요 ㅎㅎㅎ
2021.03.03 09:58
저도 사부 잘 만나서 인생역전하고 싶네요
2021.03.03 11:47
이 영화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시라는 건 아닙니다!) 별로 좋은 방향으로 역전되지는 않아요. ㅋㅋㅋ
2021.03.03 12:49
어느정도 비트는 블랙 코미디일 것은 예상했지만 후반부가 그렇게 막나갈줄은 몰랐습니다. 지적하신 여러 단점들 다 공감하지만 어쨌든 허를 찔리는 재미가 있어서 엔딩까지 시간가는 줄 몰랐네요.
2021.03.03 14:12
2021.03.04 11:47
'허를 찔리는 재미' <- 이거 맞는 것 같아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전개가 예상을 샥샥 잘 비켜나가서 계속 끝을 궁금해하게 만들더군요.
"도장의 홍일점으로 나온 배우는 이 칙칙한 영화의 칙칙한 캐릭터 속에서도 꽤 매력적인데... 기억나는 다른 영화 속 모습이 없어요." → 제 경우에는 이모젠 푸츠를 (로이배티 님께서도 호의적으로 보신 듯한) [프라이트 나이트] 리메이크를 보고 이름을 기억하게 됐어요. 뭐, 냉정하게 말하면 거기서도 '매력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주인공의 여자 친구 역할 이상으로 나아갈 정도는 아닌' 역할이고 안톤 옐친이랑 콜린 패럴이랑 데이비드 테넌트랑 토니 콜레트;;에 비하면 이름값이나 인상이 약한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제게는 이모젠 푸츠가 [호신술의 모든 것]을 기대했던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였어요(다른 하나는 인상적이었던 티저 예고편). 결국 여기서도 그냥 그 정도의 역할이었고, 영화도 [파이트 클럽]을 카메라 움직임 적고 뚱한 미국 인디 영화로 만들어 놓은 수준에 그쳤구나 싶긴 했지만요.